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만들었지만 안 팔린 게임”은 없다고 한다.
잘 팔리면 잘 팔리는 이유가 있고, 안 팔리면 안 팔리는 이유가 분명 있다는 것이다. 일리 있는 말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오랜 기간 게임을 즐긴 사람이라면 자신만의 ‘비운의 타이틀’ 하나 정도는 있을 것이다. 자신이 보기엔 잘 만들었고, 게임성도 독특한데 완성도에 비해 관심이 적은 게임 말이다. 리마스터, 하다못해 그 흔한 ‘포팅’ 소식마저 없다면 더욱 슬프다.
이제는 역사책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게임기 'PSP'(플레이스테이션 포터블)에도 그런 게임이 있다. SCEJ의 지원을 받아 일본의 소규모 개발사 ‘제너 워크스’에서 2009년 출시한 <총성과 다이아몬드>가 그 주인공이다. PSP 명작 타이틀을 논할 때 꼭 한 번은 나오는 게임이다.
<총성과 다이아몬드>는 어드벤처 장르면서 실시간으로 진행되는 ‘교섭’과 ‘협상’을 게임의 주요 테마로 삼았다. 그 위에 탱고 스타일의 OST를 위에 얹어 담백하면서도 독특한 분위기를 뽐냈다. 실사풍으로 만들어진 그래픽과 물 흐르듯이 이어지는 대사를 보면 ‘일본 형사 드라마’를 보는 느낌도 난다.
무엇보다도 딱딱한 직역 없는 말끔한 한글화가 일품인 게임이었다. “칸자키는 광견이야”나 “밤에는 비가 온다”와 같은 대사는 게임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 "밤에는 비가 온다"의 경우에는 패러디로 유명한 국내 게임 <가디언 테일즈>에 등장하기도 했다.
<총성과 다이아몬드>의 인트로는 퍽 흥미롭다. 편의점에서 ‘사와다’라는 한 형사가 ‘마카로프 권총’을 들고 편의점 직원을 협박하고 있다. 사와다는 직원들에게 차량털이범 의혹이 있으니 자백하라고 강요한다.
같이 현장에 있던 주인공 ‘오니즈카’는 사와다의 지원 요청을 무시하고 쿨하게 현장을 떠난다. 수상하게 여긴 편의점 직원이 사와다에게 형사증을 보여달라 하니 장난감 형사증을 내민다. 인질극에 지친 직원이 정말 형사가 맞냐고 지적하자 갑자기 사와다는 날뛰며 총을 발사하고, 오니즈카는 현장으로 되돌아와 ‘교섭’을 시작한다. 여기서 게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PSP를 분실해서 스크린샷은 유튜브 캡처로 대체했다.
(출처: 초보 게이머와 고전게임의 추억 유튜브)
<총성과 다이아몬드>는 자신들의 장르를 ‘교섭 어드벤처’라고 정리했다. 주인공은 프리랜서 교섭인이다. 교섭인이란 말 그대로 상대방과의 협상을 담당하는 직업으로, 작중에서는 주로 인질극을 벌이는 범인을 설득하는 일을 맡게 된다.
‘어드벤처’ 게임을 표방한 만큼 <총성과 다이아몬드>는 복잡하게 흐르는 범죄를 수사해 나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플레이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플레이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범인과의 교섭 전 프로파일링에서 ‘미심쩍은 부분’을 제시하는 것과 교섭에서 어떤 말을 할지 선택하는 것 정도다.
그 대신 조금 특이한 점이 있다. 스토리 파트는 실사풍으로 제작된 정지 컷신 속에서 작중 인물들의 대화를 관람하는 단편적인 방식이지만, 일러스트를 띄우고 아래에 별도의 대사칸을 사용하는 흔한 방식을 사용하지 않는다. 정지 컷신의 캐릭터 바로 밑에 대사를 출력시킨다.
대사에는 음성조차 없지만 실제 인물들이 말하는 속도와 가깝게 대사가 흘러가며, 급박한 상황에서는 대사 전개 속도와 화면 전환도 빨라지기에 마치 드라마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동시에 대사가 진행되는 경우도 있다. 덕분에 별도의 음성이 없음에도 마치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한 독특한 느낌으로 스토리 파트를 관람할 수 있다.
