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보면, 정말 아쉬운 인디 게임이 있다.
컨셉도 흥미롭고, 개발자가 보여준 방향성도 마음에 쏙 들지만, 콘텐츠가 빈약하거나 도통 정식 출시를 하지 않는 게임 말이다. 기자에게도 이런 인디 게임이 하나 있다. 2020년 2월 얼리 액세스로 출시된 <월드 오브 호러>다.
월드 오브 호러는 폴란드의 시간제 치과 의사 'panstasz'가 1인 개발한 호러 텍스트 어드벤처 게임이다. 로그라이트적 요소도 섞여 있어 게임 환경이 계속해서 변화하는 것이 특징. 플레이어는 랜덤하게 바뀌는 상황 속에서 무너지는 정신을 부여잡고, 미스터리를 해결하며 신화 속 존재들로부터 마을을 지켜야 한다. 그림판으로 만들어진 90년대 PC 게임을 생각나게 하는 흑백 그래픽도 눈여겨볼 만한 요소다.
설명만 들어서는 인상 깊게 다가오지만, <월드 오브 호러>는 부침이 많은 게임이었다. 출시 초기에는 얼리 엑세스의 한계인지 콘텐츠의 빈약함이 와닿았다. 몇 시간 정도면 게임의 모든 콘텐츠를 클리어할 수 있었다. 게다가 약 1년 동안 아무런 이유 없이 개발자가 콘텐츠 업데이트를 중단하기도 했다. 복귀 후 개발자의 코멘트를 보면 말할 수 없었던 사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식 출시 후 게임을 소개하고 싶었지만, 기삿거리를 찾던 어느 날 스팀 라이브러리 귀퉁이에 잠자고 있던 이 게임이 눈에 띄었다. 크툴루의 부름일까? 홀연히 키보드를 잡았다. 오늘의 기삿거리는 <월드 오브 호러>다. /디스이즈게임 김승주 기자
# 게임 소개 전에, 크툴루에 대해 알아봅시다.
<월드 오브 호러>는 '크툴루 신화'를 모티브로 만들어진 게임이다.
'크툴루 신화'는 미국의 작가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Howard Phillips Lovecraft)가 구축한 세계관이다. 이 신화는 인간이 대적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초월적 존재에 대한 공포를 다루고 있다.
그의 이야기에서 인간은 고대 신들에게 저항, 혹은 이해조차 할 수 없는 무력한 피조물일 뿐이다. 쳐다보기만 해도 이성을 잃을 수 있으며, 무력함, 역겨움, 두려움, 경외심을 주는 괴기한 고대 신들과 이에 맞서는 개인의 이야기는 많은 호러 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줬다.
크툴루 신화 (출처 : 유튜브 The Exploring Series)
그리고 크툴루 신화는 러브크래프트 사후 세계관에 대한 권리가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저작권이 불분명하다. 덕분에 '러브크래프트리안'(Lovecraftrian - 러브크래프트의 팬들을 지칭하는 단어)이 살을 붙이며 발전시킨 크툴루 신화는 문학, 나아가 서브컬처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게임도 예외는 아니다. 마이너한 인디 게임부터 메이저한 콘솔 게임까지 러브크래프트의 영향은 곳곳에 슬어 있다. 대표적인 예라면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크툰'이나 <블러드본>의 세계관을 들 수 있다. 인디 게임에는 <다키스트 던전>이 있다. 입에 촉수가 난 오징어 괴물이 등장하고, 이 괴물을 보기만 해도 정신이 나간다든지 하는 묘사가 나오면 십중팔구 크툴루 신화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봐도 좋다.
단순히 영향을 받는 것 외에도 크툴루 신화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게임 또한 많다. 초창기 포인트 앤 클릭(Point and Click) 어드벤처 게임이나, 1인칭 FPS로 개발된 <크툴루의 부름 - 지구의 음지>가 대표적이다. 시선을 2010년대로 돌리면 <더 싱킹 시티>나 <스테지언 : 레인 오브 더 올드 원>도 있다.
2019년 발매된 <더 싱킹 시티>. 크툴루 신화 기반 게임답게, 등장하는 몬스터들의 생김새가 꽤 징그럽다
# 인스턴트로 즐기는 크툴루 어드벤처
본론으로 넘어가자. <월드 오브 호러>는 크툴루 세계관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텍스트 어드벤처 게임이다. 외에도 일본의 공포 만화가 '이토 준지'의 영향을 받아 동양권의 도시 괴담을 섞어낸 모습도 등장한다. 배경부터가 1980년대 일본이다.
