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자의 D&D 사건파일] 컴퓨터 RPG의 선조이자 무궁무진한 자유도를 가진 놀이 TRPG. 한국에는 TRPG 중 하나인 <D&D>가 컴퓨터 게임 덕에 잘 알려져 있죠. TRPG가 한국에 정식으로 소개된 지 약 25년이 지났습니다. 적지 않은 이들이 TRPG라는 이름을 들어봤고 여기에 관심을 가지지만, 독특한 방식 때문인지 TRPG로 입문하기까진 여전히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디스이즈게임은 TRPG가 어떤 놀이인지, 플레이하면 실제로 어떤 경험을 할 수 있는지, 초심자가 어떤 실수를 많이 하는지 알아보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2016년부터 TRPG, <D&D>를 알리기 위해 꾸준히 행사를 연 '람자'의 이야기를 들어 보시죠.
[람자는 누구?] <D&D> 게임에 푹빠진 쌍둥이 아빠입니다. 영상콘텐츠 제작을 주업으로 하고 있습니다. 주말에는 카페 ‘깔깔고블린’에서 많은 분들과 게임을 즐기고 있으니 곧 뵈어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즐기고 있는 (테이블탑) 롤플레잉 게임(이하 TRPG/RPG)인 <던전즈앤드래곤즈>(이하 D&D). 지난 연재 회차에서 저는 <D&D>를 ‘전문화된 규칙이 있는 소꿉놀이’라고 간략하게 설명해 보았습니다.
아이들의 소꿉놀이/역할놀이에서도 각자가 어떤 인물을 맡아 연기할 것인지에 대한 설명이 먼저 이루어집니다. <D&D> 게임이 이루어질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항상 처음은 자신이 연기하고 조종할 ‘캐릭터’를 묘사하고 소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상상의 나래를 펼쳐 캐릭터를 창조하는 일은 D&D 게임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임에 틀림없다. (삽화 : 김기빈)
<D&D>는 판타지 세계 속의 몇 가지 종족(Race)과 직업(Class)에 대한 설정을 미리 만들어 제공합니다. 캐릭터 창작 지침을 따라 이 설정들을 선택해 나가면 ‘엘프-전사’, ‘난쟁이-성직자’ 등의 조합으로 게임 속 세계에 적합한 인물의 외형을 그릴 수 있습니다. 너무나 익숙한 조합도 존재합니다. 소설/영화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레골라스는 ‘엘프-궁수’로, 아라곤은 ‘인간-전사’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미리 만들어진 설정만 고른다면 모두 비슷한 인물만 <D&D> 세계에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다행히도 <D&D>를 비롯한 대부분의 TRPG에서는 몇 가지 핵심적인 설정을 제외하고는, 캐릭터의 특성에 대해서 대부분 빈 칸으로 남겨 두곤 합니다. 이 때문에 <D&D> 게임을 매일 즐기더라도 서로 다른 기발한 설정을 가진 영웅들 간의 상호작용으로 매일 다른 느낌으로 즐길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자신이 창조한 캐릭터에 대한 과도한(?) 애정 때문에, 혹은 심각한(?) 무관심 때문에 게임의 첫 시작인 ‘캐릭터 소개’부터 난항을 겪게 되는 일들이 발생합니다. 다음은 제 게임 진행 면의 미숙함이나 임기응변이 부족해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했던 일부 사례입니다.
Case #1 끝까지 들어줘! 유형
람자: 여러분들은 ‘플란’ 이라는 마을의 작은 주점에 와 있다. 각자 캐릭터 소개를 해달라.
플레이어1: 내 캐릭터 이름은 알랑드롱 폰 가르데시아 키라 3세다. 일명 ‘어둠 속에서 은밀하게 나타나는 늑대’ 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이름의 의미는, 가르데시아 공화국이 이 세계 어딘가에 있는데, 그곳의 7형제 중 막내로 태어나게 되었다. … (가르데시아 공화국의 역사 설명) … 그래서 그 가르데시아 왕이 벌인 대협곡의 전투에서 만난 동방의 키라 라는 이름의 동료가 죽고 … (이름에 키라를 붙인 이유 설명) … 그렇게 15세가 되던 해에 아주 흥미로운 사건을 겪게 된다.
