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기사는 TIG 게임연구소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작성됐습니다. 게임연구소는 게임이나 개발, 산업 등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 콘텐츠를 제작하기 위한 프로젝트입니다. 앞으로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현실에서 빈부격차는 사회 문제지만, 게임 세계에서 라이트와 코어 유저 사이의 격차는 재미 요소입니다. 모든 것이 너무 평등하고 투명하면 재미가 사라지죠.
물론, 게임이라고 해서 격차를 완전히 방치할 수는 없습니다. 식당에 몇 명의 단골 손님이 있어 해가 될 것은 없지만, 그렇다고 가끔 오는 손님이나 처음 오는 손님을 홀대할 수는 없으니까요.
MMORPG라는 장르가 가진 근본적인 문제도 그런 것입니다. 라이트 유저와 코어 유저, 둘 모두 놓칠 수 없지만, 둘 다 만족시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만족할 수 있는 지점을 모색하는 것이 최선이죠.
그래서 MMORPG의 게임 경험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계속해서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올해로 15년째 서비스되고 있는 블리자드의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역시 예외는 아닙니다. <와우>는 지난 15년간 계속해서 바뀌어 왔습니다. 특히 ‘확장팩’이라 부르는 대규모 패치를 중심으로 말이죠.
그런데 지난해 하반기 나온 최신 확장팩 <격전의 아제로스>(이하 격아)는 그 어느 때보다 좋지 않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무엇이 문제였던 걸까요? <격전의 아제로스>는 정말로 실패한 확장팩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그 실패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디스이즈게임 이준호 기자
#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일반적인 MMORPG에서, 라이트 유저와 코어 유저는 다소 상충하는 이해관계를 가집니다.
코어 유저의 만족감은 일부분 라이트 유저에 대한 상대적 우월감에 기인합니다. “내가 너보다 이만큼 잘났다.” 한편, 라이트 유저를 위해 과제 난이도를 낮추고 보상 가치를 올리면 코어 유저에게는 게임이 충분히 흥미롭지 않게 되죠.
때문에 MMORPG는 계속해서 바뀝니다. 코어 유저를 위해 높은 난이도의 콘텐츠를 만들면 라이트 유저들이 반발하고, 라이트 유저를 위해 진입 장벽을 낮추면 코어 유저들이 재미없어하고... 모두를 만족시키는 건 불가능하지만, 게임은 항상 일정한 방향과 기조를 가지고 움직입니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서 이러한 변화는 주로 확장팩 단위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각각의 확장팩은 이전 확장팩의 피드백에 기반해서 제작됩니다.
작년 하반기 출시된 <격전의 아제로스>는 전세계적으로 좋지 않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왜 <격아>가 <군단>보다 재미 없을까?”라는 제목의 동영상이 수 백 만의 조회수를 올리기도 했죠. 이유가 무엇일까요?
<격전의 아제로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직전 확장팩인 <군단>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격아>가 보인 기조의 변화가 <군단>의 피드백에서 비롯한 반작용이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2016년 출시된 <군단>은 <와우> 역사상 가장 실험적인, 그리고 하드코어한 확장팩이었습니다. 유물 무기, 쐐기돌 던전, 군단 전설 아이템, 전역 퀘스트… 모두 이전의 <와우>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들이죠.
이 모든 콘텐츠의 요점은 하나였습니다.
“할 게 없다고? 할 걸 만들어주지!”
# 유물 무기 – 만렙이 끝이 아니라더니, 정말이었다
유물 무기 시스템은, 각 직업과 특성별로 <워크래프트> 세계관에 등장하는 유명 무기를 주고, 그것을 퀘스트나 던전을 클리어할 때마다 얻는 ‘유물력’을 소모해 업그레이드하는 성장 시스템이었습니다.
특성별로 하나씩, 무려 36개나 되는 이 무기의 목록에는 <워크래프트> 팬이라면 누구나 아는 ‘둠해머’나 ‘파멸의 인도자’같은 것들이 있었죠. <와우> 팀이 공식적으로 밝힌 것처럼, ‘클래스 판타지’를 실현할 수 있는 무기들이었습니다.