(출처: 초보 게이머와 고전게임의 추억 유튜브)
실사풍으로 만들어진 그래픽에서 눈치챌 수 있겠지만 전체적인 콘셉트도 ‘현실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불가능해 보이는 미스테리한 살인 사건, 기상천외한 밀실 트릭, 오컬트의 개입 같은 요소는 거의 없다. 작중 일본이 총기의 불법 밀수로 인해 폭력 범죄가 (현실보다) 늘어났다는 전제가 있긴 하지만, 현실성을 중시한 추리 소설처럼 최대한 ‘있을 법’한 이야기를 다루고자 노력하고 있다. 상당히 담백한 스토리를 자랑하는 게임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실시간으로 진행되는 ‘교섭’이다. 홍보 단계부터 게임의 가장 큰 특징으로 내세운 부분이다. 교섭은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으며, 주인공이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되는 타이밍에 선택지를 누르는 방식이다. 때로는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해야 할 때가 있고, 말을 끊어야 할 때도 있다. 아래에 선택지가 제시되었을 때 한 턴만 참으면 새로운 선택지가 나와 이야기를 아예 다르게 이끌어갈 수 있기도 하다.
더욱 재미있는 점은 UI를 통해 누가 대화의 주도권을 이끌고 있는지 알 수 있도록 대화의 공방을 실시간으로 보여준다는 점이다. <총성과 다이아몬드>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다. 주도권을 잡을수록 그 인물이 화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며, 반대쪽은 작아진다. 말을 강하게 할 때는 별도의 효과음과 함께 화면 가운데의 ‘파장’이 요동치기도 한다.
(출처: 초보 게이머와 고전게임의 추억 유튜브)
때때로 상대방이 화를 내기도 한다. 이모션 게이지가 최대치까지 올라가면 게임 오버
(출처: 초보 게이머와 고전게임의 추억 유튜브)
좋은 교섭을 위해 반드시 주도권을 잡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주도권을 오래 잡고 있는 것이 ‘좋은 평가’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실시간으로 표현되는 토론의 주도권을 플레이어는 ‘묘하게 신경쓸’ 수밖에 없고, 계속해서 긴장감을 느끼게 된다. 이런 방식으로 말싸움의 흐름을 UI를 통해 흥미롭게 표현한 게임은 많지 않다.
협상의 긴장감을 더욱 끌어 올려주는 장치도 있다. 탱고의 느낌으로 만들어진 OST다. 인터뷰에 따르면 개발 초기부터 결정됐던 부분이라고 한다. 그리고 독특한 멜로디와 박자는 마치 말을 통해 공방을 주고받는 것처럼 진행되는 교섭 파트와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진다. 특히 한 챕터의 대미를 장식하는 마지막 교섭에서 등장하는 OST '저지먼트'는 게임을 해 본 사람이라면 뇌리에 강하게 남을 수밖에 없다.
이처럼 <총성과 다이아몬드>는 마치 드라마처럼 전개되는 듯한 담백한 연출, 실시간으로 진행되는 교섭을 통해 색다른 텍스트 어드벤처를 선보이려 한 게임이다. 게임의 검수를 유명 노벨 게임 <제철초>와 <카마이타치의 밤> 개발에 참여한 ‘아사노 카즈야’가 맡았기에 나름 경력 있는 개발진의 연출력과 노하우가 섞여 들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일방적으로 밀리다가, 천천히 역전해 나갈 때의 통쾌함이 게임의 재미라 할 수 있다.
이상적으로 교섭을 풀어 나가면 사람을 살살 낚는 주인공의 혓바닥이 참으로 인상적인 게임이다.
(출처: 초보 게이머와 고전게임의 추억 유튜브)
게임을 접한 사람이라면 대부분 <총성과 다이아몬드>에 호평을 남겼지만, 명작 게임이라면 응당 있을 만한 타 기종의 이식에 대해서는 소식이 없다. 완성도에 비해 그렇게 인지도가 높지 않기도 하다.
SCEK가 공식적으로 개발을 지원하고 유통한 타이틀이긴 하지만, 당시 자료를 찾아보면 <총성과 다이아몬드>를 깊이 있게 다룬 현지 매체의 기사를 찾기 어렵기도 하다. 개발진 인터뷰조차 잘 보이지 않는다. 시간의 영향도 있겠지만 홍보에 그렇게까지 공을 들이지 않은 소규모 타이틀로 추정되는 상황이다.
