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직에 계신 분들도 기자와 비슷한 견해를 가지고 있을까?" 취재를 하다 보면 자주 드는 생각입니다. 매일매일 이슈가 쏟아지는 세상에서, 잠시 차 한 잔, 술 한 잔 기울이며 생생한 목소리를 들어보고자 합니다. 멋진 게임을 만들기 위해 고민하는 분들을 만나, 뜨거운 현안들로 담소를 나눠보는 코너 '인디 한 잔'입니다.
사랑: 어떤 대상을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또는 그런 일.
분주하다: (형용사) 이리저리 바쁘고 수선스럽다.
'사랑' 다음에 올 단어 중 가장 어울리는 건 무엇이라 생각하시나요. 사람마다 조금 다르겠지만, 기자는 '분주함'을 꼽고 싶습니다. 들킬까 두려운 심장의 두근거림도, 잘 보이고 싶어 괜스레 옷 매무새를 다듬는 모습도,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도 모두 기분 좋은 불안정함이죠. 그런 의미에서 락스타들이 흔히 외치는 '러브 앤 피스'는 참 아이러니한 표현입니다. 사랑이란 감정 앞에 평정심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으니까요.
소세지가 될 운명인 돼지들의 몸엔 모두 절취선이 그려져 있습니다. 거대한 톱날이 돌아가는 공장. 어느 날, 울타리를 넘어간 돼지 한 마리와 도축업자의 몸싸움 사이에서 울타리가 무너지는 일이 발생하고 맙니다. 억압으로 유지되던 평화가 깨지자 모두의 심장은 두근거리기 시작합니다. 고양된 한 마리 암퇘지의 길안내를 따르며 주인공은 난생 처음 느끼는 동경과 설렘 사이 어딘가에 있는 감정을 가져봅니다.
<피그로맨스>의 이야기는 꽤 잔혹하게 시작됩니다. 주인공은 운명을 벗어나기 위해 달려왔지만 컨베이어 벨트 너머에서 도축업자의 손에 의해 조각나는 암퇘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공장 밖으로 나가는 긴 과정 속에 주인공은 암퇘지의 것으로 보이는(정확히는 그렇게 믿고 싶은) 조각들을 뱃속에 하나씩 소중하게 챙겨갑니다. 이걸 사랑이라 불러도 괜찮은 걸까요?
오랜 개발 기간 동안 개발사 외계인납치작전 또한 분주했습니다. 최용찬 대표가 프로젝트를 처음 구상한 게 2017년이었으니, 무려 7년의 세월 동안 다듬어진 이야기입니다. 그와 게임을 보며 다시 한번 느낍니다. 위태로움을 마다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사랑이구나. 공장 밖을 바라보면 공장 안의 톱날은 더 이상 두려워지지 않는구나. 익숙함에 머무르지 않는 최용찬 대표를 만나 다양한 이야기를 나눠봤습니다.
외계인(또는 그들의 기술력을 가진 사람)이라도 납치해서 같이 게임 만들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짓게 됐다는 사명, 외계인납치작전. 법인 설립은 4년 8개월 전이었지만, <피그로맨스>는 그보다도 더 전에 최용찬 대표의 상상력에서 시작됐습니다. 2017년 유니티 개발학원에서 그의 졸업 작품으로 도전해본 것이 <피그로맨스>의 첫 출발이었다고 하죠.
시간을 좀 더 거슬러 올라가 그의 이력을 살펴보면 더욱 흥미롭습니다. 20대 초반, '그래피티 아트'로 창작열을 불태웠던 그는, 이른 나이에 성공을 맛보게 됩니다. TV에도 많이 나오고, 금전적으로도 적잖은 수익을 벌어 들였다고 하죠. "이른 나이에 성공하는 건 좋은 일이 아니"라던 그였지만, 기자는 "성공은 멀리 내다볼 수 있게 담(담대함)을 키워주는 걸요"라고 화답했습니다. 그도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죠.
