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전문 각본가 알렉시스 케네디가 8월 30일 게임 웹진 가마수트라에 플레이어와 NPC의 대화를 중심으로 게임 플레이어에게 세계관을 잘 이해시키는 방법을 설명하는 "Centuries Ago The Dark Lord: when and how to dump"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바로가기)
알렉시스 케네디는 탄탄한 구성력과 흡입력 있는 줄거리로 널리 알려진 게임 각본가다. 알렉시스는 <폴른 런던>, <선리스 씨>의 제작을 맡아 직접 각본을 썼으며, 바이오웨어(BioWare)의 초청으로 <드래곤 에이지> 시리즈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기도 했다. 그는 최근까지 페일베터 게임스(Failbetter Games)를 이끌었고, 지난 6월에는 하워드 러브크래프트(H. P. Lovecraft)의 공포소설을 기반으로 한 카드게임 <컬티스트 시뮬레이터>를 발표했다.
'로어 덤프'(Lore dump)란 게임 세계관을 형성하는 정보 더미를 뜻한다. '게임 속 전쟁의 원인' 같은 배경이나 '여기서는 NPC를 구해야 한다'는 당위가 게임 속에 녹아드는 것이 로어 덤프에 해당한다. 로어 덤프는 주로 대화, 이벤트 씬, 팝업 메시지 같은 게임 속 요소로 나타난다. 벽화나 책 같은 세세한 연출 요소로도 로어 덤프를 볼 수 있으며, 게임 로딩 중 '드래곤본의 노래'같은 로어 덤프가 삽입되는 경우도 있다.
알렉시스는 'TMI'(Too Much Information)가 되거나 실제로 쓰지 않을 법한 어투나 문체로 나타나는 로어 덤프에 대해 지적하면서 '플레이어가 게임 설정에 집중하게끔 이야기를 쓰는 방법'을 소개한다. 디스이즈게임에서는 어떻게 좋은 게임 줄거리를 쓸지 고민하는 게임 작가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해당 기사의 전문을 번역, 편집해 공개한다.
기사 맥락에 따라 일부 부분이 삭제되었으며, 언어의 차이를 극복하고 이해를 돕기 위해 기자의 의역과 본문엔 없는 사진이 사용했음을 미리 밝힌다.
게임 줄거리는 대부분 작가 의도에 완벽하게 들어맞지 않는다. 예를 들어 당신이 게임 작가라고 가정해보자. 당신은 주인공과 동료 NPC 사이의 대화를 각본으로 써야 한다. 당신은 NPC의 고향이 어디고, 왜 주인공과 전투에 나서는지 같은 설정을 소개하는 대사를 정성껏 쓴다. 당신은 이 설정을 플레이어와 NPC 사이의 관계 구성의 바탕으로 삼는다. 그리고 이를 게임 줄거리에 눈에 보이지 않게 집어넣는다.
그런데 게임 출시 직전 예산 부족으로 그 NPC가 잘려버린다. 때문에 그 누구도 각본 속 설정을 이해하지 못한다. 게임 출시 2개월 뒤, 게임 줄거리의 큰 부분에 설정 붕괴가 생겼음이 드러난다. 이제 어떻게 할 건가? 아마 당신은 잔뜩 움츠라들어 "그게 사실은 이런 설정입니다"라고 뜨는 팝업 텍스트 화면을 추가하게 되고 이를 본 플레이어는 "윽, TMI"라고 신음할 것이다.
어떤 이는 로어 덤프를 좋아한다. 세밀한 세계관을 만들려는 작가를 위한 시나리오 작법서는 계속 팔리고 있다. 그래서 게임 작가는 플레이어나 출시된 게임보다 그 게임 세계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는 존재다. 하지만 꼭 플레이어 면전에 모든 이야기보따리를 풀 필요는 없다. 아래에 좋지 않은 로어 덤프의 예를 설명한다.
1. 사람이 하는 말 같지 않은 것(Don’t sound like something a human would say)
플레이어: 이 도시에 대해 말해줘.
