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떤 과학적 근거가 없는 ‘게임 질병화’의 접근방식에 대해, 386 컴퓨터로 양자컴퓨터를 논하고 제단 하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금일 NDC를 찾은 ‘이락디지털문화연구소’의 이장주 소장은 ‘게임에 매달리는 사람들’이라는 주제로 ‘게임 질병화’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위와 같이 말했다.
강연을 통해, 최근 지속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는 ‘게임 질병화’가 어떤 문제를 일으키는지를 전하고자 했다는 그의 강연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지, 금일 있었던 강의를 1인칭 시점으로 정리했다. /디스이즈게임 박준영 기자
# 게임은 인간의 본능을 성장시키는 가장 좋은 매개체
몸을 막 가누게 되어 세상을 탐색하기 시작한 아기의 방에 가장 많이 두는 장난감 중 하나가 ‘모빌’이다. 이 모빌을 아기의 몸에 연결해 아기가 움직일 때 모빌도 함께 움직이게 한다면, 아기는 자신의 움직임에 함께 반응하는 모빌에 흥미를 느끼게 된다. 이 과정은 아기가 모빌을 통제할 수 있다는 ‘통제감’에 재미를 느끼게 됨을 알 수 있다.
자유롭게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통제감’에 흥미를 느낀 아이들은 성장 과정에서 숟가락질을 자신이 하겠다고 주장하며 엉성한 수저질로 식탁을 엉망으로 만들거나, 익스트림 스포츠를 하면서 부모님의 속을 썩이기도 한다. 이와 같은 성장 과정으로 볼 때 사회에서 정해진 룰과 부모의 말을 무조건적으로 순종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은 없으며, ‘통제’에 대한 능동력을 키우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라고 할 수 있다.
게임은 이와 같은 인간의 본능적 관점으로 봤을 때, ‘통제감’과 ‘능동력’과 같은 적응의 영역을 키워 줄 수 있는 간장 효과적인 방법이고, 본인의 미래를 스스로 개척하는 주도적 방법의 연습이다.
# ‘질병화’는 그 어떤 사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산업혁명이 부른 급격한 산업화는 기존의 공동체 사회를 해체하고 사회적인 인간으로 사람들을 적응시키고자 노력했으며, 이 과정에서 적응에 어려움을 호소하거나 우울감을 표하는 사람들을 일탈이라 부르고 ‘병리화’했다. 오늘날 게임을 질병화 하려는 시도 역시, 산업혁명이 일어난 19세기의 ‘적응 기준’을 21세기에 적용하려는 진단에 지나지 않고, 단순 병리화가 절대 성공할 수 없는 이유를 브루스 알렉산더 박사의 ‘쥐 공원’실험에서 찾을 수 있다.
해당 실험은, 약물에 중독되어 매일같이 약물을 원하는 쥐들을 감옥에 가두는 ‘격리팀’과 공동체 생활을 하게 하는 ‘모형 공원’팀으로 나눠 생활을 하게 한 실험이었다. 그 결과 격리된 쥐들은 계속해서 약물을 원하고 치료가 불가능한 단계까지 이어졌지만, 공원에 모여 공동체 생활을 시작한 쥐들은 더 이상 약물을 원하지 않았다는 내용이었다. 이 실험을 통해 부적응자로 규정하고 격리하게 되는 간단한 해결법은 근본적인 해결법으로 작용하지 못하며, 환경적 영향이 자율적이고 사회적인 인간을 만들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게임과 마약은 성격부터 달라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하기 어렵지만, 게임이 질병화를 논할 정도로 심각한 사회문제라고 판단했다면, 치료시설 건립이나 ‘질병화’같은 간단하고 비싼 해결책이 아닌 근본적 해결 방법이 필요하다.
