VR은 지금까지 나온 게임 플랫폼 통틀어 가장 이질적인 환경이다. 기존의 게임 플랫폼은 유저가 화면을 보며 조작을 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때문에 컨트롤러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게임의 핵심 경험 자체는 크게 차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VR은 다르다. VR 게임은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이라는 이름처럼, 유저가 모니터라는 장치 없이 게임 속에 들어가 있는 것과 같은 경험을 선사한다. 유저가 게임을 보는 경험도 다르고, 실재감이라는 강점 탓에(?) 기존 게임에는 없던 '조작' 문제도 새로 생겼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아직도 많은 개발사들이 VR 게임 개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에픽게임즈가 VR 슈팅게임 <로보리콜>을 개발하며 한 고민을 공유하는 자리를 가졌다. 과연 에픽게임즈는 VR 슈팅 게임을 만들면서 재미와 실재감을 위해 어떤 고민을 했을까? NDC 2017 행사에서 있었던 '로보리콜 포스트모템' 강연을 정리했다.
에픽게임즈 신광섭 차장
# VR에 최적화된 슈퍼 액션을 만들어라
<로보리콜>은 에픽게임즈가 12개월 간 개발한 VR 슈팅 게임이다. 게임은 오큘러스가 VR용 터치 컨트롤러를 개발했을 무렵, 오큘러스가 에픽게임즈에 개발비를 투자하면서 제작이 결정되었다. 다행히 에픽게임즈는 이전에 <블릿트레인>이라는 VR 슈팅 게임 데모를 개발했었다. 에픽게임즈는 이를 토대로 보다 발전된 VR 슈팅 게임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게임을 제대로 개발하려면 명확한 콘셉트가 있어야 한다. 에픽게임즈는 <로보리콜>를 본격적으로 개발하기 전, 5가지 원칙을 세웠다.
첫 번째 키워드는 '메트릭스'였다. 유저는 <메트릭스> 시리즈의 '네오'처럼 게임 속에서 최고의 힘을 가진 존재다. 에픽게임즈는 VR 게임이라는 존재 자체가 익숙하지 않은 시장에서, 복잡하거나 심도 있는 이야기는 유저들에게 장벽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가 화려하고 시원시원하게 나쁜 놈(?)들을 떼려 부수는 게임을 기획했다.
두 번째는 '아케이드'다. 강력한 힘을 체감하려면 액션과 화려함에 무게를 둬야 한다. 에픽게임즈는 이를 위해 아케이드 게임처럼 유저가 가볍게 게임을 즐기고 화려하게 솜씨를 뽐내는 분위기를 기획했다. 플레이는 쉽게 진행되고 유저가 고난이도의 액션을 성공하면 추가 점수를 얻는 식이다. 에픽게임즈는 이를 위해 스코어보드 기능을 추가해, 유저들이 전세계 유저들과 경쟁하며 자신의 액션을 뽐낼 수 있도록 만들었다.
세 번째는 '디바이스에 최적화된 경험'이다. VR은 아직 유저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환경이다. 에픽게임즈는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VR에 특화된 최고의 경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말하는 최고의 경험이란 몰입감이나 실체감 같은 VR 특유의 장점은 물론, VR이 약점으로 지적받는 그래픽 퍼포먼스까지 해결된 경험을 말한다.
네 번째는 '현실적인 몰입감'이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VR 게임의 최고 강점은 현실과 같은 경험이다. 에픽게임즈는 이를 강조하기 위해 <로보리콜>의 화풍을 실사로 만들었고, 게임 속 세계 또한 현실과 흡사한 근미래로 설정했다. 일부 스테이지는 현실의 배경을 참고해 만들었을 정도다.
마지막은 '20분의 플레이 경험 주기'다. 일반적으로 유저들이 집중력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약 6~7분으로 알려져 있다. 더군다나 VR 게임은 다른 플랫폼 게임에 비해 몸을 많이 움직이기 때문에 유저의 피로가 빨리 온다. 때문에 에픽게임즈는 게임의 한 '몬스터 웨이브'가 5~6분 내에 끝날 수 있도록 디자인했다. 그리고 한 스테이지는 이런 웨이브가 3개 전후로 뭉쳐 15분 내외로 끝낸다는 원칙을 세웠다.
# VR 게임의 영원한 난제, 이동
이러한 대원칙이 정해지자 본격적인 기획이 시작됐다. 개발진이 <로보리콜>을 만들며 가장 고민했던 것은 '이동'이었다.
기존의 게임은 대부분 화면 속 캐릭터를 컨트롤러로 조종해 움직이는 방식을 사용한다. 하지만 VR 게임은 이런 전통적인 이동 방식과는 전혀 맞지 않았다. 유저가 게임 속에 들어가 있는 것 같은 경험을 주는 VR 게임 특성 상, 실제로 유저는 움직이지 않는데 유저가 보는 화면이 움직이면 '멀미'를 유발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VR 게임은 기존과는 다른 다양한 방법을 써 이동 문제를 극복하려 한다. 어떤 게임은 유저를 '조종석'에 앉혀 전통적인 이동 조작이 어색하지 않게 하기도 하고, 어떤 게임은 손에 쥔 컨트롤러를 이용해 '등반'하는 느낌을 선사하기도 한다. 심지어 최근에는 유저가 제자리서 걸을 수 있는 VR 게임 전용 기기(컨트롤러?)가 등장하기도 했다.