NPC: 다크버그는 글로밍 왕국의 수도입니다. 많은 이들이 쉐도우빌과의 다가오는 전쟁 때문에 이곳에 방문객의 발길이 끊길 것을 우려함에도, 다크버그는 여전히 전 세계의 상인들을 매혹하고 있습니다.
#예시 1: 사람이 하는 말 같지 않은 것
플레이어: 이 도시에 대해 말해줘.
알렉시스: 런던은 영연방 잉글랜드의 수도입니다. 많은 이들이 브렉시트 때문에 방문객의 발길이 끊길 것을 우려함에도, 런던은 여전히 전 세계의 관광객을 매혹하고 있습니다.
2. 사람이 쓴 것처럼 읽히지 않는 것(Don’t read like something a human would write)
[서신] 그대가 아는 바와 같이 수상은 다가오는 쉐도우빌과의 전쟁에 깊은 우려를 표하고 있습니다. 비록 그녀는 공개적으로는 전쟁의 승리로 우리나라가 다시금 일어설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예시 2: 사람이 쓴 것처럼 읽히지 않는 것
[이메일] 롯티, 당신이 아는 바와 같이 수상은 EU 탈퇴를 매우 걱정하고 있습니다. 비록 그녀가 공개적으로는 브렉시트가 우리나라가 다시금 일어설 기회라고 주장하지만….
3. 정보가 너무 많아 숙제처럼 보이는 것 (Homework)
NPC: 다크버그의 서쪽에는 험준한 고지대가 있습니다. 중앙에는 '위대한 밤의 사원', '여제의 저택', 그리고 '고통의 박물관'이 있습니다. 당신은 '브레스 구역'에서 많은 상점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브레스 구역을 찾아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 예시 3: 정보가 너무 많아 숙제처럼 보이는 것
알렉시스: 런던의 서쪽에는 험준한 고지대가 있습니다. 중앙에는 '세인트 폴 대성당', '웨스트민스터궁', 그리고 '대영박물관'이 있습니다. 당신은 '옥스퍼드 거리'에서 많은 상점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옥스퍼드 거리로 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4. 다른 게임에서 복사/붙여넣기한 것 (Pastiche)
NPC: 수백 년 전, 마왕 A가 평화의 수호자 B의 힘을 빼앗습니다. '어쩌구랜드'의 온 대지가 무한한 어둠에 물들었습니다. 현명한 마법사 C는 그의 가장 훌륭한 제자 D에게 Z의 힘을 주었습니다. D는 Z의 힘을 가지고 위험한 '저쩌구왕국'의 심장부에서 A와 일전을 벌여 승리했습니다. '어쩌구랜드'를 비롯한 전 세계에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지금 '어쩌구왕국'에 다시금 어둠의 소용돌이가 불어닥치고 있습니다. 평화로운 '이러쿵마을'의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이제 여정을 떠나야 합니다.
5.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넣은 것 (Mistaken duty)
게임에 등장하는 "~을(를) 알리게 되어 영광입니다" 따위의 보도자료식 미사여구는 대개 이런 표현을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삽입된 문장이다.
1. 초장부터 떡밥을 풀지 마라 (DON’T WRITE THE LORE IN THE FIRST PLACE)
어떤 작가는 본인이 이런저런 설정을 늘어놓는 것을 좋아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쓴다. 다른 어떤 작가는 스핀오프 발매를 염두하기라도 한 듯 이야기를 쓴다. 혹시 자리에 앉아서 5개국과 5개국의 역사 연표를 만들고 있는가? 게임 만들 때 할 일이 그렇게도 없는가?
물론 그렇게 5개국의 역사 연표를 꼼꼼히 만들 수도 있지만, 플레이어 대다수가 게임의 세세한 설정을 지루해한다. 그리고 이런 방식은 많은 선례가 남아있다. 필자도 톨킨을 사랑하지만, 톨킨의 '가운데땅 세계관'이 생겨난 건 100여 년 전 일이다. 여러분이 꼭 톨킨의 모델을 따라 할 필요는 없다.
