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기사는 TIG 게임연구소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작성됐습니다. 게임연구소는 게임이나 개발, 산업 등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 콘텐츠를 제작하기 위한 프로젝트입니다. 앞으로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유저들은 언제 게임을 그만둘까? 여러 경우가 있겠지만, 게임이 주는 보상과 만족감이 내가 투자한 시간과 노력의 가치에 비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 유저들은 게임에서 이탈한다. 그리고 그 보상의 가치는 게임의 설계와 콘텐츠의 배치에 따라 다양한 방식과 층위에서 체감된다.
그렇다면 게임은 어떻게 보상을 제공하고 그 가치를 보존할까? 혹은, 게임은 어떻게 유저들에게 보상감을 주는 데 실패할까? 몇 가지 사례를 모아봤다. / 디스이즈게임 이준호 기자
# 게임 하는데 이유가 어디있어? - 가치의 저울질
여러분이 온라인 RPG를 하고 있다 치자. 수 시간의 트라이 끝에 보스 몬스터를 잡고 던전을 클리어했다. 원하던 아이템도 얻었다. 당신은 길드 채팅방에 아이템을 링크하고 자랑한다. 길드원들의 부러움 섞인 축하 뒤에, 당신은 성취감을 안고 만족스러운 얼굴로 잠든다. 내일은 어떤 ‘득템’을 할까 기대하며 말이다.
누군가는 이것을 ‘가짜’ 성취라고 할 수도 있다. 실제로 게임 소재 드라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의 작가 송재정은 ‘레벨업’이나 ‘득템’ 같은 개념을 비-게이머 일반 드라마 청중에 납득시키는 것이 매우 힘들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일상의 차원에서, 당신이 ‘실제로 얻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당신이 얻은 것은 어디까지나 ‘가상 현실’ 내지는 가상의 사회와 시스템에서만 그 가치를 인정받는 데이터 조각이다.
하지만 게임을 통해 당신이 얻은 성취감, 그리고 그것이 주는 만족감은 더할 나위 없이 진짜다. 각종 ‘너드 스크림’ 영상(nerd scream, 레이드 클리어 등 어려운 과제를 달성한 게이머들이 환호성을 지르는 캠 영상)에서 우리는 쉽사리 연기할 수 없는 진심을 본다. 무엇보다 내가 그 아이템을 얻기 위해 들인 모든 시간과 노력(그리고 때로는, 돈)이 ‘진짜’다.
예를 들어보자. 그 방식 자체에 대한 가치 판단은 차치하고, Pay-to-Win 형태의 게임은 유저가 투입한 가치와 보상 사이의 저울질이 가장 명확한 사례다. 플레이어는 이기기 위해 돈을 쓴다. 당연히, 게임이 제공하는 보상이 ‘돈값’을 못한다 느끼면 게임에서 이탈한다.
“무과금 되다”라는 흥미로운 표현도 쓰인다. 수많은 과금을 했음에도, 가챠나 강화에 모두 실패해 실제로 얻은 것이 없을 때, 그래서 게임이 주는 만족감의 가치가 0에 수렴했다고 느낄 때, 게이머들은 “무과금 됐다”며 달콤한 환상에서 깨어난다. 이 감정은 어쩌면 신기한 마술의 비밀을 알아버린 뒤 입에 남는 씁쓸한 뒷맛과도 같다.
게이머들이 언제나 시장에서 물건을 살 때처럼 자신의 행동에 숫자를 매겨가며 가치 판단을 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게임이 임무와 ‘보상’의 연쇄로 작동하는 예술인 이상, 가치의 저울질은 반복적으로,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일어난다.
그리고 이러한 저울질의 결과 그 보상의 값어치가 낮거나 없다고 느껴지면, 유저들은 박탈감을 느끼며 게임에서 이탈한다. 잘 만들어진 게임은, 투자된 가치가 무의미해지지 않도록 다양한 방법을 통해 유저 만족도를 관리하고 플레이 동기를 부여한다.
