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게임의 이름은 <드래곤 라자>,하지만 우리가 아는 《드래곤 라자》가 아니다.
위 동영상의 모바일 MMORPG 이름은 <드래곤 라자>(Dragon Raja, 龙族幻想)입니다. 중국의 주롱 엔터테인먼트(Zulong Entertainment)가 개발하고 텐센트가 유통하는 게임으로 에픽게임즈의 '언리얼엔진 4'로 제작됐습니다. 게임은 현재 사전 예약 단계로 무려 450만 명이 사전 예약을 진행했다고 하네요. 게임은 2019년 상반기에 정식 서비스를 시작할 계획입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드래곤 라자》는 이영도 작가가 PC통신 게시판에 집필하고 1998년 출간된 걸작 판타지 소설입니다. 이런 《드래곤 라자》가 중국에서 모바일 게임으로 개발된다고 하니 여러 면에서 흥미가 들어 영상을 살펴봤는데요. 어딘가 좀 이상합니다.
중국판 모바일 게임 <드래곤 라자>의 등장인물은 스마트폰을 사용하면서 오토바이를 타고, '일본'이나 '베이징' 같은 실제 지명을 언급합니다. 정통 판타지에 가까운 이영도 작가의 《드래곤 라자》와의 괴리감이 '설정 붕괴'로 느껴질 정도로 큽니다. 오토바이를 타면서 EMP를 쏘는 후치 네드발(《드래곤 라자》의 주인공)이라니 말이 됩니까?
합리적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전기세계>(미르의 전설 2), <뮤 X>(뮤), <아라드의 분노>(던전앤파이터) 등 지금까지 중국 게임사는 수많은 한국 게임을 베낀 전례가 있습니다. 혹시 중국판 <드래곤 라자> 또한 원작을 불법으로 도용하거나 베낀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습니다.
취재 결과 의외의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중국산 모바일 MMORPG <드래곤 라자>는 우리가 아는 이영도 작가의 소설이 아닌 2010년 중국에서 출판된 소설 '드래곤 라자'를 원작으로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중국에는 '드래곤 라자'라는 이름의 소설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중국판 '드래곤 라자'는 평범한 고등학생이 신비한 소명을 수행하기 위해 슬레이어가 된다는 6부작 이세계물입니다. 판타지 소설가 쟝난(江南, Jiang Nan)이 집필했으며 중국에서는 200만 부 이상 팔린 인기 소설입니다. 작가는 이 소설 시리즈로 백만장자의 반열에 올라섰는데요. 소설 《삼체》로 2015년 휴고상을 거머쥔 중국의 유명 SF 소설가 류츠신(刘慈欣, Liu Ci xin)은 이 작품을 읽고 "오래된 마력과 선진 과학기술이 어우러진 참신한 작품"이라고 극찬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이름만 같았을 뿐 완전히 별개의 작품을 착각했다기엔 석연찮은 점이 있습니다. 왜냐면 '인간과 드래곤 사이의 매개자'를 뜻하는 조어 '드래곤 라자'(Dragon Raja)는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용어가 아니라 이영도 작가가 처음으로 만든 말이기 때문입니다.
또 이영도 작가가 쓴 《드래곤 라자》의 중문판 제목은 용족(龙族)인데, 쟝난 작가의 '드래곤 라자'도 용족(龙族)을 한자 제목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라자'(Raja, राजा)도 왕, 군주를 의미하는 산크리스트어로 한국과 중국에서 자주 쓰이는 표현이 아닙니다.
중국판 '드래곤 라자'가 우연에 우연이 겹쳐서 그저 제목만 같은 완전히 다른 소설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설사 이영도 작가의 작품을 도용한 소설이라고 해도, 이를 무작정 비난하기도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이영도 작가의 《드래곤 라자》도 <던전 앤 드래곤> 시리즈에서 많은 개념을 빌려왔으니까요. 물론 지금 나오는 《드래곤 라자》는 <던전 앤 드래곤>의 오픈 게임 라이센스가 적용된 상태입니다.