국내에서는 독특하게도 타이틀을 구매한 사람에게 스티커 추첨을 통해 ‘0.5 캐럿의 실제 다이아몬드’를 주는 행사를 하기도 했다. 이를 흥미롭게 본 일본 현지 매체의 기사가 있기도 하다. 정말 다이아몬드를 경품으로 제공했는지에 대한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소니가 공식적으로 유통한 게임인 만큼 단순히 당첨자가 후기를 남기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지 않나 생각해 본다.
총성과 다이아몬드의 국내판 표지
여담으로 어드벤처 게임은 잘 한글화되지 않았기에, <총성과 다이아몬드>의 한글화 출시는 놀라운 결정이라 할 만했다.
판매량은 부진했던 것으로 보인다. 공신력은 높지 않지만, 당시 게임 타이틀의 판매 개수를 집계하던 현지 블로그는 <총성과 다이아몬드>의 출시 판매량이 2,400장 정도로 추정된다며 그다지 좋지 못하다고 이야기했다. 디지털 다운로드가 지금보다 덜 발전한 시대임을 감안해도 좋은 성적은 아니다. 국내의 경우에는 커스텀 펌웨어를 통한 불법적인 게임 플레이가 당연시되던 시절이었으니 이보다 더 낮았을 것이다.
현지 게이머들은 판매량 부진의 이유에 대해 “PSP에서 어드벤처 타이틀은 그다지 인기 있지 않은 것 같다”라고 평했다. <총성과 다이아몬드>는 PSP로만 출시됐고, <원격수사 ~ 진실로의 23일간> 등 PSP를 중심으로 출시된 다른 정통 어드벤처 게임도 그다지 성적이 좋지 못했기 때문이다. 판매량도 비슷하게 낮았다.
“원래 텍스트가 많은 정통 어드벤처 게임은 대중성이 낮은 마니악한 장르다”라고 이야기하기엔, 당시 닌텐도 DS로 출시된 정통 어드벤처 게임 중 일부는 10만 장 이상 팔리며 흥행하고 있었다. 결국 PSP로 출시한 정통 어드벤처 타이틀의 계속된 실패에 소니도 흥미를 잃었을 가능성이 높다. PSP 사용자층은 어드벤처 게임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총성과 다이아몬드>가 ‘완전무결한’ 게임이 아니란 점도 있을 것이다. 단점도 분명 있다. 교섭은 실패하면 처음부터 다시 진행해야 하기에 답답함을 느낄 수 있지만, 정작 완벽한 교섭을 하려면 플레이어가 실패를 반복하면서 찍어 맞추듯이 선택지를 눌러야 한다. 작중 주인공이 교섭을 이끌 작전을 머릿속에 가지고 있더라도 플레이어에게는 약간의 힌트만을 제공할 뿐이기 때문이다.
(출처: 초보 게이머와 고전게임의 추억 유튜브)
게임의 난이도를 위해서 어쩔 수 없겠지만 지나치게 관대한 범인의 행동이 일부 플레이어에게 단점으로 지적되기도 했다. 스토리 중시 게임에 으레 따르곤 하는 ‘후반부의 허무함’도 대표적인 단점이다. 게임에서 플레이어가 개입하는 요소가 극히 적고, 연출이 상당히 절제된 편이기에 취향에 맞지 않으면 상당히 지루한 게임이 될 가능성도 높다. 조미료를 거의 배제하고 순수한 맛으로 승부하는 음식과 같다.
그렇게 <총성과 다이아몬드>는 ‘아는 사람만 아는 수작’으로 기억되고 있다. 개발사 ‘제너 워크스’는 2014년 이후로 별다른 타이틀을 내놓지 않고 있기도 하다.
상업적으로 아쉬운 결과를 보인 게임에 당연한 결과라 할 수도 있겠지만, 삐딱한 시선으로만 보기에는 아쉬운 타이틀이다. 적어도 이 게임에서 표현된 실시간 교섭 콘텐츠의 아이디어와 재미, 연출만큼은 묻혀두기엔 아까운 상상력이 아닐까 싶다.
챕터 1 스토리의 기승전결도 상당히 훌륭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