사실상, 유물 무기는 레벨 제한(만렙) 확장 시스템이었습니다. 일종의 영리한 위장이었죠.
유물 무기가 주는 보상은 ‘캐릭터 능력’을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었습니다. 그 결과, 시스템상 캐릭터 레벨이 110레벨에 도달하더라도, 유물 무기 레벨을 일정량 올리지 않으면 그 캐릭터는 완성된 것이 아닌 셈이 됐습니다. 일반적으로 ‘만렙’을 달성하면 그 직업의 능력을 모두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면 말입니다.
심지어 유물 레벨은 직업 특성별로 다 따로 올랐습니다. 화염 특성 마법사를 한참 키우다가, “냉기 마법사를 키워보고 싶은데?” 하고 특성을 바꾸면, “짜잔!” 당신의 냉기 마법사는 동네 어린이나 마찬가집니다. 유물 무기가 ‘쪼렙’이니까요. 유물 무기는 가시적인 성장이 담보되는 플레이 타임을 지연시키는 방식의 콘텐츠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유물 무기를 좋아하진 않았습니다.
유물 무기는 멋진 외형, 다양하고 유용한 추가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무엇보다 레벨업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유물력을 주는 전역 퀘스트(일일 퀘스트)가 재미가 없었으니까요.
# 군단 전설 – “님들 전설 없어요?”
<군단>을 이야기하면서 ‘군단 전설’을 빼놓을 수 없죠.
이전에 <와우>의 전설 등급 아이템은 복잡한 연계 퀘스트와 기나긴 반복 플레이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희귀한 보상이었습니다. 반면, 군단 전설은 <군단>의 모든 콘텐츠에서 낮은 ‘확률’로 얻을 수 있었죠. 네. 확률이요.
<디아블로>를 해보셨다면 이해가 빠를 것입니다. 군단 전설은 이전의 <와우>에서는 볼 수 없었던 고유한 추가 옵션을 가졌습니다. 단순히 기술의 피해를 강화하는 것부터, 완전히 새로운 플레이스타일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까지 다양했습니다.
분명 다양한 플레이 가능성을 ‘열어주는’ 방식으로 설계됐는데, 의도한 것처럼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특정 전설의 성능이 너무 뛰어나 플레이 스타일이 결국 획일화됐습니다. 거꾸로, 이른바 ‘코어 전설’이라 부르는 고성능 전설을 가지지 못한 캐릭터가 ‘반쪽 자리’ 취급을 받는 지경이었습니다. “님, 코어 전설 없으세요?”는 결코 듣기 힘든 말이 아니었습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수많은 전설 중에 ‘내가 원하는 전설’을 얻을 확률이 낮아도 너무 낮았다는 것입니다. 어떤 플레이어는 아무리 노력해도 코어 전설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운과의 싸움이니까요. ‘코어 전설’을 마지막으로 먹는 일도 흔히 일어났죠. 맞아요. 제 이야깁니다.
# <군단> – ‘노오력’과 ‘운빨’이 모두 필요한 하드코어 확장팩
유물 무기는 ‘노력’(혹은, 꾸준함)을 통한 성취를 상징합니다.
한편, 군단 전설은 ‘운’에 의한 보상을 뜻하죠.
<군단>은 노력과 운을 모두 가진 소수의 플레이어들에게는 할 것도 많고 재미있는 확장팩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게임을 재미있게, 그리고 꾸준히 즐겼죠.
하지만, 게임을 할 시간이 없거나, 태어날 때 주사위 신의 저주를 받은 사람들에게는 부정적인 경험이었습니다. 반복성 콘텐츠의 높은 요구량과 군단 전설의 임의성은 모두 이탈 요인이었고, 중간에 돌아와도 신규 콘텐츠의 진입장벽이 높아 안착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이 글의 뒷부분에서 다시 할 이야기입니다만, 블리자드는 <군단>에서 크게 2가지 교훈(그것이 옳든 그르든)을 얻은 듯합니다. 하나, 유물 무기는 (비록 다소 기만적이지만) 만렙 플레이어들에게 할 거리를 준다는 점에선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둘, 군단 전설은 답이 없다. (그냥 없애자!)
