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의 창작은 멈추었지만, 우리는 서울에서 그 발자취를 만날 수 있습니다.
4월 26일부터 8월 3일까지 서울 세종미술관(세종문화회관 내 미술관)에서 스튜디오 지브리의 거장 타카하타 이사오의 전시회가 열립니다. 타카하타 이사오는 1959년 애니메이션 일을 시작해 <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대모험>(1968)을 연출했고, 이후 곳곳에서 <팬더와 친구들의 모험>(1972), <알프스 소녀의 하이디>(1974), <빨강머리 앤>(1979) 등의 작품을 연출했죠.
1985년에는 미야자키와 지브리를 설립, 그의 작품을 돕는 한편 <반딧불의 묘>(1988), <추억은 방울방울>(1991),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1994) 같은 걸작을 감독했습니다. 그는 히사이시 조를 음악감독으로 맡길 정도로 음악적 안목이 있었으며, 애니메이션 제작 과정에 디지털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한 선구자로 꼽힙니다. 초창기 서양의 동화들을 감독한 뒤, 지브리에서는 줄곧 일본적 소재에 천착하며 미야자키와 함께 지브리 특유의 자연 중심, 아동선호, 반전(反戰)의 신비 세계를 구축했습니다.
지브리의 작품세계는 넷플릭스부터 대원미디어가 운영 중인 공간 '도토리숲'에서 만날 수 있지만, 이렇게 한국에서 지브리 창작자의 세계에 흠뻑 빠질 수 있는 기회는 대단히 드물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뜻깊은 방한을 맞아 대원미디어, 세종문화회관, 스튜디오선데이는 26일 전시관 앞에서 이번 전시의 개막 행사를 열었습니다.
현장에서는 미야자키의 은퇴와 그 번복 소식 때마다 감독의 입장을 대변해온 지브리 부사장 니시오카 준이치가 이번 전시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는 전시가 열리게 된 배경에 관해 "타카하타 감독이 돌아가신 뒤, 집에서 유품을 정리하다가 애니메이션 관련해서 많은 자료를 발견할 수 있었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유품에는) 65년 전부터 오늘날까지 애니메이션에 있어서 중요한 자료가 있었는데 이런 자료를 많은 사람이 보기를 바라 전시를 준비하게 되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어서 "타카하타 감독은 애니메이션의 발전에 많은 공헌을 했다"며 "첫 번째로 애니메이션은 어린이 전용 콘텐츠로 여겨졌는데, 어른들도 즐길 수 있는 콘텐츠로 발전시켰다. 다카하타 감독이 없었다면 지브리와 오늘날의 애니메이션은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설명했습니다.
두 번째는 "미야자키 하야오를 발견해서 일본과 세계를 대표하는 거장으로 함께 작업한 것"이라며 "미야자키 감독과 타카하타 감독은 도에이 동화에서 만났다. 두 감독은 5살 차이가 났는데, 수십 년 전부터 계속 작업해 온 사이였다. 미야자키 감독에게 타카하타 감독은 동료이자 스승이자 라이벌"라고 회고했습니다.
그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영화를 만들 때 이 장면을 타카하타는 어떻게 생각할까 생각하며 작업했고 최근 개봉한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도 같은 생각으로 작업했다"고 합니다.
세 번째 공헌은 "일본 애니메이션 작화기법에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타카하타 감독은 작품을 만들 때마다 새로운 기법을 모색하고 많은 도전을 했다"며 "이번 전시의 시작과 끝은 <가구야 공주 이야기>로 이어지는데 그 중간에는 감독이 시도한 새로운 기법들을 만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니시오카 부사장은 "이번 전시에서는 세가지 공헌에 대한 모든 것을 볼 수 있다"며 "타카하타 감독이 어떤 생각으로 작품을 만들었는지 함께 보았으면 좋겠다"라고 맺었습니다.
개막행사 이후, 스튜디오 지브리의 전시 프로듀서 다나카 카즈요시가 스페셜 도슨트를 맡았습니다. 이번 전시는 총 4장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타카하타 감독의 일생을 따라가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곳곳에 감독의 원화, 레이아웃, 콘티, 기획의도 등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제1장 '출발점'에서는 1959년 도에이 동화(현 도에이 애니메이션)에 입사하여 애니메이션 연출가를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연출 조수 시절에 그렸던 <안쥬와 즈시오마루>(1961) 콘티가 최초로 공개됩니다. <장난꾸러기 왕자의 오로치 퇴치>(1963)와 <늑대소년 켄>(1963~1965)에서 애니메이터로서의 재능을 꽃피운 그는 <태양의 왕자와 호루스의 대모험>에서 첫 연출을 맡으며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거듭납니다.
