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출시된 <주사위의 신>은 <모두의 마블>이 점령하고 있던 모바일 보드게임 시장에서 유의미한 성과를 낸 극소수의 보드게임 중 하나다. 또한 게임은 국산 모바일 보드게임으로선 드물게도 2016년 페이스북 올해의 게임 선정, 홍콩 양대 마켓 올해의 게임 선정 등 해외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주사위의 신>을 개발한 조이시티 신상현 팀장은 게임의 이런 흥행에 대해 기존 보드게임과 차별화된 룰,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룰을 다듬고 검증할 수 있었던 무수한 프로토타입 테스트 덕이라고 말했다. 심상현 팀장이 말하는 <주사위의 신>의 구상 과정, 그리고 개발기를 정리했다.
신상현 팀장이 <주사위의 신>을 구상할 때 가장 중요시한 것은 '차별성'이었다. 당시 모바일 모노폴리류 보드게임 시장은 <모두의 마블 for Kakao>가 꽉 잡고 있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신 팀장은 기존 게임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콘셉트론 흥행은커녕, 차별화조차 힘들 것이라고 판단했다.
팀이 고심 끝에 내놓은 것은 TCG처럼 유저가 '스킬카드'를 쓸 수 있는 보드게임이었다. 기존 보드게임은 주사위 의존도가 큰 장르 특성 상 '운'에 의해 게임이 좌우되는 경향이 컸다. 하지만 이런 룰에 스킬카드와 같은 제 2의 선택지가 제시되면 게임이 더 깊이 있어질 것이라고 판단했다.
<주사위의 신> 콘셉트를 정한 신 팀장과 팀원들은 이를 기반으로 보드와 스킬 카드를 디자인하기 했다. 그리고 가완성된 결과물을 바탕으로 프로토타입을 만들어 재미를 검증하기 시작했다. 다만 한 가지 독특한 것은 <주사위의 신> 팀이 만든 프로토타입은 종이와 실제 주사위 등으로 이뤄진 페이퍼 버전이라는 점이었다.
# "여러분, 이건 사실 AI의 일입니다" 페이퍼 프로토타입 시 주의할 점
<주사위의 신> 페이퍼 버전은 신 팀장이 과거 <하스스톤> 개발기를 보고 영감을 받아 만든 실물(?) 프로토타입이다. 페이퍼 버전을 간단히 설명하면 프로그래밍으로 구현된 게임이 아니라, 실제 보드게임처럼 종이로 그려진 보드, 플라스틱 말판 등 실제 기물로 이뤄진 프로토 타입이다. 이러한 페이퍼 버전 프로토타입은 많은 보드게임 개발 과정에서 실제로 사용하는 방법이다.
페이퍼 버전의 가장 큰 강점은 게임을 만들고 수정하는 품이 적게 들어, 개발 초기에 불필요한 리소스 낭비를 줄일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주사위의 신> 페이퍼 버전은 프로그래머나 아티스트의 도움 없이, 기획자들이 직접 종이에 그리고 다른 보드게임의 기물을 가져와(말을 직접 만들긴 힘드니까) 뚝딱뚝딱 만들어졌다. 또한 테스트 과정 중 규칙이 바뀌거나 오류를 발견해도 기획 딴에서 충분히 수정할 수 있기 때문에, 리소스 소모 없이 반복적인 테스트를 하는데 용이하다.
물론 페이퍼 버전이 완벽한 것은 아니다. <주사위의 신> 팀이 페이퍼 버전으로 게임을 테스트하며 발견한 주의점은 크게 2가지다.
하나는 기물 자체의 퀄리티에서 오는 오류. 페이퍼 버전은 기본적으로 빨리 실물을 만들어 테스트하는 것이 목적인 프로토타입이다. 때문에 실제 게임은 물론, 실물 보드게임과 비교했을 때 기물의 퀄리티가 떨어질 수 밖에 없다. 특히나 이 기물이 '카드'같이 플레이에 영향을 주는 것이라면, 기물의 퀄리티 때문에 게임 경험이 오염될 수도 있다.
실제로 <주사위의 신> 페이퍼 버전의 경우, 종이 카드의 낮은 퀄리티 때문에 카드의 훼손이 빈번하게 일어났고, 이 때문에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카드가 어떤 카드인지 알 수 있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손에 쥔 카드로 다양한 변수를 만드는 <주사위의 신>이란 게임에선 치명적인 오염이었다. 이 문제는 페이퍼 버전 카드를 새로 만들고, 시중에서 판매되는 오프라인 TCG용 '카드 프로텍터'를 카드에 씌운 뒤에야 해결됐다.