만약 당신의 게임 세계관에 총 5개국이 있고 그 세계관 속에서 플레이어가 외국 한 곳만 방문한다면, 국가별 외교 관계가 게임의 중요 요소가 아니라면 2개국에 대해서만 배경을 설정하면 된다. 당신에게 제3국이 필요하다면 나중에 그걸 만들면 된다. 당신이 플레이어에게 (아예 나오지도 않는) 가상 국가 사이의 전쟁에 관해 설명하지 않는다면, 가상 국가 자체를 아예 당신의 시나리오에서 빼버린다면 어떻게 게임의 일관성을 유지할까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물론 나중에 새로운 요소를 삽입하거나 게임 스토리를 바꿀 여지를 만들어두는 것은 좋다. 하지만 플레이어에게 머나먼 스핀오프 줄거리를 초장부터 풀 필요는 없다.
2. 정보는 최소한으로 (Keep the information to an absolute minimum)
다음은 <선리스 시>의 초반 설정이다.
"요즘에야 박쥐가 깊숙한 곳에 꼭꼭 숨어 살지만, 빅토리아시대 런던에는 야외에 박쥐가 들끓었다. 박쥐 떼는 모두에게 끔찍이도 불편했고 박쥐 떼로 해가 가려져 '해가 뜨지 않는 바다'가 열렸다. Unterzee에 온 것을 환영한다."
이는 전체 떡밥의 1/10에 불과하다. 설정 초안은 다섯 기생충으로부터 박쥐의 개체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것에 대한 설명부터 시작하지만, 이런 자세한 설정이 대부분의 플레이어에게 골칫거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빼버렸다. 그렇게 만든 초반 설정이 나타내는 지점은 간단하다.
(a) 플레이어는 빅토리아 시대 런던에 있다.
(b) 이상한 상황이다. 그게 뭐냐면?
(c) 박쥐 떼가 하도 많아서 해가 계속 안 뜬다.
(d)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다.
(e) Unterzee라는 것이 당신 눈앞에 있다.
완전 단호하고 뻔뻔한 설정으로 보이는가?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많은 플레이어가 게임 작가에게 요구하는 요소다. 나머지 정보는 플레이어가 게임 중 스스로 풀어나가면 되는 부분이다. 예전에 어느 인터뷰에서 진행자가 "좋은 게임 스토리는 어떻게 나오는가?"라고 물은 적 있다. 그때 나는 "요즘 게임 스토리 정말 좋다. 그런데 플레이어의 지능을 좀 더 존중해야 한다"라고 대답했다.
3. 플레이어가 궁금할 이유를 만들어라 (Give the player a reason to be curious)
※ 1회차 ※
NPC: 킄... 천년 동안 달의 여왕께서 '셀렌티아'를 지배하셨고, 그녀를 따르는 늑대인간은 셀렌티아 어디에나 있었으니 그들의 지킨 힘은 월광의 힘이라! 하지만 이제 여왕께서 갇힌 몸이 되사, 그녀를 구할 유일한 방법은….
[You Died]
플레이어: 그래서 스킬 창이 어디 있는데?
※ 2회차 ※
플레이어: 앗 따가워!
NPC: 킄…. 셀렌티아의 늑대인간 중 한 마리가 당신을 물어뜯었습니다.
플레이어: 오케이, 힐 좀.
NPC: 킄…. 천년 동안 달의 여왕께서 '셀렌티아'를 지배하셨고, 그녀를 따르는 늑대인간은 셀렌티아 어디에나 있었으니 그들의 지킨 힘은 월광의 힘이라! 하지만 이제 여왕께서 갇힌 몸이 되사, 그녀를 구할 유일한 방법은….
[You Died]
플레이어: 아, 힐 달라고.
※ 3회차 ※
플레이어: 앗 따가워!
NPC: 킄…. 셀렌티아의 늑대인간 중 한 마리가 당신을 물어뜯었습니다. 이는 [중략]
플레이어: 내 마나가 달아? 효과가 지속돼?