<로보리콜>은 이런 방법 대신 '순간이동' 방식을 선택했다. 말 그대로 유저가 컨트롤러로 가고 싶은 지점을 선택하면, 캐릭터가 그곳에 가 있는 방식이다. 에픽게임즈는 이런 '순간이동'이 <로보리콜>의 콘셉트 중 하나인 '슈퍼파워'(메트릭스)에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이것을 어떻게 구현하느냐였다. <로보리콜>이 360° VR 슈팅으로 기획된 만큼 이동뿐만 아니라, 이동 후 시야 설정도 문제였다. 에픽게임즈는 처음엔 오큘러스 터치 컨트롤러의 트리거로 이동할 곳을 설정한 뒤, 손목을 돌려 이동 후 보고 있는 방향을 설정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2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하나는 유저가 손목을 돌려 시야를 설정하는 것이 불편하고 불명확하다는 점이었고, 다른 하나는 유저가 내가 얼마나 이동할 수 있는지 '체감'하기 힘들다는 점이었다. 둘 다 가볍지 않은 문제였다. 전자는 불편하고 불명확한 조작 때문에 '멀미' 문제를 만들기 쉬웠고, 후자는 유저가 자신의 (이동) 한계를 알기 힘들어 게임을 마음 편히 즐길 수 없었다.
개발진은 먼저 오큘러스 터치의 '아날로그' 스틱을 이용해 이동 후 시야를 설정하도록 바꿔봤다. 다행히 많은 이들이 아날로그 스틱에 익숙한 만큼, 이전보다는 더 빨리, 쉽게 시야 조종에 익숙해졌다.
하지만 이 문제를 해결하니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이번엔 VR 게임의 너무 높은 현실성 때문에 유저들이 이동 후 실제로 몸을 돌리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동이 잦아지자 유저가 오큘러스의 트랙킹 센서 앞에서 등돌려 인식범위에서 벗어나는 일까지 발생했다. 결국 에픽게임즈는 캐릭터가 이동했을 때 유저가 고개 돌릴 것을 미리 계산해, 유저가 순간이동 후 고개를 바로 돌리게끔 유도하는 장치를 더했다.
이동 범위 인식 문제는 <버젯 컷>이라는 경쟁작에서 해결책을 찾았다. 이 작품은 <로보리콜>과 달리, 순간이동 지점을 '포물선'으로 표시하는 작품이었다. 포물선으로 이동 지점을 표시하니, 유저는 자연스럽게 포물선 각도를 보며 내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파악하게 되었다. 또한 포물선 방식을 사용함으로써 장애물 뒤로도 순간이동 할 수 있게 되는 등 게임이 보다 매끄러워졌다.
에픽게임즈는 이후 순간이동 시 깜빡임 기능을 추가해 위화감을 줄이고, 순간이동 직후 시간의 흐름을 느리게 만들어 유저의 상황파악을 쉽게 하고 '슈퍼파워'라는 느낌을 강화하는 등 '순간이동' 방식을 다듬었다.
# 실재감과 슈퍼파워 사이에서, 인터렉션
이동 다음으로 신경 썼던 것은 '인터렉션'이다. VR 게임은 현실성, 실재감이 강점인 만큼, 개발진은 유저들이 직접 게임 속 물건들을 집고 만들 수 있는 게임을 만들고 싶었다. <로보리콜> 특유의 적 로봇을 잡고, 팔과 다리를 뜯어낼 수 있는 기능은 이런 고민에서 탄생했다.
물건을 잡는 것은 오큘러스 터치로 쉽게 해결됐다. 기존 VR 게임은 손의 움직임을 추적해 물건을 잡는 방식을 사용했는데, 이 경우 실제로 유저 손에 잡히는 감각을 주지 못해 오히려 현실감을 깎는 요인이었다. 하지만 오큘러스 터치의 경우, 실제로 유저가 무언가를 잡고 있기 때문에 이런 부작용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었다.
오히려 문제가 된 것은 '잡을 수 있는 것'을 표시하는 것이었다. VR은 현실성이 강점이다 보니 대부분 실사 풍으로 게임을 만든다. 그러다 보니 잡을 수 있는 오브젝트를 명확히 표시하는데 어려움이 컸다. 그렇다고 VR 게임에 익숙하지 않은 유저에게 아무거나 잡아보라고 권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개발진은 다소 현실성을 떨어뜨릴지라도, 콘솔 게임처럼 잡을 수 있는 오브젝트에 전용 표식을 넣는 방식을 적용하는 것으로 타협했다.