# <격전의 아제로스> – “다음 정거장은 ‘라이트 유저’ 역입니다.”
<군단>의 핵심 문제는 많은 중간 이탈 유저와, 복귀 유저를 잡아둘 수 있는 리텐션의 부재였습니다.
그 피드백에 기반해서, <와우> 팀은 <격전의 아제로스>의 방향을 정했습니다. 진입 장벽을 낮추고, 라이트 유저, 중간 복귀 유저들이 신규 콘텐츠에 접근하기 더욱 쉽게 만들자(<군단>에 이러한 ‘배려’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만)고 말이죠.
애석하게도, <격아>의 메커니즘은 의도와 다르게 굴러갔습니다. 그 모든 것의 중심에는 ‘아제로스의 심장’이 있었습니다.
# 아제로스의 심장과 아제라이트 방어구
“아제로스의 심장은 <군단>과 비교했을 때 <격전의 아제로스>가 모자란 부분(fall short)입니다.”
– 이언 해지코스타스, <격전의 아제로스> 디렉터, 폴리곤(Polygon)과의 인터뷰 중.
<격아>의 시스템의 핵심에 있는 아제로스의 심장은 유물 무기가 아닌 유물 ‘목걸이’입니다.
‘유물’이라는 말이 그대로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아제로스의 심장은 만렙 이후 추가 성장 시스템입니다. 목걸이 하나만 키우면 되니, 특성별로 무기를 따로 키워야하는 <군단>에 비해 간단하고, 따라서 역할 변경이 자유로운 등 편의성도 늘어났습니다.
하지만 유물 목걸이는 그 자체로는 아무 기능도 없습니다. 대신, 아제라이트 방어구라는 새로운 방어구 세트의 능력을 활성화하는 역할을 합니다.
아제라이트 방어구는 머리, 어깨, 가슴 3개 부위를 차지하는 방어구입니다. 여기엔 ‘아제라이트 특성’이라 불리는 여러 추가 능력이 달려 있고, 이 능력들은 활성화하기 위해 일정 수준의 유물 목걸이 레벨을 요구합니다.
유물 무기가 특정 레벨이 되어야 캐릭터의 능력이 완성됐던 <군단>과 유사하게, 아제라이트 방어구는 당신이 노가다를 통해 유물력 레벨을 일정 수준까지 올리기 전까지는 ‘미완성품’입니다. 문제는, 아제라이트 방어구의 아이템 레벨이 올라가면 아제라이트 특성의 유물력 레벨 제한도 함께 올라간다는 점입니다. 노가다 요소가 강화된 것이죠.
<군단>의 유물 무기 레벨링은 일종의 단거리 달리기였습니다. 모든 추가 능력이 활성화되는 특정 레벨까지 열심히 달리면, 그 뒤로는 쉬엄쉬엄 해도 상관이 없었죠. 만렙을 찍고 나면 더 레벨업할 필요가 없듯 말입니다. (물론, 당신이 최상위 플레이어를 지향한다면 계속해야합니다.)
하지만 아제라이트 방어구의 계속 증가하는 유물 레벨 제한은 <격아>의 유물력 노가다를 끝나지 않는 ‘마라톤’으로 만듭니다. 최상위권 유저도, 라이트 유저도 일단 게임에 접속하면 유물력을 주는 퀘스트를 마치 밀린 ‘집안일’을 하듯 깨야했죠. 그러지 않으면, 기껏 얻은 아제라이트 방어구가 무용지물이 되니까요.
단순히 ‘뒤쳐지기 않기 위해’ 꾸준히 달리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런닝머신보다는 결승선을 향해 달리는 걸 선호하죠. 가시적인 목표없이 그저 ‘인내’하는 노동은 현실에서 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아제라이트 방어구의 디자인은 라이트 유저들에게도 기회를 주자는 ‘좋은’ 의도에서 기획됐지만, 의도가 항상 결과를 담보하지는 않습니다. 디자이너들은 자신의 장비를(레벨과 무관하게) 언제나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고 싶어하는 플레이어의 기본적인 욕망을 이해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는 의도와는 정 반대의 효과 - 과중한 반복 플레이의 강요 - 를 낳고 말았습니다.