람자: 가르데시아 공화국은 공식 설정에는 없는 내용이지만 상세하게 설명해주어 고맙다. 그래서 모험을 떠나게 된 것인가. 잘 들었다.
플레이어1: ??? 아직 소개가 안 끝났다. 이 흥미로운 사건을 들어야만 내 캐릭터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하루는 알랑드롱이 레이니우드 숲에 들어갔을 때 그 일이 일어났다. 레이니우드 숲은 우드엘프들의 서식지로 … (새로운 설정 설명) …
람자: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으니 모험을 떠나게 된 설명은 단톡방에 첨부한 파일을 모두가 확인하는 것으로 대신하겠다.
플레이어1: ????? 시간이 많이 소요되어도 캐릭터 설정을 꼼꼼하게 공유해야 마스터가 참고해서 내 캐릭터의 얘기를 진행할 것 아니냐?
람자: 이번 세션은 한 번만 진행되는 단편 게임이라서 모든 내용을 반영해 진행하기는 어렵다. 대신에 <D&D> 게임에서 제공되는 ‘특징’, ‘이상’, ‘유대’, ‘결점’으로 나누어 한 두 문장으로 요약해 얘기해 달라.
플레이어1: 그걸 얘기하기 위해서는 알랑드롱이 가지고 있는 이 토끼발 펜던트에 대해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가르데시아 왕에게는 7형제 외에 숨겨둔 공주가 있었다. 전쟁국가였던 까닭에 공주도 예외 없이 전투 훈련을 받아야 했는데 … (공주와 알랑드롱의 우연한 만남과 슬픈 비극 설명) …
람자: 아주 잘 알겠다.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다. 다른 분들은 종족과 직업, 이름만 얘기하고 바로 게임 시작하도록 하겠다.
플레이어2, 3, 4: 개 구리다.
플레이어1: (뿌듯)
‘캐릭터에 대한 소개’는 다양한 방식으로 구현될 수 있습니다. 글 솜씨가 좋은 분들은 자신의 캐릭터 설정을 가지고 소설 한 편을 써내려 가는 분도 있습니다. 혹은 삽화나 만화를 곁들여 표현하는 분도 있고 상세한 자체 세계관을 곁들여 캐릭터를 굉장히 독특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작업들의 목적이 단순히 ‘자신의 캐릭터에게만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하려는 의도’라면 굉장히 불편한 사족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다른 사람들이 준비해온 영웅들과 협력해 모험을 떠나기 위해서 ‘내 캐릭터는 이런 장점과 이런 단점이 있고 여러분들에게 이런 점에서 도움이 될 것이다’ 와 같은 자기 PR 류의 내용으로 소개한다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 목적이라면 적절한 삽화나 별도 첨부된 캐릭터 설정은 동료들을 위한 훌륭한 애드-온(Add-on) 읽을거리가 될 것입니다.
물론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모여 즐기는 장편 게임이나 정기 게임이라면 몇 시간 분량의 캐릭터 설정 소개가 반드시 필요한 경우도 있습니다.
Case #2 시크한 무념무상 유형
람자: 미스터 볼로라는 사람이 와서 자신을 소개하고 여러분들에게도 소개를 부탁한다.
플레이어2: 나는 마법사고 이름은 … 음 … (주변을 살피다가) … ‘연필’이다.
람자: 이상한 이름이다. 캐릭터의 성격은 어떠한가?
플레이어2: 평범한 성격이다.
람자: 외모나 외형상 특징은 무엇이 있나?
플레이어2: 그냥 평범한 외모고, 중립적인 성격이다.
람자: 모험을 떠난 목적이 따로 있나? 미스터 볼로는 박학다식해서 정보를 줄 수 있을 것 같다.
플레이어2: 그냥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흘러왔다. 빨리 게임을 진행하자.
람자: 궁금증이 많은 미스터 볼로가 당신들의 관계를 물어본다. 어떤 사이인가?
플레이어2: 그냥 길에서 우연히 만난 사이인 걸로 하자.
람자: … 미스터 볼로가 여러분들에게 특별한 미션이라며 말을 꺼내려 한다.
플레이어2: 미션을 받아들이겠다. 자 어디로 가면 되나?
람자: 아직 내용도 말하지 않았다.
플레이어2: 인트로는 ‘SKIP’ 하면 안되나?