잡기 문제가 해결되니 이젠 '재장전'이 이슈가 되었다. 에픽게임즈는 액션 영화의 주인공처럼, 유저가 멋들어지게 총을 재장전 할 수 있는 게임을 꿈꿨다. 개발진을 이를 위해 다른 VR 슈팅 게임을 살펴봤지만, 아쉽게도 참고할 만한 멋진 재장전 방식을 찾을 수 없었다.
개발진은 '네오'(메트릭스의 주인공)이라면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메트릭스>에서 네오는 총알에 구애 받지 않았다. 다 쓴 총을 버리고 코트에서 새 총을 꺼내면 되었으니까!
개발진은 이를 참고해 <로보리콜>에서도 유저가 총알에 구애 받지 않고 언제든 새 총을 꺼낼 수 있게 만들었다. 대신 게임의 조작감을 강조하기 위해, 던진 총이 적에게 부딪혀 튕겨 나왔을 때 총을 잡으면 재장전(?)이 완료되는 기능을 추가했다.
그 결과, 유저들은 재장전에 구애 받지 않는 '슈퍼파워'를 가진 주인공이 될 수 있었고, 슈팅 게임의 다소 단조로운 액션도 총을 던져 적을 맞히고 튕겨 나온 것을 잡는 식으로 보다 다채로워졌다.
# 때론 비현실적으로, 때론 현실적으로. VR 게임 아트 만들기
<로보리콜>은 기본적으로 실사 풍으로 그려진 VR 슈팅 게임이다. VR 특유의 현실성과 몰입도를 극대화하기 위함이다. 에픽게임즈는 이를 위해 현실 속 도시 사진을 찍고 이를 참고해 배경을 만들 정도로 게임의 현실성과 몰입도에 공을 들였다.
예를 들어 <로보리콜>의 총기는 근미래라는 설정에 맞게 화려한 디자인을 자랑하지만, 의외로 총기 크기는 현실적이다. 이는 유저가 '거대한 총을 한 손으로 들고 있다'라는 비현실적인 상황 때문에 몰입감을 잃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성'이 모든 것에 적용된 것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로보리콜>의 적인 '로봇'들은 서브컬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같아 보이는 로봇이 아니라, 기계적인 특성이 극도로 강조된 진짜(?) 로봇으로 디자인되었다.
이는 사람을 쏜다는 거부감을 줄이기 위함이다. 모니터라는 창을 통해 적을 보는 다른 플랫폼과 달리, VR 게임은 유저가 눈 앞의(?) 적을 보고 죽이게 된다. 때문에 다른 플랫폼에선 문제가 되지 않았던 '살인'이 VR 게임에선 큰 거부감을 안길 수도 있다. 때문에 에픽게임즈는 일부러 적을 로봇으로 설정했고 로봇들의 디자인도 화려하고 컬러풀하게 만들어, <로보리콜> 속 세계가 '게임'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강조했다.
# 퍼포먼스를 확보하라! 몬스터 구현 꼼수
VR 게임은 다른 플랫폼 게임에 비해 구동하는데 많은 리소스를 소모한다. VR이라는 특성 상, 게임 속에서 구현해야 할 것이 많고, 이것은 그대로 PC나 콘솔의 리소스 소모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VR 게임을 만들 때는 이 연산 리소스를 효과적으로 관리해 퍼포먼스를 끌어 올리는 것이 중요하다.
<로보리콜> 개발진이 이를 위해 2가지 방법을 사용했다. 하나는 사람이 가진 시야의 한계를 이용하는 방법이다. 대부분의 유저는 게임을 할 때 시선이 많이 이동하지 않는다. 보통 자신의 눈높이 기준으로 약간의 위아래 범위를 본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인간 크기 몬스터의 다리를 보는 유저는 거의 없다는 의미다.
개발진은 이 사실을 이용해 유저의 시선이 자주 가는 부분에 그래픽 리소스를 집중했다. 예를 들어 인간 크기의 로봇이라면 머리부터 가슴까지에 폴리곤을 집중한 식이다. <로보리콜>은 이 기법 덕에 몬스터 하나에 사용되는 텍스처를 2~3개로 줄일 수 있었다.
다른 하나는 렌더링 기법의 변경이다. 현재 PC, 콘솔 게임의 대부분은 디퍼드 렌더링 방식으로 그래픽을 구현한다. 디퍼드 렌더링은 한 화면에 수많은 라이팅 효과를 넣어 보다 현실적이고 화려한 효과를 만들 수 있는 방식이다. 다만 이 때문에 메모리를 많이 요구하는 것이 흠이다.
에픽게임즈 개발진은 여기서 역으로 생각해 고전 방식인 '포워드 렌더링' 기법을 사용했다. 포워드 렌더링은 하드웨어가 발달하기 전 사용된 방식이라 라이팅 연산 등은 느리지만, 대신 리소스 소모가 적다는 것이 강점이다. <로보리코> 개발진은 이렇게 포워드 렌더링 방식을 사용해 리소스를 아끼고, 대신 떨어지는 그래픽 퍼포먼스는 'MSAA' 등의 방법을 사용해 보강했다.
<로보리콜>은 이런 노력들에 힘입어 그래픽과 퍼포먼스라는 토끼를 잡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