# <디아블로 3>, ‘수면제’에서 3,000만장 베스트셀러 되기까지
1996년 <디아블로>는 ARPG라는 장르에 한 획을 그은 작품이었고, 2000년 <디아블로 2>는 ‘핵앤슬래시’라는 장르를 한국의 게이머들에게 강렬하게 각인시키며 PC방을 점령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12년만에 돌아온 <디아블로 3>는 앞의 두 작품과 너무나도 다른 게임이었다.
2D 그래픽의 어둡고 무거운 아트 스타일은 3D 렌더링의 화려한 조명 효과로 대체됐고, 촘촘했던 능력치/스킬 포인트 기반의 육성 체계는 스킬-룬 조합 시스템으로 대폭 간략화됐다. 가장 파격적인 것은 현금 거래가 가능한 경매장이었다.
‘유저 간 현금 거래’를 공식/양성화시키겠다는 이 야심찬 기획은 좋은 결과를 내지 못했다. 현실 화폐와 지속적으로 거래(혹은, 환전)되면서 재화 가치가 제어되리라 생각했던 것인지 게임 안에 마땅한 재화 소비처가 없었다. 이어진 것은 세계 대전 직후의 독일이 부럽지 않은 메가 인플레이션이었다.
화폐는 사실상 가치가 없었고, 내가 원하는 아이템을 얻을 확률은 극도로 낮았다. ‘수도사’로 플레이하고 있어도 ‘야만용사’ 아이템을 얻는 일이 잦았다. 초창기 <디아블로 3>의 망가진 경제 시스템 아래, 플레이어에게 유의미한 보상은 전설과 세트 아이템이 빛 기둥을 뿜어낼 때 발생하는 일말의 기대감뿐이었다. 그리고 이 기대감은 너무나도 쉽게 무뎌졌다. <디아블로 3>는 유저가 게임에 투자한 시간과 노력의 가치를 가시적으로 보존하지 못했다. 반복적인 플레이가 주는 ‘수면제’라는 불명예스러운 평가는 덤이었다.
2014년, 디렉터 제이 윌슨은 사실상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후임 디렉터로는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2006)와 <워해머 40000: 던 오브 워>(2004), <파 크라이 3>(2012)등을 만든 조쉬 모스케이라가 부임했다. 그가 가장 먼저 착수한 곳은 스킬 밸런스나 전투 시스템이 아니라, 게임의 보상 체계였다.
2014년, 조쉬 모스케이라가 감독한 확장팩 <영혼을 거두는 자>에서 <디아블로 3>는 획기적인 전환을 맞았다. 이른바 ‘전리품 2.0’(원어는 Loot 2.0)이라 명명된 새로운 보상 체계는 경매장과 플레이어간 골드 거래를 없애는 대신 플레이어가 자신의 직업에 맞는 전리품을 얻을 확률을 대폭 증가시켰다. 아이템이 가지는 옵션의 최소 수치 역시 상향됐다. 플레이어가 기대하는 보상의 잠재적 가치를 가시적으로 높이는 것이었다.
레벨 캡 확장 시스템이었던 정복자 레벨 역시 대폭 변경됐다. 2.0 패치 전, 정복자 레벨은 소량의 능력치 보너스와 레벨 당 3%의 ‘마법 아이템 발견’을 추가해주는 수준이었다. 최고 레벨을 확장하면서 플레이어에게 추가 성장의 여지를 부여하는 것은 맞았으나, 성장 속도가 매우 느릴 뿐 아니라 플레이어가 체감하기도 어려운 형태였다.
2.0 패치에서 정복자 레벨은 모든 캐릭터가 공유하는, 일종의 계정 진척도(account progress) 개념으로 변경됐다. 전처럼 단순히 자동으로 캐릭터의 능력치를 올려주는 것이 아니라 레벨을 올릴 때 마다 포인트를 얻고, 이 포인트를 자신이 원하는 분야에 투자하는 육성형 콘텐츠였다.