화려하고 멋진 순간이었지만, 그는 꿈을 품어보게 됩니다. 전공자가 아니었기에, 그림을 더 배워보고 싶었던 것이죠. 그렇게 시각디자인과에서 디자인을 배우고, 이후 전시, 그래픽, 애니메이션, 촬영, 패키지 등 디자인 업계에서 여러 경험을 쌓게 됐습니다. 외주 작업을 많이 하면서, 어느샌가 나만의 콘텐츠를 만들고 싶다는 열망이 생겨났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걸 선택하고, 가지고 싶어하는가. 디자인 업계에서 그가 느낀 바에 의하면, 오래 그린 그림, 공을 많이 들인 그림이 꼭 잘 팔리는 것도 아니었다고 합니다. "콘텐츠의 근본은 스토리"라는 결론에 다다랐고, 스토리를 먼저 쓰기 시작했습니다. 원래는 그림책의 형태로 만들어보려 했던 <피그로맨스>의 이야기는, 애니메이션에 인풋(상호작용)이 들어간, 오감을 자극할 수 있는 게임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피그로맨스>는 초기부터 3부작으로 기획됐고, 프리퀄 또는 스핀오프의 형태로 다음 작품을 이어갈 예정입니다. 꼭 게임뿐만 아니라 처음의 구상처럼 책으로 함께 전개될 수도 있고, 장르에 구애를 받지 않는 IP 프랜차이즈로 키워가는 것이 목표라고 하죠. 최용찬 대표의 그래피티, 디자인 이력이 아니더라도, 그가 납치(?)한 구성원들 중에도 그림책 작가도 있는 등, 앞으로도 하고 싶고 해야 할 일이 많은 외계인납치작전입니다.
그룹 '부활'의 김태원 씨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음악을 안 듣는다. 작곡가로서 영향을 받을까봐 그런다"
<피그로맨스>를 보며 기자의 머리에 가장 먼저 떠올랐던 작품은 봉준호 감독의 <옥자>와 아드만 스튜디오의 <치킨 런>이었습니다. 세부적인 표현은 전혀 닮지 않았지만, 소재의 유사성 때문에 떠올랐던 작품들이었죠. 참 재미있게도 최용찬 대표는 김태원 씨와 비슷한 답변을 했습니다.
"다른 분들도 두 작품의 이야기를 해주신 분들이 있었는데, <옥자>와 <치킨 런>을 정작 저는 안 봤거든요.(웃음) 영향을 받을 것 같은 작품을 일부러 안 봐요. 의식적으로 경계하면서 안 보고, 오히려 제 안에서 이야기를 심화시켜 나가는 과정을 깊게 파고들고 있어요."
"사람이 3년 정도 스토리를 심화해서 만들면, 순수하게 제 안에서 발전해 나와서 세상에 없던 게 나오더라고요. 나랑 똑같이 생각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나 하나 밖에 없잖아요. 그 생각을 심화시키면 흥미로운 게 되거든요. 사람들은 그런 걸 보고 듣는 걸 좋아하고, 그게 우리가 말하는 상품의 가치가 되는 게 아닌가 싶어요."
<피그로맨스>를 플레이해보시면, 내러티브는 게임 전반에 걸쳐 진행되는 이 세계의 설득에 가깝다면, 근간에 있는 각종 퍼즐과 사운드가 매우 탄탄하게 플레이어를 이끌어준다는 걸 눈치채실 수 있을 겁니다. 최용찬 대표는 "기믹을 위한 게임을 만들고 싶진 않았어요, 돼지의 상황을 보여주기 위해 정말 많은 퍼즐을 구상했고, 결과적으로 담아내지 않은 퍼즐도 많았죠"라고 말했습니다.
주인공 '미틀렛'은 짧은 다리로 쫑쫑 달리고 점프하기도 하고, 서 있는 자리에 달라붙는 '스티키' 모드를 활용해 난관을 넘어서기도 합니다. 조력자로 등장하는 까마귀도 빠르게 멀리 날아가 시야를 확보해주거나, 고기 덩어리를 물어와 떨어트리는 것으로 '미틀렛'이 가지 못하는 공간에 있는 버튼을 누르기도 하죠. 불구덩이부터, 산성 용액이 있는 공간, 냉동고, 거대한 톱날과 분쇄기 등 많은 위기를 헤쳐나갑니다.