# 상충하는 기획 의도 – “그래서 자네는 하고 싶은게 뭔가?”
<격전의 아제로스>의 키워드는 ‘접근성 향상’입니다.
티어 세트의 삭제, 유물 무기 통폐합은 모두 신규/복귀/라이트 유저들에게 어필하는 요소가 분명해 보입니다. 다음 레이드를 가기 위해 이전 레이드의 티어 세트를 힘겹게 모을 필요가 없고, 특성을 바꾸기 위해 다른 특성에 또 유물력을 쏟아 부을 필요도 없죠. “할 게 너무 많다고? 줄여줄게!” 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제라이트 방어구는 여전히 ‘유물력 노가다’를 유도할 뿐 아니라, 라이트 유저들에게 충분히 쉽고 직관적이지도 못했습니다. 아제라이트 특성은 종류가 너무 많았고, 그 중에서 유저들에게 쓰임새를 인정받는 것, 좋은 성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소수였습니다.
소수의 아제라이트 방어구 중 다시 최상의 조합을 가진 3개 부위를 세트로 맞추는 일도 여전히 어려웠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제라이트 특성의 리셋은 대도시의 NPC에게만 가능했고, 반복할수록 더 많은 골드를 요구했습니다. 여러 직업 특성을 플레이하고 있다면, 차라리 여러 세트의 아제라이트 방어구를 가지고 있는 것이 최선이었습니다. 딜러용 한 세트, 힐러용 한 세트 하는 식으로 말이죠.
데이터베이스 사이트 블러드말렛.(Bloodmallet) 어떤 아제라이트 특성이 좋은지가 명확하게 알기 어려운 <격전의 아제로스>에서는 거의 필수가 됐다.
아제라이트 방어구는 ‘티어 세트 삭제를 통한 공격대 진입 장벽 해소’라는 과제에도 실패했습니다. 기껏 티어 세트를 대체하는 아이템으로 설계해놓고, 레이드에서만 나오는 아제라이트 방어구에 달린 일부 아제라이트 특성의 성능이 너무 높았습니다. 울디르에서 나오는 ‘티탄의 기록’이 대표적입니다.
티탄의 기록은 전투 중 캐릭터의 주 능력치를 증가시키는 버프를 자동으로 걸어주는 아제라이트 특성입니다. 전투 시간이 길어질 수록 높은 성능을 발휘해, 울디르 시즌 당시 많은 직업의 필수 특성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실제로 당시 ‘워크래프트 로그’의 기록을 보면, 많은 상위권 유저들이 티탄의 기록 특성을 2개, 많게는 3개까지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티어 세트는 없지만, 티어 세트가 진입 장벽이 되었던 이유 - 높은 성능과 독점성 - 은 그대로이고, 레이드에서 장비를 얻어야만 다음 레이드를 갈 수 있는 구조 자체는 변화하지 않았습니다. (밑에 얘기하겠지만, 아이템 레벨 높은 아제라이트 방어구를 레이드에서만 확정적으로 얻을 수 있다는 점도 이런 문제를 악화시킵니다.)
뿐만 아니라 아제라이트 방어구는 랜덤성이 주는 스트레스도 강화했습니다.
아제라이트 방어구의 획득처와 아이템 레벨은 매우 제한적이었습니다. 레이드 던전은 일정 수준의 아이템 레벨을 요구하고, 아제라이트 방어구는 아이템 레벨이 고정되어 있습니다. 계단식 성장이라 치더라도 계단이 너무 가파랐죠. 플레이어들은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 아제라이트 방어구에 해당하는 머리, 어깨, 가슴 부위를 제외한 나머지 부위에서 아이템 레벨을 최대한 끌어올려야 했습니다.
이때 플레이어들이 기댈 수 있는 것은 아제라이트 방어구를 분해할 때마다 얻는 ‘티탄 잔재’를 활용하는 갬블이나, <판다리아의 안개> 시절부터 도입된 ‘벼림’(아이템이 일정 확률로 원래 아이템 레벨보다 업그레이드되어 드랍되는 시스템)이었습니다. 모두 임의성에 기반한 성장 시스템이죠. 당연히 유저가 원하는 수준의 벼림이 뜰 확률은 낮았고, 그게 원하는 장비에 뜰 확률은 더더욱 낮았습니다.