그리고 드디어 2015년 8월, ‘카나이의 함’이 모습을 드러냈다. 카나이의 함은 전설 아이템이 가진 고유 능력을 추출, 그 능력을 패시브 효과로 활성화 하게 해주는 참신한 기능을 제공했다. 이 기능은 그동안 잘 쓰이지 않았던 전설 아이템들이 활용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면서 수많은 새로운 게임플레이를 가능케 했다.
카나이의 함은 각종 크래프팅 기능도 제공했다. 희귀 아이템을 전설이나 세트 아이템으로 업그레이드하고, 이미 확정된 옵션을 리롤(reroll)하게 해주는 등 단순하지만 유용한 기능들이었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여기에 각종 아이템을 분해해 얻는 재료가 소모된다는 사실이었다. 전에는 가치가 없어 버려질 뿐이었던 각종 아이템들이 ‘재료’로서 최소한의 가치를 얻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전리품 2.0, 정복자 레벨 개선, 그리고 카나이의 함은 <디아블로 3>를 전과 완전히 다른 게임으로 만들었다. 이전에는 몇 시간씩 사냥을 해도 내가 원하는 아이템을 얻지 못하면 보상이 0으로 수렴하는 구조였다. 그러나 이제는 원하는 아이템을 얻을 확률이 올라가 보상의 기대감이 대폭 상승했고, 얻는 것이 없더라도 정복자 레벨의 경험치를 얻고 나중에 쓸 수 있는 재료 아이템이 창고에 쌓이므로 최소한의 성취감이 보장됐다.
비록 오랜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디아블로 3>는 결과적으로 유저들이 쓴 시간이 아깝지 않게 느껴지는 보상 구조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발매 초의 좋지 않은 평가는 아랑곳 않듯, <디아블로 3>의 판매량은 꾸준히 상승했고, 결과적으로 3,000만 장이 넘는 판매고를 기록하며 ‘가장 많이 팔린 PC 게임 Top 10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 <격전의 아제로스>가 저지른 실수 - ‘티어 세트’의 삭제와 보상 가치 보존의 실패
지난 해 8월 출시된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이하 와우)의 최신 확장팩 <격전의 아제로스>. 이 확장팩은 그 전 확장팩인 <군단> 못지 않게 실험적인 시도를 담고 있었다. ‘티어 세트’라 불리는 공격대 던전 고유 드랍의 세트 아이템이 사라진 것이다.
적게는 10명에서 많게는 40명까지의 플레이어가 모여 10마리가 넘는 보스 몬스터와 연속으로 싸워나가는 <와우>의 공격대 던전, 이른바 ‘레이드’는 어렵고, 복잡하고, 진입장벽이 높았다. 최적화된 장비, 직업과 역할에 대한 이해도, 단계별 공략의 숙지가 클리어를 위한 ‘기초’ 조건이었으니 말 다한 셈이다.
레이드는 그 난이도가 대체로 터무니없는 학습 곡선을 그렸고,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공략은 ‘논문’이라는 악명을 얻었다. 단순히 레이드를 가기 위해 ‘준비’를 하는 행위 조차 일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강한 상태로 보스와 싸우기 위해 능력치를 올려주는 음식과 물약을 먹는 ‘도핑’이 필수였고, 당연하지만 이 소모품들 역시 공짜가 아니었다. 레이드는 플레이어가 게임에 들일 수 있는 온갖 시간과 노력의 결정체로서 혹은, ‘인생의 없음’(No-life)이라는 의미에서 대중적 아이콘이 됐다.
하지만, 그만큼 레이드가 주는 보상은 남달랐다. 더 강한 아이템을 얻어 “내 캐릭터가 더 강해졌다!”라는 단순한 느낌이 아니었다. 남들은 쉽사리 진입하기도 힘든 콘텐츠를 클리어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주는 우월감, 게임에 대한 이해도와 숙련도가 인정받았다는 자부심....... 하나의 레이드를 클리어했다는 것은 마치 하나의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자신의 커리어에 유의미한 한 줄을 추가하는 느낌과도 비슷했다.