람자: ??? 이건 SKIP할 수 있는 인트로가 아니라 게임의 한가운데다.
플레이어2: 개 구리다.
<D&D> 게임은 여러가지 형식의 ‘시나리오’ 혹은 ‘시놉시스’ 위에서 펼쳐집니다. 하지만 이는 PC 게임처럼 모든 내용이 미리 정해진 것이라기 보다는 ‘그 때’, ‘그 장소’에 모인 캐릭터들의 특징들을 고려해 유연하게 변화할 수 있는 흐름을 문서화 시킨 것입니다. 따라서 아무런 특징이나 정보가 없는 캐릭터로는 흥미로운 게임을 진행시키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무례한 사람과 친절한 사람이 만나면 어떻게 될까, 고리대금업자와 금융감독관이 만나면 어떻게 될까, 무력 신봉자와 평화주의자가 만나면 어떻게 될까 등에 대한 끊임 없는 궁금증은, <D&D> 게임 속에서 다채로운 애드립과 리액션, 임기응변으로 피어나 시들지 않는 재미를 만들어냅니다. <D&D>의 이런 재미를 위해서 최소한 한마디 이상으로 자신의 캐릭터를 표현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하는 것이 플레이어들에게 요구됩니다.
때로는 준비 없이 흥미로운 캐릭터 설정을 즉석에서 그럴 듯하게 쏟아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주사위를 굴려서 무작위 성격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변칙적인 방식의 캐릭터 제작 방식입니다.
Case #3 이계물 라노벨 주인공 유형
람자: 너무 길거나 너무 짧지 않도록 캐릭터 소개를 부탁한다.
플레이어3: 한 줄로 간략하게 준비했다. 내 캐릭터의 이름은 네오다. 다른 차원에서 온 듯하며 이 시대의 복식이 아닌 것 같은 옷을 입고 있다.
람자: 흥미로운 캐릭터 같다. 다른 특이사항은 없나?
플레이어3: 아 ‘전자총’이라는 물건을 가지고 있다. 그 세계에서는 흔한 호신용 물건이다.
람자: ??? 캠페인 설정상 ‘전자총’을 사용하기에는 어려울 것 같다.
플레이어3: 내 캐릭터 설정이라서 어쩔 수 없다. 그리고 머리띠를 하나 하고 있는데,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유물이다. 1분동안 집중하면 초능력으로 상대방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아티팩트이다.
람자: ?????? 흥미로운 설정이긴 하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사용하려는 설정과 규칙과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아 실질적으로 지원이 어려울 수 있다.
플레이어3: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 기능은 모두 상실한 것으로 하겠다. 내 캐릭터 네오는 선글라스를 벗고 공방에 무기를 주문한다. 그 시대의 지식을 이용해서 무기와 갑옷 제작을 돕는다.
람자: 그래도 어쩔 수 없이 규칙서에 나온 무기의 기능과 동일하다.
플레이어3: 정말 꽉 막힌 마스터군… 그렇다면 이 설정은 반영이 가능한가? 강화인간으로 개조를 당한 이력이 있는 터라 점프를 하게 되면 최대 20미터 높이로 점프한다. 몸의 골격이 전부 기계장치로 이루어져 있다.
람자: 자작 캐릭터라고 해도 일정한 규칙의 범위에 있어야 할 것 같다.
플레이어3: 개 구리다.
<D&D> 게임에서는 종족, 직업, 배경, 레벨 별 특수 능력들을 조합해 <D&D> 세계관 속에서 존재할 법한 캐릭터를 만드는 도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간혹 이런 미리 만들어진 캐릭터 제작 도구가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은지, 홈브루(Homebrew)라고 불리는 자작 규칙을 만들어 배포하거나 판매하는 곳이 굉장히 많습니다.
하지만 홈브루 방식으로라도 자기 마음대로 규칙을 만들고 적용하는 것은 굉장히 조심스러운 일입니다. 던전마스터가 준비한 게임의 균형을 무너뜨릴 수도 있고 다른 플레이어들이 준비한 캐릭터와의 조화가 잘 맞지 않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전문적인 홈브루 제작자들은 자작 규칙을 배포하기 전, 수많은 플레이테스트를 거쳐 자신의 아이디어가 거대한 전체 게임 세계관에 균형 있는 기여를 할 수 있도록 노력합니다.