아제라이트 방어구는 군단 전설이 준 교훈, ‘과도한 임의성은 이탈 요인이 된다’는 문제를 충분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쯤에서 정리해봅시다. 아제로스의 심장과 아제라이트 방어구는 라이트 유저의 부담감을 줄이는 방향으로 기획됐습니다. 모두 <군단>의 교훈에서 비롯한 것이죠.
그러나 아제라이트 특성의 조합은 라이트 유저에게는 여전히 복잡했고, 공격대 던전에서 드랍되는 아제라이트 방어구의 높은 성능은 공격대 던전의 새로운 진입 장벽으로 작동했습니다. 너무 다양한 특성 개수와 조합, 대도시 NPC를 찾아야하는 번거로운 리셋 과정은 세팅의 난이도를 가중시켰죠.
고레벨 아제라이트 장비를 레이드에서만 얻을 수 있다는 제한은, 평균 아이템 레벨을 높이기 위해 확률 낮은 '벼림'에 의존하게 만들었습니다. 즉, 랜덤성에 의존하는 <군단>의 문제가 강화했습니다.
아제라이트 방어구는 라이트 유저를 위한 새로운 시스템이 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기획 의도가 실제 설계로 이어지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아제라이트 방어구는 모두를 향한 독으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 웨이크레스트 저택, 왜이르케 만드셨어요?
무엇보다 <격전의 아제로스>의 낮은 완성도를 대표하는 부분은 바로 던전 디자인입니다.
잠시 <군단>으로 되돌아가보겠습니다. <군단>에서 처음 추가되어 극찬받은 ‘쐐기돌 던전’(Mythic+)은 일종의 던전 난이도 추가 모드입니다. 단순히 쉬움/어려움 정도의 구분을 넘어서, 1단계, 2단계, 3단계 등 점진적으로 올라가는 방식이죠.
수치가 증가해 몬스터가 강해지는 것 외에도 매주 다른 특수 효과가 던전에 적용됩니다. ‘접두사’(affix)라고 하죠. 주기적으로 바닥에서 화산이 소환되거나, 몬스터 하나가 죽을 때마다 주변 몬스터를 강화시키는 등 다양한 플레이 베리에이션을 제공하고 도전 정신을 고취합니다.
쐐기돌 던전은 매우 실험적이었지만 큰 성공을 거뒀고, 레이드와 함께 PvE 콘텐츠의 양대 산맥이 됐습니다.블리자드는 쐐기돌 대회까지 열면서 이 콘텐츠를 밀어주기 시작했죠. 당연히 <격아>에도 그대로 계승됐습니다.
변수가 추가됐다는 것은, 이를 고려한 밸런싱과 레벨 디자인이 추가로 요구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특히 던전은 <와우>의 핵심 콘텐츠 중 하나기 때문에 더욱 더 세심한 디자인을 필요로 합니다. <군단>의 던전은 애초에 쐐기돌 던전과 함께 기획됐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었죠.
하지만 <격아>의 던전 디자인은 완성도 차원에서 문제가 많아보입니다. 특히, 쐐기돌 접두사라는 변수를 고려하지 않은 디자인이 자꾸 눈에 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웨이크레스트 저택입니다. ‘저택’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이 던전은 실내, 좁은 통로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고, 여기에 자잘한 ‘잡몹’이 다수 배치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피웅덩이’라는 쐐기돌 접두사가 있습니다. 몬스터가 죽으면 바닥에 피웅덩이를 남기는데, 이 웅덩이 위에 있는 적은 계속 체력을 회복하고, 아군은 체력을 잃습니다.
피웅덩이 접두사가 활성된 주간에, 웨이크레스트 저택은 피바다가 됩니다. 안 그래도 좁은 공간에 온갖 작은 몬스터들이 바닥을 생성해버리니, 나중에는 복도 전체가 피로 가득 차 버리기도 하죠. 덕분에 모든 몬스터를 복도 밖의 공터로 유인해 잡는 것을 반복하는 번거로운 공략이 개발되기도 했습니다.