레이드에서만 얻을 수 있는 고유한 방어구 세트, 이른바 티어 세트는 그런 성취감의 물화(物化)였다. 각 단계의 레이드마다 고유한 외형을 가진 이 방어구들은, 2/4/6개씩 장비할 때마다 독특하면서도 대체로 매우 뛰어난 성능을 보여주는 ‘세트 효과’를 캐릭터에 부여했다.
물론 외형과 성능이 전부인 것도 아니었다. 각 부위별 획득처가 레이드의 특정 보스로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자체로 높은 희소성을 가짐은 물론, 해당 단계의 레이드를 클리어했음을 드러내는 ‘훈장’같은 역할도 했다. 예를 들어 티어 세트의 ‘머리’ 부위는 일반적으로 해당 레이드의 마지막 보스 혹은 그 직전의 보스가 드랍하는 아이템으로서 매우 높은 가치와 상징성을 지녔다.
한편, 티어 세트는 ‘세트’라는 점에서 반복 플레이 동기를 부여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티어 세트의 효과를 제대로 누리기 위해서는 최소 2세트, 많게는 6세트까지를 장착해야 했는데, 자신이 원하는 부위의 방어구가 무조건 나온다는 보장이 없었기에 한 두 번의 클리어로 이 세트를 완성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티어 세트는 공격대 던전의 반복 플레이가 주는 보상 가치의 체감이 무뎌지지 않도록 완화해주는 닻이었다.
공격대 던전의 티어 세트는 그 자체로도 공격대 던전 플레이의 동기가 될 뿐 아니라, 콘텐츠가 주는 여러 종류의 만족감 및 성취감과의 시너지, 보상의 선순환을 활성화하는 보상 체계의 핵심이었다.
물론 단점이 없지는 않았다. 티어 세트는 때로 하드코어와 라이트 유저 사이의 줄일 수 없는 격차를 의미했고, 그 자체로 콘텐츠의 진입 장벽이 되기도 했다. 유저 저변 확대에 걸림돌로 인식된 것인지, 티어 세트는 <격전의 아제로스>에서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14년 역사상 처음으로 삭제됐다. 빈 자리를 채운 것은 ‘아제라이트 방어구’라는 새로운, 하지만 결함이 있는 시스템이었다.
초기 아제라이트 방어구는 쉽게 말해 티어 세트가 가지고 있던 효과를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 각각의 아이템에 넣어 준 것이었다. 활성화 조건도 착용 개수가 아니라 플레이어의 ‘유물력’ 레벨이었다. 유물력 레벨은 이전 확장팩인 <군단>부터 도입된 일종의 레벨 캡 확장 시스템이었다.
공격대 던전에서만 얻을 수 있었던 티어 세트와 달리, 아제라이트 방어구는 일일 퀘스트, 신화 던전 등 더 다양한 획득 경로를 통해 얻을 수 있었다. 획득 난이도가 획기적으로 낮아졌다. 높은 등급의 공격대 던전에서 나오는 아제라이트 방어구의 기본 레벨과 능력치가 더 높았고, 간혹 특수한 고유 효과를 지닌 방어구가 있긴 했지만, 공격대 던전의 반복 플레이 동기를 부여하기에는 충분치 못했다.
비록 ‘더 강해지기’라는 단순하고 가시적인 목표를 달성하는 것은 쉬워졌지만, 플레이어들이 체감하는 공격대 던전의 보상 가치는 전에 비해 매우 낮아졌다. 블리자드는 티어 세트가 만들어내던 보상감과 만족도의 시너지를 과소평가한 것이 틀림없었다.