퍼즐 진행에서 눈에 띄는 점은 공간을 굉장히 넓게 사용하는 편이라는 것입니다. 화면 안에 한 눈에 들어오는 퍼즐 기믹도 있긴 하지만, 꽤 많은 퍼즐이 뛰어다니고, 날아다니며 공간을 넓은 시야로 파악해야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죠. 이런 특징은 불편함으로 다가오기 보다는, 미틀렛과 까마귀의 이동이 느리지 않기 때문에 시원함과 촘촘함의 완급 조절로 다가오게 됩니다.
사운드 또한 공들여 만들어졌습니다. 캐릭터나 상황에 맞는 테마곡이 있는 것은 물론이고, 같은 곡도 도입, 루프, 결말로 분할 구성해 퍼즐을 빠르고 느리게 푸는 유저들의 템포에 맞출 수 있게 만들어졌습니다. 최용찬 대표는 "심플 이즈 더 베스트"라며, 직관성을 많이 신경썼다고 말했습니다. 올라가는 구간에선 도레미였다면, 내려가는 구간에선 미레도, 회전하는 구간에선 도레미도레미도레미와 같은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음계를 사용했다고 하죠.
게임의 후반부까지 플레이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음감 테스트'를 하는 방식의 퍼즐도 등장합니다. 음감이 안 좋은 사람들은 조금 고생할 수도 있는 퍼즐이긴 하지만, 이내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사람이 당연하다 생각하는 것들을 돼지도 똑같이 느낄까. 공장의 낯선 사물들을 '보고' 인지하고 반응하는 것과 '냄새를 맡거나 소리를 듣고' 따라가는 것 중 돼지에게 더 직관적인 방식은 어느 쪽일까.
출시 전부터 각종 게임쇼에서 여러 차례 수상도 하고, 이렇게 독창성과 재미로 호평을 받고 있는 <피그로맨스>지만, 아직 객관적인 스팀 리뷰 수가 많진 않은 상황입니다. 최용찬 대표는 앞서 밝힌 포부처럼, 세계관을 확장하고 유니버스를 만드는 꿈에 대해 설명하며, 시리즈 전개의 중요성을 역설했습니다.
"출시 직후 일정 노출이 보장된다는 측면에선 스팀은 공정한 플랫폼이죠. 자본력을 가진 회사나 없는 회사나 거의 같은 환경이니까, 기회의 땅이기도 해요. 좋은 게임들의 지표를 많이 봤어요. 모바일이랑 다르게 진짜 천천히 올라가더라고요. <리틀 나이트메어> 같은 경우 천천히 지표가 오르다가, 2편이 나오고 1편도 함께 뛰어올랐어요. 이게 시리즈의 장점이고, 저희가 유니버스를 목표로 하는 이유기도 하거든요."
"스팀에서 쉽게 알려지기 힘든 게 너무나도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아직 유저들과의 신뢰가 없는 상태에서 나온 신생 스튜디오의 첫 작품이니까요. 힘든 시간은 뭘 하든 찾아오지만, 그 과정에서 회사도 단단해지니까요. 오래 개발해 온 만큼 노하우도 쌓였고요."
<피그로맨스>는 이제 해외 어워즈 출품과 닌텐도 스위치, 엑스박스 포팅을 앞두고 있습니다. 포팅 이후로는 해외 마케팅 또한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 계획이라고 하죠. 장기적으론 외계인납치작전이 '한국의 디즈니' 같은 콘텐츠 창작 공간이 되길 원한다고 합니다. 최용찬 대표의 히스토리를 들으면서, 어떤 형태로든 목표에 가까워질 수 있으리라 느꼈습니다. 하나의 틀에 머무르지 않던 지난 시간의 분주한 노력이야 말로 자신의 창작물에 대한 열정이고 사랑이었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