만약 쐐기돌 접두사가 충분히 고려가 됐다면, 웨이크레스트 저택의 작은 몬스터들은 피웅덩이를 만들지 않는 등 예외 조치가 들어갔어야 했죠.
다른 던전인 ‘썩은굴’도 비슷합니다. 썩은굴의 마지막 보스인 ‘풀려난 흉물’은 주기적으로 ‘썩어가는 포자’를 소환합니다. 이 포자들은 한번 죽이더라도 일정 주기로 되살아나 증식하므로, 시간이 지날수록 난이도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하는, 일종의 시간 제한 성격도 가지고 있죠.
쐐기돌 접두사 중 하나인 ‘폭탄’은 이 보스와 상극입니다. 이 접두사가 활성화된 주간에, 몬스터들은 일정한 주기로 허공에 뜬 폭탄을 소환합니다. 일정 시간 내 제거하지 않으면, 파티 전체가 피해를 입습니다.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상관이 없지만, 개체 수가 계속해서 증식하는 메커니즘을 가진 몬스터들은 폭탄을 소환하지 않거나 빈도가 낮도록 설계되어야 합니다. 폭탄을 모두 제거하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해지면 안되니까요.
풀려난 흉물이 소환하는 포자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포자는 완전히 제거할 수 없고 계속해서 증식하는 몬스터이므로 폭탄 접두사와 관련해 추가 조치가 있어야합니다. 그러나 어떤 조치도 없이 포자는 일반 몬스터로 간주됐습니다. 폭탄 주간에 썩은굴에 간 플레이어들은 그냥 ‘폭탄 세례’를 맞아야했고. 썩은굴의 난이도는 수직상승했습니다.
<와우> 팀은 빠르게 핫픽스를 적용했습니다. 의도되지 않은, 메커니즘의 오작동이 만들어낸 불합리한 난이도였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죠. 쐐기돌 접두사를 충분히 고려하고 던전을 디자인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일은 <격아> 초창기 반복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예컨대 화산 접두사는 폭탄 접두사와 동일한 문제점(몬스터 갯수 만큼 화산이 생성되어 피하는 것이 불가능해짐)을 가지고 있었고, 같은 문제가 일어났죠. 대체로 모두 QA 과정에서 잡혔어야하는 문제들이었고, 유저들은 ‘버그의 아제로스’라는 원색적인 비난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 신규 아닌 신규 콘텐츠 – 격전지와 잼… 아니, 군도 탐험
신규 콘텐츠에 있어서도 <격아>는 미진한 완성도를 보여줍니다. 격전지와 군도 탐험 말입니다.
격전지는 20인 PvE 콘텐츠입니다. 전쟁이라는 <격아>의 테마에 맞게, 전략 시뮬레이션인 <워크래프트 3>의 전투를 <와우>에 재현, 플레이어들은 한 명의 병사가 되어 전투에 참여하는 콘셉트입니다.
군도 탐험은 3대3 PvE 혹은 PvEvP로 진행할 수 있는 콘텐츠입니다. 누가 먼저 일정량의 아제라이트를 얻나 겨룹니다. 몬스터를 잡거나, 맵에 있는 오브젝트를 체크하면 아제라이트를 획득합니다.
이 둘은 모두 <격아>의 시그니처 신규 콘텐츠였습니다. 블리자드는 공식 홍보 영상을 만들기도 하면서 이들을 전면에 내세웠죠.
더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이, 이 둘은 신규 콘텐츠의 탈을 썼지만 실제로는 전혀 새롭지 않습니다. 군도 탐험은 ‘몰아잡기’라는 던전의 경험을 단순히 ‘다른 공간’으로 옮겨 놓았을 뿐이고, 격전지는 같은 것을 옆으로 넓게 늘린 형태죠.
실제로 격전지는 공격대 던전의 일반 몬스터 구간, 이른바 ‘쫄구간’과 거의 유사한 경험을 선사합니다. 다른 말로, 지루하다는 뜻이죠. 디자이너들은 단순히 <워크래프트 3>와 비슷한 전쟁 상태를 <와우>의 애셋을 활용해 구현하는데 모든 신경을 쏟은 것처럼 보입니다. <드레노어의 전쟁군주>에서 한 차례 목격했던 실수이기도 합니다.