# 과거의 이론에 얽매인다면 세계는 중독의 병동
게임 중독과 관련된 논의는 이미 20년도 더 된 이야기이며, 1996년 이반 골드버그가 ‘인터넷 중독’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을 기점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매체에 빠져 부적응을 하는 사람들을 규정하는 단어가 필요했던 그는 ‘인터넷 중독’이라는 단어를 사용했고, 당시엔 논의가 오고 갈 수 있지만 오늘날 사회에 이를 적용하는 건 어렵다고 생각한다.
인터넷이 보급화 되고 이를 활용한 신규 산업들이 등장했으며, 각종 IT회사는 전 세계를 이끄는 주류 회사로 성장하게 됐다. 오늘날의 사회에 과거의 ‘인터넷 중독’이론을 적용하기 힘든 이유 역시, 과거의 관점에서 본다면 지금은 사회는 하나의 큰 병동에 불과하게 되기 때문이다. 시대가 변하는 만큼 중독에 대한 개념 역시도 다시금 정립될 분명한 이유가 있다.
# 게임이 정말 문제라면 객관적 근거부터 찾아와라
‘게임 질병화’에 관한 논의가 타당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우선 이론적 근거가 없다는 점이다. 흔히 사용하는 ‘중독’은 영단어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개념적 혼란을 주게 되는데, 탐닉을 뜻하는 ‘Addiction’과 유독물질에 취함을 뜻하는 ‘Intoxication’을 모두 ‘중독’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게임 중독과 관련해 그린피스는 체계적인 연구를 위해서는 진단명을 내려야 하며, ‘게임 중독’이라고 규정하지 않는다면 연구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중독’의 단어적 해석에서 ‘유독물질에 취함’으로 해석해도 게임을 한다는 것은 심각한 뇌손상을 부르는 중독물질을 발생시키지 않으며, 탐닉의 의미로 해석해도 진단 기준에 있어 ‘다른 장애로 더 잘 설명되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에 위배된다. 즉, ‘게임 중독’을 규정할 수 있는 확실한 증거가 없으니 이를 문제로 만들어 사회문제화한다는 논리는 화살을 쏘고 나서 과녁을 그리는 행위에 불과하다.
다음으로 오늘날의 게임은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회학자 스텐리 코헨의 ‘도덕적 공황 이론’에 따르면 장년층은 청년층의 도덕적 타락이 사회를 붕괴시킬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이런 이유로 인류는 과거부터 만화나 록앤롤을 젊은이들의 타락의 원흉으로 이야기했으며, 시간이 지나 그 규제의 대상이 게임으로 바뀌었다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객관적인 데이터로 게임의 문제를 판단하는 것이 아닌 색안경을 낀 연구자들이 주관적 성향이 들어간 연구를 하거나, 정치적 위기를 벗어나려는 일부 정치인들이 개입해 문제가 확증화 되고 있다고 본다.
게임을 '중독'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객관적 증거가 너무나도 부족하며, 이를 문제로 규정하기 위해 진단명을 만든다는 것은 화살을 쏘고 난 뒤 과녁을 그리는 것이다.
# 게임 장애, ‘서비스가 원활하지 못함’을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질병은 단어 그 자체로 두려움과 혐오의 대상이다.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서 ‘게임’이라는 매력적인 문화 산업이 비합리적인 주장으로 혐오스러운 질병 산업으로 변질되고 있다.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실험과 능력을 키우는 인간의 본능인 ‘게임’을 정말로 질병으로써 주장하려 한다면 분명한 과학적 근거와 장기적 문화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따져봐야 할 것이며, 양자컴퓨터를 386 컴퓨터로 재단하는 무책임을 중단하길 바란다.
‘게임 장애’가 단어로써 사용되는 일은 게임의 서비스가 원활하지 못한 상태일 때 사과의 말을 전하면서 사용되는 것이 전부여야 하며, 사회적 문제를 게임만의 문제로 돌리는 ‘남 탓’은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 된다는 이야기를 끝으로 오늘 강의를 마무리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