만약 <D&D> 플레이가 예정되어 있다면, 반드시 사전에 마스터와 플레이어들이 모두 모인 곳에서 어떤 세부 규칙을 사용할 것인지, 홈브루나 비공식 설정들이 허용될 수 있는 지 확인해야 합니다.
‘던전마스터길드’나 ‘Dndbeyond’같은 공식 사이트 외 다양한 팬페이지에서 각양각색의 홈브루를 배포/판매 중이다. 던전마스터와 합의만 된다면 <스트리트 파이터>부터 <포켓 몬스터>까지 상상하는 모든 것을 D&D로 즐길 수 있다! (출처 : D&D 팬페이지 //mikemyler.com)
<D&D>는 소통을 통한 조화를 만들어내야 하는 게임입니다. 플레이어들은 <D&D> 규칙으로 만들어진 ‘캐릭터’를 통해서 서로 소통하게 됩니다. 적절하지 못한 캐릭터는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소통을 방해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D&D> 게임적으로도 즐겁지 못하게 될 확률이 커집니다.
조화로운 <D&D> 게임에서는 명장면들이 이어집니다. 엘프 전사가 적을 막는 동안 내 드워프 클레릭은 뒤에서 마법적 지원을 하고, 평생 군인으로 살아왔던 인간 성기사가 재간둥이 호빗 도둑을 만나 여행하며 새로운 성격을 갖게 되거나, 은둔자 용족 소서러가 ‘인싸’ 노움 마법사를 만나서 사회화 되는 과정이 게임 속에서 흥미롭게 그려집니다.
이런 <D&D> 게임 속 명장면들은 적절한 캐릭터를 모든 플레이어가 각자 테이블로 가지고 오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필자가 운영 중인 <D&D> 공식 플레이 장소 ‘카페 깔깔 고블린’의 초심자 이벤트 진행 중인 모습. 주점에 소동이 벌어진 뒤에 새로운 모험자들은 각자 자신의 캐릭터 성격에 맞는 리액션을 선언해야 했다.
미리 만들어진 <D&D> 캐릭터 시트로 게임을 즐겨보고, 그 뒤에 자신의 설정이 덧붙은 캐릭터를 직접 만들어보세요. 그리고 그런 과정에 익숙해져 많은 명장면을 만들었다면 홈브루 캐릭터에도 도전해 보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아래에 제가 만든 <D&D> 캐릭터 ‘람자’를 첨부합니다. 저처럼 오늘 새로운 <D&D> 캐릭터를 만드셔서 각종 커뮤니티 및 공식 매장에서 D&D 플레이를 찾아보세요.
유용한 링크
//dnd.wizards.com : <D&D> 공식 사이트. 새로운 제품 정보와 미리 만들어진 캐릭터 시트 외에 수많은 공식 배포 자료를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
//dnd.wizards.com/content/dragon : 유일한 공식 <D&D> 웹진. 다양한 플랫폼으로 <D&D>에 관한 칼럼들과 수려한 이미지 정보를 만날 수 있다.
//www.dndbeyond.com : <D&D> 5판의 모든 룰북과 모험서적을 디지털 버전으로 구매 가능하다. 캐릭터 시트를 아주 손쉽게 제작할 수 있는 툴을 제공하고 있다.
//www.dmsguild.com : <D&D>의 공식 모험 시나리오와 각종 홈브루를 구입할 수 있는 스토어.
//dndadventurersleague.org : <D&D>의 조직화 플레이인 ‘모험자 리그’에 대한 다양한 정보가 담겨 있다.
람자의 D&D 사건파일 목록
람자의 D&D 사건파일 (1) “TRPG? D&D가 뭐죠?”
람자의 D&D 사건파일 (2) “제 캐릭터가 LA에 있을 때 얘긴데요…” ☜
람자의 D&D 사건파일 (3) “저는 00 던전마스터랑만 게임하고 싶어요.” (연재 예정)
람자의 D&D 사건파일 (4) “저 플레이어 문제 있어요.”
람자의 D&D 사건파일 (5) “이런게 D&D의 참 맛 아니겠습니까?”
람자의 D&D 사건파일 (6) “헿 신선한 뉴비가 왔군!”
람자의 D&D 사건파일 (7) “저도 던전마스터가 하고 싶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