<태양의 왕자와 호루스의 대모험>은 "혁신적 장편"으로 "민주적인 제작 체제"를 모색한 작품입니다. 각본 단계부터 메인부터 말단까지 모두 참여해 의견을 제출했으며, 직위에 구애받지 않고 작품에 대한 의견을 제출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첫 감독을 맡은 타카하타는 벽 한 면에 캐릭터와 장면과 여러 이미지를 부착한 뒤에 제작 방향에 대해서 토의했습니다. 제작진의 토의가 작품에 어떻게 반영되어 있는지, 현장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미야자키 하야오는 얼음 매머드라는 캐릭터에 대해 고안합니다. "숲의 정령과 개척하는 인간의 투쟁"이라는, 지브리를 관통하는 키워드 또한 이 작품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제작진 간의 "민주적 토의"의 결과, <태양의 왕자와 호루스의 대모험>에는 "시공간을 생략하지 않는 다큐멘터리 풍 카메라워크와 컷 언결"을 만날 수 있습니다.
제2장 '일상생활의 기쁨'은 도에이를 떠난 그가 <알프스 소녀 하이디>(1974)부터 <엄마 찾아 삼만리>(1976), <빨강머리 앤>(1979) 등 '세계명화극장' 활동에 주력하던 시기를 조명합니다. 주에 1화 애니메이션을 완성해야 하는 제약에도 타카하타 감독은 의식주와 자연의 관계를 연출하기 위해 애씁니다. 이때 함께 작업했던 미야자키 하야오, 곤도 요시후미는 지브리를 함께 세우게 됩니다.
그래도 명색이 게임 웹진이니까 게임 이야기도 하나 해보겠습니다. 당시 타카하타 감독과 함께 일한 그의 동기 코타베 요이치는 지브리 창립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1985년 한 게임사에 입사해 일러스트 개발을 맡습니다. 당시 그는 도트 그래픽으로 만들어진 캐릭터를 일러스트로 그려달라는 요청을 받게 되는데, 그의 첫 작업물이 바로 '마리오'입니다. 코타베가 2007년까지 작업, 검수한 캐릭터들은 오늘날까지 닌텐도의 마스코트가 됩니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번 전시는 타카하타 감독이 작고한 이유 열리는 첫 해외 전시이기 때문에 그가 대중에 공개하지 않던 레이아웃까지 만날 수 있습니다. 특별 도슨트 다나카 카즈요시는 "생전 고인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더라'던 레이아웃들이 대거 발견되어 가지고 올 수 있게 되었다고 소개했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린 <판다코판다>(1972~1973)의 레이아웃이 최초로 공개됩니다. 기자는 그 설명을 듣고 미야자키가 그린 판다를 보며 '토토로'가 생각났습니다.
<엄마 찾아 삼만리>(1976)과 <빨강머리 앤>(1979)은 이후 지브리 사단이 모험과 성장을 어떤 식으로 연출하는지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실마가 됩니다. <귀를 기울이면>까지 함께 작업한 작화감독 콘도 요시후미는 <빨강머리 앤>을 작업하며 원작에 충실하면서도 시리즈를 거쳐 성장하는 캐릭터를 디자인하기 위해 자신을 건 사투에 뛰어들어 성공했다 하는군요.
제3장 일본문화를 향한 시선은 <꼬마소녀 치에>(1981), <첼로 켜는 고슈>(1982) 등 한국에서는 다소 생소한 작품들로 시작합니다. 이전까지 서양의 이야기를 동화로 옮겨내는 데 집중했던 타카하타 감독은 "일본인이 일본 애니메이션을 만든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항상 생각했다"고 합니다. 두 작품에서 타카하타와 그 동료들은 오사카의 서민을 그린 <꼬마숙녀 치에>, 그리고 미야자와 겐지의 동화를 애니메이션으로 옮긴 <첼로 켜는 고슈>를 작업했던 것입니다.
1982년까지 1987년까지는 타카하타의 공백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록에 등장하는 애니메이션 연구자 가노 세이지의 해설에 따르면 당시 타카하타는 미야자키 하야오, 오쓰카 야스오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디즈니의 베테랑들로부터 작화 강의를 듣고 일본으로 돌아와 새로운 작품을 모색합니다. 이들은 지브리 설립 직전의 대작 <바람계곡의 나우시카>(1984)를 작업했는데, 타카하타 이사오는 감독 대신 프로듀서를 맡으며 제작 과정을 보조했습니다. 히사이시 조를 채용하고, 제작 과정을 조율하는 뒷일을 맡은 것입니다.