NPC: 크킄…. 이는 희생자를 미치게 만듭니다!
플레이어: 오케이, 힐 방법부터 알려줘. 너무 아프잖아. 지금은 쟤네를 상대할 레벨이 안 돼.
NPC: 킄…. 천년 동안 달의 여왕께서 '셀렌티아'를 지배하셨고, 그녀를 따르는 늑대인간은 셀렌티아 어디에나 있었으니 그들의 지킨 힘은 월광의 힘이라! 하지만 이제 여왕께서 갇힌 몸이 되사, 그녀를 구할 유일한 방법은….
[You Died]
플레이어: 힐 방법이 뭐냐고!
필자의 과장이 다소 들어갔지만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플레이어는 계속 리로드를 해야 하고, 결국엔 인터넷에 접속해 힐을 쓸 수 없다며 불평할 것이다. 그때 플레이어는 셀렌티아를 구하는 방법 따위는 궁금하지 않을 것이다. 힐을 알려줘야 하는 구간에서는 힐을 알려줘야 한다. 어둠의 군주나 달의 여왕 같은 건 다음 일이다.
4. 아주 잘 써라 (Write it extremely good)
게임의 긴급상황이든 일상 대화든, 당신의 표현이 70년 뒤에 널리 퍼질 법한 멋진 인용구가 될 것 같으면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길게 늘여서 써도 좋다. 그것이 아니라면, 톨킨을 베끼지 마라.
5. 관점을 넣어라 (Add a point of view)
필자의 최근작 <컬티스트 시뮬레이터>는 그냥 게임으로 즐길 법한 요소가 충분했지만, 거기에 오컬트 관점을 가미했다. 적당히 자신의 관점을 추가하면 게임의 색깔이 산다.
6. 플레이어가 물을 수 있게 하라 (Let the player ask questions about it)
당신이 현재 기획 중인 대화 파트가 한담(lawnmower dialogue)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플레이어가 직접 "다크버그의 북쪽에 대해 말해줘"라고 물어보게 하는 편이 단순 자막 처리보다 낫다. 게임 작가의 할 일이란 결국 플레이어가 그 게임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다. 또 플레이어가 스스로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것은 캐릭터 글쓰기와 내러티브에 대한 관점을 얻는 좋은 방법이다
7. 떡밥을 쪼개서 흩어놔라 (Break it up and scatter it through the game)
달의 여왕이 왜 갇혔는지, 늑대인간이 왜 나를 깨무는지 궁금하게 만들 생각이라면 떡밥을 쪼개서 흩어놔라. 플레이어가 질문하게 만들어도 좋고 화면 메시지를 띄우는 것도 좋다. 가장 좋은 방법은 게임 속 세계관에 대해 다양한 각도에서 여러 번 접근하게 만드는 것이다. 떡밥을 쪼개서 여러 군데 흩어놓는 것은 마치 어린아이에게 채소를 먹이는 일과 같다.
8. 램프에 갓을 씌워라 (Lampshade it)
우리가 무역 봉쇄에 대한 따분한 강의를 수강해야 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내가 당신 옆에 앉아서 게임 시나리오 작성법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게임 줄거리 쓰는 데 관심이 있는 당신은 교수의 강의보다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교수가 그 강의의 하이라이트를 설명할 때, 나는 "적어도 이 부분은 놓치면 안 된다"며 당신 옆구리를 콕 찌를 것(nudge)이다.
플레이어에게 정말 중요한 부분을 꼭 알려줘야 한다면 그 부분만이라도 집중할 수 있게 '콕' 찌르자. 이런 '램프쉐이딩'(Lampshading)은 최후의 수단이지만, 때로는 최후의 수단도 필요한 법이다.
9. 글을 쓰지 마라 (Don’t use words)
게임 작가는 종종 글 말고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충분히 있다는 사실을 까먹는다. 그 '다른 방법'의 최고의 예시가 아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