다른 주의점은 사람이 해야할 일과 컴퓨터가 해야 할 일의 '구분'이었다. <주사위의 신>은 모바일 보드게임으로 만들어졌고, 통행료 지급이나 세금 납부, 건물 업그레이드 비용 계산 등은 AI가 자동으로 해주도록 기획됐다. 하지만 페이퍼 버전에선 이를 사람이 직접 할 수 밖에 없었고, 이 과정에서 느끼는 귀찮음이 (원래는 AI의 일이라는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프로토타입의 재미를 평가하는데 좋지 않은 영향을 줬다.
<주사위의 신> 팀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AI가 대신 일을 하는 각종 계산 파트를 대신해 줄 전용 프로그램을 새로 만들었다. 유저가 직접 하는 일은 페이퍼 버전 프로토타입으로 플레이하고 AI가 할 일은 프로그램을 통해 하게 함으로써, 두 경험을 분리해 테스터들이 유저의 경험만을 평가하게 한 것이다.
신 팀장은 이런 사례들을 이야기하며, 실물로 프로토타입을 만들 경우 나중에 실제 만들어질 환경과의 차이점을 염두에 둬야만 효과적인 테스팅이 가능하다고 조언했다.
# 최대한 목표와 동일하게 페이퍼 버전을 만들어라
그렇다면 <주사위의 신> 팀은 어떤 과정을 거쳐 게임을 다듬었을까? 신상현 팀장이 처음 테스트를 고민한 것은 '스킬 카드'의 획득 빈도와 시점이었다. 만약 스킬 카드의 획득 빈도가 너무 뜸하면 다른 보드게임과 실질적인 차별화가 힘들었고, 반대로 카드 획득 시점이 너무 잦으면 보드게임이 아니라 <하스스톤> 같은 카드게임이 돼 버렸다. 때문에 개발팀은 일단 ▲ 정해진 턴에 획득 ▲ 처음부터 획득 2가지 방법을 두고 페이퍼 버전으로 테스트를 반복했다.
테스트 결과, 두 버전은 장단점이 너무도 극명했다.
먼저 정해진 턴에 스킬 카드를 획득하는 경우, 획득 시점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기획 딴에서 유저들이 언제 어느 빈도로 스킬을 사용할지 잘 통제할 수 있다는 장점이 존재했다. 반대로 단점으론 초반 획득 시점에 '후반 지향형' 스킬 카드를 얻을 경우, '사실상' 초반을 스킬 카드 없이 플레이할 경우가 생겼다. 드로우 또한 운적인 요소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 때문에 개발진의 노림수가 무너지고 부정적인 경험을 줄 수 있다는 점이 문제였다.
처음에 스킬 카드를 모두 가져가는 경우도 장단점이 극명했다. 먼저 장점으론 처음부터 모든 스킬 카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유저가 변수 없이 자신만의 전략을 실현할 수 있었다. 다만 이 때문에 콤보가 쉬워져 사실상 보드게임이 아니라 카드게임이 된다는 단점도 존재했다.
개발진은 고민 끝에 두 방법을 절충하기로 결정했다. 초반에 일부 카드를 가져갈 수 있게 설정해 유저들이 초반 플레이를 설계할 수 있게 함과 동시에, 게임 중 일정 시점마다 남은 카드를 지급해 게임에 지속적으로 변수를 더하고 정형화된 플레이가 안 되도록 유도했다. 개발진은 이런 기조 아래 수 차례 페이퍼 프로토타입 플레이를 실시해 ▲ 스킬카드 3장 가진 채 시작 ▲ 스킬카드 6장은 게임 중 지급이라는 규칙을 확립했다.
이후에도 페이퍼 버전 테스트를 통해 규칙이 하나 하나 확립됐다. 예를 들어 카드 사용 시점은 주사위 굴리기 전, 토지에 도착했을 때, 이벤트가 발생했을 때 등 여러 시점 중, 유저가 해당 턴의 '전반적인 판'을 고민하는 주사위 굴리기 전에 하게 함으로서 고민의 깊이를 강화했다. 다른 시점에 카드를 쓰게 할 경우, 고민을 여러 번 해야 하고 플레이 호흡도 끊어진다는 피드백을 테스트를 통해 얻었기 때문이다.
신 팀장은 이런 사례가 최초 페이퍼 버전을 만들었을 때, 그들이 구상한 게임과 최대한 비슷하게 만들었던 덕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페이퍼 버전은 개발하고자 하는 장르와 최대한 비슷하게 만드는 것이 좋다. 그래야 이 단계에서 많은 반복 테스트를 통해 차별성을 강화하고 또 다듬을 수 있다"고 조언했다.
