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인 18일 오후 2시. 서울 역삼동에 위치한 한 사무실. 이 곳은 무협게임 묵향 온라인을 제공하는 이야인터렉티브가 자리잡고 있다. 내가 이곳을 들린 이유는 2년만에 무대에 등장한 프로게이머 이은경씨를 만나기 위해서다.
'1세대 얼짱 프로게이머', 'PC방 사장', '바텐더', '대학생' 그리고 '온라인게임 운영자' 등 다양한 직업을 두루 경험한 그녀. 그녀를 이야기할 때는 게임이란 단어를 빼놓을 수가 없다. 그녀는 20대를 스타크래프트 열혈 게이머로 시작했고 지금은 온라인게임 운영자로 열심히 일하고 있다.
그리고 그녀의 나이는 이제 27. 그녀가 인터넷에서 주목받고 있다. 주위 동료들에 비해 스포트라이트를 덜 받았던 그녀. 하지만 네티즌들은 그녀의 매력에 조금씩 호감을 갖고 있는 듯 하다. 환히 웃는 모습이 매력적인 이은경은 아직까지 주위의 평가에 대해 낯설어하고 있다.
◆ "이렇게 후회스러운 적은 없었어요."
18일, 인터뷰 장소에서 본 이은경은 매우 초췌한 모습이었다.
인터뷰 전날인 목요일 저녁에 그녀는 이종미 선수와 MBC게임 여성리그 4강 진출전을 치뤘다. 이미 오래전부터 스타크래프트 대회를 경험했던 터라, 어느정도 승패에 의연할 줄로만 알았다. 내심 걱정은 했지만 인터뷰에도 별다른 영향이 없을 줄로 믿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어제 경기에 속상해서 친한 여성 프로게이머들과 함께 술을 마셨어요. 스타크래프트를 하고서 이렇게 후회스러운 적은 없었죠."
무엇이 그녀를 후회스럽게 했을까? 이야기를 들어보니 내용은 이러했다.
"이번 경기를 위해서 연습을 많이 했습니다. 회사에서도 경기에서 좋은 결과를 거두라고 많이 배려했지요. 그런데 정작 경기중에 긴장이 안되더라구요. 그리고 전략적인 부분도 부족했어요. 그저 최선을 다하자는 생각만 갖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녀의 스타크래프트 종족은 프로토스. 그리고 여성 게이머들의 상당수는 저그를 주종족으로 삼고 있다. 다행히도 그녀는 저그와의 경기에 유독 강한 면모를 보였다. 이와 달리, 테란전에는 매번 힘든 경기를 풀어왔었다.
"너무 안일하게 대처했던 것 같아요. 테란과 경기를 치룰 때는 지면 안된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하지만 저그전에서는 어느정도 승률이 나와 마음을 놓았던 게 그랬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도 후회스럽죠. 첫번째 경기는 허무하게 졌습니다. 두번째 경기는 지어야 할 건물을 안짓는 통에 나와야 할 유닛이 제때 생산되지 않았죠. 그 후회스러움이 컸죠."
그녀는 이번 대회를 통해 2년만에 복귀했다. 실은 그 2년전, 이윤열 선수와 함게 한 커플전으로 이벤트 경기였다. 실제 그녀가 체감하는 기간은 3∼4년 정도. 그녀가 스타크래프트를 시작했던 게 98년 일이니 벌써 8년전 일이다.
◆ 공대 여학생 그리고 스타크래프트와의 만남
그녀의 대학 입학년도는 98년. 소위 98학번이다. 그리고 여학생이 공주 아니면 남자로 취급받는다던 공대 출신이다. 이 환경속에서 이은경은 당연히 공주가 아닌 남자로 취급받았다고 주장했다.
갓 대학 입학한 그녀의 사진을 봤을 때, 이해가 잘 안되는 부분이었다. 사진속의 이미지는 곱상하고 귀여운 게 남자선배들로부터 인기를 독차지했을 법도 하다. 그녀는 공주가 됐을 법도 한데 왜 그랬을까? 아마도 편안함이 묻어나오는 그녀의 성격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녀는 친구들과 어울리길 좋아했다. 하지만 주위의 과선배 친구들이 스타크래프트 삼매경이 푸욱 빠져 있었다. 친구들과 놀려면 PC방에 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스타크래프트와의 만남이 잦아질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녀는 게임과도 안 친했다.