<격전의 아제로스>에서 플레이어들에게는 더 이상 반복적으로 공격대 던전을 플레이할 이유가 없었다. 티어 세트를 얻기 위해 공격대 던전을 트라이하는 대신, 플레이어들은 아제라이트 방어구의 효과를 활성화하기 위해 유물력 레벨을 올려야 했다. 이를 위해 플레이어들은 전역 퀘스트나 군도 탐험 같은 ‘덜 흥미로운’ 반복성 콘텐츠를 플레이해야했고, 이것은 일종의 강요처럼 느껴졌다.
아제라이트 방어구와 유물력 레벨 시스템은 명백한 주객전도였다. 유사한 레벨 캡 확장 시스템인 <디아블로 3>의 정복자 레벨이 ‘아이템을 얻지 못했을 때 최소한의 만족감을 보장하는 심리적 보상 체계’로 기획, 작동한 점을 감안하면 대조는 더욱 선명하다.
지난 4월, <격전의 아제로스>의 디렉터 이언 해지코스타스는 미국 매체 폴리곤(Polygon)과의 인터뷰에서 아제라이트 방어구를 비롯한 아제로스의 심장(유물력 레벨) 콘텐츠에 결함이 있음을 뒤늦게 인정했다. 확장팩이 출시된 지 장장 8개월 만이었다.
“(아제로스의 심장은) <군단>과 비교했을 때 <격전의 아제로스>가 모자란 부분(fall short)이었습니다.”
# ‘뽑기’ 게임의 경우: 꽝이지만 꽝 아닌 듯?
유저가 투입한 가치와 보상의 가치의 저울질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대표적인 방식 중 하나는 바로 ‘가챠’, 확률형 아이템 모델이다. 이 경우 플레이어가 돈을 써서 얻는 것은 ‘강함’ 그 자체라기보다는 강해질 수 있는 (강한 캐릭터를 얻거나, 강한 아이템을 얻거나) ‘가능성’이다. 확률이 낮은 만큼, 기대 가치는 어마어마하게 높게 설정된다.
이 방식에 있어서 가장 큰, 그리고 근본적인 문제는 바로 “‘꽝’을 어떻게 할 것인가?”다. 임의성이 주는 즐거움을 부정할 수는 없고, 비록 획득하는 것이 가상의 캐릭터와 아이템이라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그 기회를 얻는 데에 ‘현금’이 쓰이는 이상, 가챠는 언제나 “돈 날렸다”는 감각을 만들어낼 위험성을 안고 있다.
때문에 가챠 수익모델을 차용한 수많은 게임은 어떻게든 ‘꽝’의 좌절감을 줄이고 심리적 보상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변화해왔다. 내가 쓴 돈의 가치가 0이 되지 않았다고 느끼게끔, 물론, 유저들에게 더 많은 재화를 제공하겠다는 의도보다는, 다른 게임과 차별화해서 더 많은 유저(와 돈)를 끌어들이겠다는 의도에서 말이다.
※ 관련 기사
[게임연구소] 뽑기 게임 개발사는 왜 점점 '꽝'을 줄여 왔을까? (19.07.11.) 링크
[게임연구소] 넷마블 게임이 ‘혜자 게임’ 타이틀 얻어낸 비결 (19.07.11.) 링크
예를 들어 캐릭터 수집형의 모델에서 가장 큰 박탈감과 무가치함을 느끼는 순간은 이미 가지고 있는 캐릭터가 나왔을 때다. 똑같은 여러 개 쓸 수 있다면 상관이 없지만 일반적으로 이런 류의 게임은 중복(장비든 캐릭터든)을 허용하지 않는다.
대신 ‘강화’ 시스템을 도입해 중복 캐릭터를 재료로 사용하게끔 하거나, 아예 중복 캐릭터가 나오면 일정량의 재화로 환원해주기도 한다. <프린세스 커넥트: 리다이브>의 ‘여신의 보석’이나, <일곱 개의 대죄: 그랜드 크로스>의 ‘코인’이 그 예다. 이 경우 대체 보상의 게임 내 가치가 어느 정도 가시적인 수준에서 유지되기만 한다면, 중복 캐릭터를 얻지 못하더라도 완전히 ‘꽝’이라거나 “돈을 날렸다”는 감각은 아니게 된다.