지브리 설립 직후에도 타카하타 이사오는 <천공의 성 라퓨타>를 프로듀서를 맡으며 2선으로 물러나면서 스튜디오의 성장을 도왔습니다. 그가 로케이션 헌팅을 위해 찾은 야나가와에서 수로 오염이 진행되자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일시적으로 전직, 수로의 회복을 그린 다큐멘터리를 연출하기도 합니다. 이듬해 들어서야 그는 <반딧불이의 묘>을 맡으며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돌아옵니다.
<반딧불이의 묘>(1988)에서 다카하타 감독은 미야자키 하야오가 추구하던 초현실적인 스케일 대신, 태평양전쟁 상황에서 살아남는 어린 남매의 이야기를 담습니다. 전쟁의 폐허를 연출한 배경 미술과 삶을 이어가는 어린 남매의 작화는 대비를 이루며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반딧불이의 묘>는 한국에서 문제적 작품으로 거론되는데, 그 때문인지 이 작품에 대한 사진 촬영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추억은 방울방울>(1991)은 지브리의 작화력을 끝까지 끌어올린 작품으로 평가됩니다. "전에 없는 사실성"을 추구하도록 배경 작화에 전력을 다했다고 합니다. 이 작품에서는 과거 장면을 세피아 톤으로 색칠하던 클리셰를 벗어나 과거와 현재를 다른 그림 스타일로 표현하면서 그 두 스타일을 관통하는 주인공의 개인사를 볼 수 있습니다. '1애니 2스타일'은 당시 타카하타가 추구하던 혁신입니다.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1994)은 기자가 제일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귀여운 너구리 그룹이 환경 파괴로 터전을 잃은 뒤에 살아남기 위해 분투한다는 내용입니다. 너구리들은 변신술을 쓰며 인간 흉내를 내고, 인간을 괴롭히는 괴물이 되곤 하는데 인간을 상대로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 끝에 인간을 상대로 싸워야 한다는 주전파와, 이제 그만 순응하고 살아남자는 주화파의 갈등은 70년대 일본 공산주의 노선 투쟁에 대한 우화라는 해석이 있지만(타카하타 감독 본인이 일본공산당의 지지자였습니다), 이 메시지는 지금의 한국에 가져와도 손색이 없는 듯합니다.
마지막 제4장 스케치의 약동에서는 후기작 2편(<이웃집 야마다군>(1999), <가구야공주 이야기>(2003)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지브리는 <모노노케 히메>(1997),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을 연이어 성공시키며 전성기의 문을 엽니다. 이때 타카하타 감독은 실험적인 작화법을 연구하기 시작합니다.
동명의 4컷 만화를 장편으로 만든 <이웃집 야마다군>은 소소한 일상을 따뜻한 분위기로 연출한 애니메이션으로, 원작의 선을최대한 살리면서 단순한 선화에 수채 물감으로 색을 입힌 뒤, 배경을 여백으로 남겨두었습니다. 이 작품에서 타카하타는 처음으로 컴퓨터 채색을 도입했는데, 컴퓨터이면서도 손 그림의 터치를 느끼도록 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습니다. 이로써 "전례 없는 기법이 개발되었다"라고 합니다. 4컷 만화를 극장 영화로 만든 시도는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새로운 기법을 향한 작가의 열정만은 뜨거웠습니다.
그 열정은 타카하타의 마지막 작품 <가구야공주 이야기>에 이어집니다. 일본의 '대나무꾼 이야기'를 장편으로 만든 작품으로 기획부터 완성까지 총 8년이 걸린 대작입니다. 전작에서 추구했던 펜 터치+컴퓨터 채색을 연필 터치+컴퓨터 채색으로 이어 격렬한 선과 영상효과의 조합을 연출했습니다. 배경을 과감하게 생략하는 '동양적' 연출도 여기서 이어집니다. 가구야공주가 벚나무 아래에서 환희의 춤을 추는 장면은 '스케치의 약동' 그 자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전시장 입구에 등장하는 대나무 끝에서 자라난 죽순은 전시장 끝에서 손바닥만 한 여자아이가 됩니다. <가구야공주 이야기>의 첫 장면을 연출한 것입니다. 바로 그 맞은 편에 생전 감독이 애용하던 스톱워치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는 작업할 때 손에서 스톱워치를 놓지 않았는데, 애니메이션을 작업할 때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표현하기 위해 마지막 작품을 작업할 때까지 줄곧 스톱워치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 손때 묻은 스톱워치는 타카하타 이사오의 창작은 멈추었지만, 뒷 세대의 창작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