"예전 동생이 삼국지 게임을 하는 것을 구경했을 수준이었어요. 게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스타크래프트는 달랐어요. 사람들이 너무 많이 했구요. 그리고 솔직히 너무 재미있어 보였거든요."
다시 98년으로 돌아가보자.
"저도 한번 해볼래요." / "너는 안돼. 이 게임은 너무 어렵단 말이야."
그녀는 선배들에게 불쑥 말을 꺼냈다. 하지만 선배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이쯤 되면 당연 스토리가 나온다. 그래, 바로 '오기'다. 이은경에게도 '오기'라는 게 다가왔다.
그녀는 스타크래프트의 미션을 통해 공식을 익히기 보다는 실전경험을 택했다. 대전을 통해 경험을 쌓아가는 거다. 힘들긴 하지만 효과는 더욱 확실했다.
"초보 때 테란으로 게임을 즐겼어요. 처음 마린과 벙커를 생산하여 수비하는 법을 배웠죠. 그래서 그걸 열심히 생산해서 방어진지를 구축하면 배틀크루저가 어디선가 나타나 초토화시켰죠. 기운이 쭈욱 빠지더라구요. 그렇게 배웠어요."
바람도 일찍 피우라고 했던가? 친구들에 비해 늦게 게임을 시작한 그녀는 시험공부도 안했을 정도로 미친듯이 스타크래프트에 빠졌다. 집에서의 호통은 이어졌지만 아무도 그녀를 막을 수 없었다. 그녀와 스타크래프트와의 만남은 처음부터 불이 제대로 붙은 거였다.
"하루는 게임을 하다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왜 게임을 하는 거지? 결국 이러다가 사람을 잡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래서 스타크래프트와 떨어져 지내야 겠다고 생각했죠. 그게 아마도 브루드워가 나올 무렵이었습니다."
<스타크래프트 초기 입문할 당시의 이은경 선수의 사진>
◆ 견습 DJ 그리고 PC방 알바를 하다
다양하게 경험을 쌓고 싶었던 그녀. 스타크래프트라는 늪(?)에서 간신히 빠져 나온 그녀. 캠퍼스 생활에 매진했다. 하지만 그녀에겐 뜻하지 않았던 엉뚱한 제의가 들어왔다. 바로 DJ였다.
"아르바이트를 하고 싶었어요. 그랬더니 견습 DJ가 나왔다고 이걸 해보라고 하더군요. 물론 사람들이 많을 때가 아니라, 점심이나 초저녁 등 사람들이 없어 가게가 한산했을 때 주로 맡았죠."
그녀의 일은 분위기에 맞게 음악을 틀어주기. 견습 DJ로 3개월 가량 일했다. 그녀의 성실한 모습에 이끌린 사람들은 그녀에게 다른 일자리도 주선해줬다. 그 중 하나가 PC방 아르바이트였다.
그녀와 스타크래프트와의 인연은 PC방 아르바이트부터 시작됐다.
"IMF가 터진 후라 PC방 인기가 대단했어요. 당시 시간당 PC방 요금이 2천원 정도였을 껄요. 그정도로 비쌌어요. 그뒤에 PC방들이 많이 개설됐죠."
첫사랑을 잊지 못한다고 했던가? 그녀가 PC방 아르바이트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PC방에서 일하는 동안 실컷 게임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PC방 일하는 시간이 끝난 뒤에는 그 곳에서 무료로 게임을 즐길 수 있다고 하니, 자연스럽게 이 일에 눈독을 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일석이조가 아니던가. 그녀의 주업무는 이때 조금 변화를 갖게 된다. PC방 관리가 아닌, PC방 홍보 아르바이트였던 거다.
그녀가 PC방서 게임을 즐기자 주위사람들의 반응이 사뭇 달랐다. 여자가 스타크래프트를 한다는 건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많은 손님들이 그녀에게 대전을 요청했다. 이 과정에서 그녀가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로 거듭나는 기반을 마련했다. 다른 사람들과의 많은 대전을 쌓으면서 그녀의 인생에 스타크래프트는 한 자리를 잡게 됐다.
"이후 그 PC방을 찾는 손님들이 더욱 많아졌어요. 소문에는 매출이 많이 올랐다고 하더라구요. 매상에 도움을 줬다니 기쁜 일이지요."
그녀가 살며시 웃는다. 지난일의 회상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그녀의 상경기는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2편에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