이영도 작가의 오리지널이라고 할 수 있는 '드래곤 라자'와 똑같은 제목의 소설이 중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고, 그 결과 대형 모바일 RPG로 개발 중이다. 여러모로 묘한 이 상황에 대해 《드래곤 라자》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는 출판사 황금가지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요?
디스이즈게임의 문의에 황금가지 편집부는 "기본적으로 소설의 제목에 대한 권리는 표절이 인정되지 않는다"라면서 중국에서 《드래곤 라자》와 동일한 제목을 가진 소설이 출판된 것 자체로는 문제 제기가 어렵다는 입장을 전했습니다. 대신 편집부는 상표권과 관련해서 중국판 '드래곤 라자'가 원작자의 권리를 침해할 가능성에 대해 현재 법무·특허 법인과 대책을 논의하는 중이라고 밝혔습니다.
편집부의 한 관계자는 디스이즈게임과의 통화에서 "이영도 작가의 《드래곤 라자》는 홍콩과 대만을 비롯한 중국 시장에 잘 알려졌던 IP"라면서 "여러모로 의심이 가는 상황"이라고 말했습니다.
대만에 출판됐던 이영도 작가의 '드래곤 라자' (출처: 예스아시아)
중국에서 개발 중인 모바일 RPG <드래곤 라자>는 중국에서 현재 사전 예약자 수 450만 명을 돌파할 정도로 현지에서 많은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아마 게임이 잘 만들어진다면 상업적으로도 큰 성과를 거둘 것이고, 추후에 한국에 수입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과연 중국산 <드래곤 라자>는 어떤 성과를 거두게 될까요? 일단은 앞으로 조금 더 지켜봐야겠습니다.
기왕 《드래곤 라자》의 이야기를 꺼냈으니 마지막으로 이영도 작가에 대한 팬심을 가득 담아 《드래곤 라자》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볼까 합니다.
한국 소설 《드래곤 라자》는 이영도 작가가 1998년 여름부터 PC통신 하이텔에 연재하던 판타지 소설로 한국 판타지 소설의 '본좌' 격이 되는 작품입니다. 소설은 종이책으로 출간돼 100만 부가 넘는 판매량을 기록했고 일본과 대만 등 해외에도 수출됐습니다. 《드래곤 라자》는 한국 현대 문학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작품으로 그 문장력과 통찰력이 널리 인정받아 문학, 사회 교과서에도 수차례 실렸습니다.
《드래곤 라자》는 2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만화, 라디오드라마, 팬픽, 그리고 게임으로 재탄생했습니다. 그 중 게임으로는 여러 번 나왔습니다. 가장 먼저 나온 PC MMORPG <드래곤 라자 온라인>은 국내에서 2001년부터 2011년까지 서비스됐다가 2012년부터 지금까지 유럽에서 서비스 중입니다. <드래곤 라자 온라인>은 홍콩에서 제법 인기 있는 게임으로 2019년 현재까지도 단독 서버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드래곤 라자》 게임은 모바일 플랫폼으로도 여러 차례 나왔거나 출시를 준비 중입니다. 그중 대구의 비전브로스가 개발하고 중국의 로코조이(현 에이프로젠H&G)가 유통한 <드래곤 라자M>(2016)은 2017년 10월에 국내 서비스를 중단됐지만, 초기에는 국내 구글 스토어 매출 9위를 기록한 바 있습니다.
작년 12월에는 중국 게임사 스카이문스테크놀로지가 개발한 <드래곤 라자 2>가 국내 CBT를 진행했습니다. 게임은《드래곤 라자》의 후속작 《퓨처 워커》 이후 시점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개발사 추산 사전 예약자 15만 명을 모았습니다. <드래곤 라자 2>는 원스토어 선정 '12월의 우수 베타 게임'으로 뽑혔지만, OBT가 끝난 지 2달이 지난 현재 <드래곤 라자 2> 관련 소식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