# 의미 없는 선택은 없애고, 의미 있는 선택을 늘려라
페이퍼 버전 테스팅은 게임의 규칙이나 시스템을 간결화하는데도 도움을 줬다. <주사위의 신>은 스킬 카드라는 요소 때문에 다른 보드게임보다 고민할 것이 더 많은 게임이다. 이는 유저가 직접 기물을 움직이고 프로그램에 값을 입력해야 하는 페이퍼 버전 테스트에서 더욱 잘 나타났다. 개발팀은 페이퍼 버전으로 느낀 피로도는 실제 게임을 프로그래밍하고 나서도 크든 작든 느껴질 것이라 생각하고 시스템 다듬기에 돌입했다.
페이퍼 버전 테스터들에게 설문 조사를 한 결과, 의외로 이런 모노폴리류 보드게임의 필수 요소인 토지 구매, 건물 업그레이드 같은 부분에서 피로도가 높이 나타났다. 심층 조사를 해보니, 대부분의 유저들은 토지 구입, 도시 업그레이드 단계에서 (돈이 없지 않는 한) 거의 무조건 땅을 사고 업그레이드를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것이 유저에게 이득이기 때문이다.
이를 인지한 개발팀은 아예 유저가 처음 토지에 발을 디뎠을 때 자동으로, 공짜로 토지를 구매하도록 규칙을 바꿨다. 도시 업그레이드도 유저가 보드를 한 바퀴 돌면 보유한 모든 도시가 업그레이드되도록 규칙을 간략화했다. 그 결과, 테스터들의 만족도가 크게 올랐다. 유저에게 주어지는 무의미한 반복을 아예 없앰으로써 게임의 호흡은 끌어 올리고, 유저들이 큰 전략을 고민한 시간을 확보한 것이 주효했다.
그 다음으로 피로도가 높은 부분은 파산 대응 파트였다. 기존 모노폴리류 보드게임은 유저가 파산할 경우, 자신이 소유한 땅을 매각해 이를 벗어나는 기능이 존재한다. 하지만 <주사위의 신> 페이퍼 버전을 플레이한 결과, 유저가 최적의 효율을 위해 땅값을 계산하고 팔 땅을 정하는 단계에서 너무 피로도가 컸다. 또한 장르 특성 상, 땅을 팔수록 승리 가능성이 낮아진다는 것도 문제였다.
개발팀은 고민 끝에 아예 땅을 매각한다는 개념 자체를 제거했다. 대신 파산 시 계정이 보유한 돈을 해당 게임에서 꺼내 쓸 수 있게(게임 내에선 대출이라 표현) 만들었다. 유저가 파산/대출 여부만 고민하게 한 것. 이는 유저가 고민할 것을 줄이고 불리한 유저도 여전히 높은 역전 가능성을 유지하게 해, 게임이 극후반부에도 긴장감이 유지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기고 있는 유저는 상대가 대출을 받을 경우 승리 보상이 커지기 때문에 이 시스템을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단, 이런 시스템 간결화가 긍정적인 효과만 만든 것은 아니었다. 간략화 결과, 유저가 게임 중 할 수 있는 행동이 줄었다. 가장 큰 문제는 토지 구매, 건물 업그레이드를 자동화 함에 따라, 게임이 진행될수록 유저가 의미 있는 행동을 할 기회가 점점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기존 모노폴리류 게임은 이 단계에서 '자기 땅에 도착했으면 건물을 업그레이드 한다'라는 의미 있는 액션을 할 수 있었지만, <주사위의 신>은 시스템 특성 상 자기 땅에 도착해도 '통행료를 내지 않는다' 말곤 득이 없었다. 물론 이것도 무시 못할 이득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수동적인 이득이었다.
개발팀은 기존 보드게임에서 유저들이 어떤 행동을 해 어떤 효과를 얻느냐에 집중했다. 다른 모노폴리류 게임에서 유저들이 자기 땅에서 고민하는 것은 투자 여부였고, 투자를 한 경우 통행료가 올랐다. 개발팀은 이 부분에만 집중해 <주사위의 신>에서 유저가 자기 땅에 도착했을 경우 돈을 내고 통행료 배율을 올릴 수 있는 기능을 추가했다.
마지막으로 신상현 팀장은 '게임은 흥미로운 선택의 연속이다'라는 시드 마이어의 발언을 말하며 특정한 목적에 매몰돼 게임의 본질을 왜곡하는 것을 경계하라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