이 분야의 선구자(?)인 <리니지M>에도 비슷한 장치가 보인다. <리니지M>에는 ‘변신 뽑기’가 있다. 특정한 캐릭터로 변신하는 카드를 뽑는 콘텐츠로, 작동 방식은 일반적인 캐릭터 가챠와 대동소이하다. 다만 <리니지M>에서 중요한 것은 변신 카드 ‘컬렉션’의 존재다.
컬렉션은 일정 그룹의 카드를 모으면 캐릭터에 영구적으로 능력치 보너스가 추가되는 시스템이다. ‘물약 회복률 +1%’, ‘최대 HP +5’ 등, 매우 낮은 수치처럼 보이지만 <리니지>는 전통적으로 성장 수치가 매우 작은데다, 여러 컬렉션 효과가 쌓이기 시작하면 이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차이가 된다.
따라서 유저들은 원하는 변신 카드를 얻지 못해도, 캐릭터의 스탯이 증가하는 컬렉션에 카드가 추가되니 완전히 손해를 봤다고는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무언가를 얻었다”는 감각으로 최소한의 보상 가치는 충족된다. 변신 뽑기를 어느 정도 해서 컬렉션이 쌓이면 그 욕망이 줄어들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컬렉션의 빈 칸을 채워야한다는 일념으로 - 그러면 이득이니까 - 변신 뽑기를 돌릴 것이다.
# (유저가 지불하는 것이) 돈이 전부는 아니다. 그리고...
위에서 소개한 몇 가지 사례는 유저들이 투입한 가치가 0이 되치 않도록, 그 가치를 보존하고 보상하기 위해 노력한 사례, 혹은 그 가치를 지키기 못한 사례의 일부에 불과하다. 뿐만 아니라 두 번째로 소개한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사례는 <군단>에서 추가된 유물력(무기) 시스템부터 시작해 보다 자세한 분석이 필요한 사례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게임의 소비자들은 게임이 모두 끝난 뒤에 엔딩 크레딧을 보며 게임을 평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가치의 저울질은 게임을 하는 매 순간 일어난다. 그 보상이 심미적인 것이든, 아니면 게임 내의 재화든, 혹은 대인관계에서 오는 기쁨의 충족이든, 유저들은 자기도 모르게 게임을 하면서 다양한 보상을 기대한다. 그리고 그 보상의 가치가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면 게임에서 이탈한다.
‘서비스로서의 게임’(Game as a Service)이라는 말이 업계를 떠돈다. 게임은 다른 문화예술과 달리 그것이 직접 플레이(혹은 수행)될 때에 비로소 의미를 가지고, 온라인 게이밍의 시대는 게임이 플레이 가능한 상황을 언제나 유지하는 것(혹은 더 넓은 차원에서는 우리가 ‘운영’이라고 부르는 것) 그 자체를 하나의 쉽지 않은 과제로 만들었다. 게임을 만들고 유지하는 것은 소설을 쓰거나 영화를 찍는 것만큼이나 카페를 운영하거나 극장을 차리는 것과도 비슷해졌다. 그 마케팅 방식에 있어서도 말이다.
최근 유행중인, 아마도 일반 상품 마케팅의 영역에서 넘어온 손실 회피 경향(loss aversion)을 이용(혹은 악용)하는 보상 메커니즘 - 일일 임무, 기간 한정 이벤트 등 - 은, 비록 당장은 유효할 지 몰라도 플레이어들의 피로도를 가중시킨다. 무엇보다 이러한 방식은 플레이어들이 투입한 시간과 노력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하고 지켜주는 방식이 아니다. “이걸 안하면 손해를 본다”는 부정 피드백이 아니라, 긍정 피드백에 기반한 지속가능한 보상 구조, 플레이어들의 시간과 노력(그리고 돈)을 충분히 존중하는 보상 구조를 가진 게임이 더 많이 나오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