이는 개발자 인터뷰 영상만 봐도 티가 납니다. 자신들이 격전지라는 환경을 어떻게 만들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는 자랑스럽게 늘어놓지만, 그래서 정확히 플레이어들이 어떤 경험을 할 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말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동기를 부여하고 새로운 게임플레이 경험을 만들 것인가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않았다는 의미도 되겠죠.
가장 아쉬운 것은 군도 탐험입니다. 3대3 PvEvP 전장은 분명 이전의 <와우>에 없었던 콘텐츠입니다. 잘만 설계했다면 <군단>에서 추가된 ‘쐐기돌 던전’처럼 새로운 고정 콘텐츠가 될 수도 있었겠죠.
하지만, 군도 탐험은 놀라울 정도로 애매한 방향성과 완성도를 보여줍니다. PvP를 고려하고 설계되었다기엔 긴장감을 유지하는 장치가 부족하고, 순수하게 PvE만을 고려했다면 굳이 3대3이라는 애매한 인원수가 될 필요가 없었죠.
중간에 기획이 바뀌었거나, PvP 콘텐츠에 대한 자신감이 부족했거나… 진실은 아무도 모릅니다. 분명한 사실은, 어쨌든 군도 탐험은 3명이서 몬스터 몰아잡기,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형태로 출시됐다는 것입니다.
단조롭고 의미없는 플레이로 구성된 군도 탐험은 고통스럽게도 <격아>의 핵심 콘텐츠 중 하나입니다. 많은 유물력을 주는 주간 퀘스트 때문이죠. 이처럼 성의없이 느껴지는 게임 디자인을, 유저들은 종종 밈으로 심판하곤 합니다. 이렇게요.
“저랑 잼도 탐험 하실 분?”
# 15년 역사의 전설적인 MMORPG, 낮은 완성도에 발목 잡히다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군단>은 하드코어한 확장팩. 따라서 <격아>는 라이트 유저 친화적 방향으로 급선회.
- 진입 장벽 해소를 위해 티어 세트, 유물 무기 삭제, 아제라이트 방어구 도입.
- 그러나 잘못 조정된 특성간 밸런스, 높은 파밍 난이도 등 문제로 라이트와 코어 유저 모두 불만족.
- <군단>서 호평받은 쐐기돌 접두사를 제대로 고려하지 않은 던전 디자인과 잦은 버그 픽스.
- 신규 콘텐츠인 격전지와 군도 탐험은 새로운 게임 경험 주지 못하고 몬스터 몰아잡기에 불과.
결론적으로, <격전의 아제로스>는 라이트 유저 지향적으로 만들어졌지만, 오히려 결함이 있는 아제라이트 방어구의 설계를 비롯해 전반적으로 낮은 완성도를 보여주면서 이도 저도 아닌 확장팩이 됐습니다. 직전 확장팩에서 고평가 받은 콘텐츠도 제대로 소화해내지 못했죠.
오래된 게임을 수 백 명으로 구성된 팀이 유지하고 다듬는 일, 동시에 새로운 콘텐츠를 제작하며 일관된 기조와 방향성을 유지하는 일은 분명 쉽지 않습니다. 그 작업이 연 단위로, 라이브 서비스와 병행해 이루어진다면 더욱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어려움을 감안하더라도 <격전의 아제로스>가 보여주는 모습은 실망스럽습니다. 무엇보다 우려스러운 것은 <와우> 팀이 유저 행동을 예측하는 능력(혹은, ‘플레이어’처럼 생각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디렉터 이언 해지코스타스가 <와우> ‘네임드 플레이어’ 출신임을 감안하면, 현재 <격전의 아제로스>가 보여주고 있는 모습의 함의는 더욱 무겁습니다.
지난 6월 말 ,<격전의 아제로스>는 앞에서 언급된 여러 문제를 개선하는 8.2 패치를 적용했습니다. <격아>는 과거 <와우>의 명성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기자이기 전에 한 명의 와우저로서 <격아>의 미래를 가늠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