그림판으로 만들어진 1-BIT 흑백 그래픽 또한 인상 깊은 요소다. 고전 감성을 주는 그래픽과 칩튠 사운드 덕분에 <월드 오브 호러>의 분위기는 세계관의 80년대 분위기와 적절히 맞아떨어진다. 옵션을 통해 색감을 원하는 대로 바꿀 수도 있다.
개발자에 따르면 모든 그래픽은 윈도우 그림판으로 만들어졌다
게임의 기본적인 진행 방식은 텍스트 기반의 어드벤처 게임과 로그라이트 요소가 혼재되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원하는 지역을 마우스 클릭을 통해 탐험하며, 괴물이나 비이성적인 사건과 맞닥뜨려 정신력이나 체력이 0까지 떨어지면 사망한다. 외에도 파멸(DOOM) 게이지가 끝까지 차오르면 고대 신이 강림해 게임 오버된다. 파멸 게이지는 행동을 하거나, 특정 이벤트에서 나쁜 결과를 얻으면 상승한다.
엔딩을 보기 위해서는 랜덤하게 주어지는 5가지 미스터리를 해결해 열쇠를 모으고, 등대에 올라 최종 관문을 돌파해야만 한다. 많은 미스터리는 동양권의 도시 전설에 기반해 쓰였는데, 게임을 진행하다 보면 우리에게도 친숙한 '빨간 마스크'나 '빨간 휴지, 파란 휴지 이야기'가 변형되어 등장하기도 한다.
도시를 돌아다니며 미스터리를 탐사하자. 어디로 가야 할지는 친절하게 알려 주기 때문에 헤멜 일은 없다
우리에게 친숙한 괴담도 등장한다. 빨간 휴지 줄까? 파란 휴지 줄까?
로그라이트 게임이기에 플레이어 입맛에 맞춰 상황을 설정한 커스텀 게임을 만들 수도 있지만, '빠른 게임' 모드를 선택할 경우 게임의 모든 요소는 랜덤하게 정해진다. 예를 들어서 어떤 고대 신이 등장했느냐에 따라 플레이어가 받는 페널티가 달라진다. 판마다 풀어야 하는 미스터리의 종류도 항상 다르다.
조사 구역에 따라 이벤트도 랜덤하게 등장한다. 얼굴이 괴기하게 비틀린 수상한 사람과 마주치거나 알 수 없는 종교 집단이 어떤 제안을 해 오는 식이다. 미스터리한 현상을 마주쳤을 때마다 선택지가 주어지는데, 스킬 체크나 아이템을 통해 수월하게 넘어갈 수도 있지만 보통 운에 맡겨야 할 때가 많다. 운이 좋다면 이득을 얻을 수 있겠지만, 운이 나쁘면 끔찍한 일을 겪고 플레이어의 정신력이나 체력이 감소한다.
플레이어 입맛대로 커스텀 게임을 만들 수 있다
도시를 돌아다니다 보면 랜덤하게 이벤트가 발생한다
탐사하다 보면 전투가 발생하기도 하는데, 전투에 특화되지 않은 캐릭터를 선택했거나, 무기가 없는 게임 초반부의 경우 도망치는 것이 현명하다. 하지만 도망친다면 파멸 게이지가 큰 폭으로 올라간다. 어쩔 수 없이 전투해야 한다면 승패는 주어진 행동 포인트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렸다.
기본적으로 한 행동을 할 때마다 일정량의 행동 포인트를 사용하며, 포인트 최대치는 200이다. 예를 들어서 100의 행동 포인트를 소모하는 공격을 먼저 하고 나머지 포인트는 회피에 사용함으로써 괴물의 공격을 피할 수도 있다. 포인트 소모량은 캐릭터의 스테이터스와 무기의 무게, 그리고 특수 능력에 좌우된다.
전투 화면
때로는 '유령' 타입의 적의 적과 마주하기도 한다. 이 타입의 적들은 직접 공격할 수 없다. 플레이어는 '특수한 의식'을 실행함으로써 유령을 퇴마해야 한다.
특수 의식은 총 5회로 이루어진다. 전투에서 '의식 행동' 탭을 선택하면 '절하기'와 '손뼉 치기'가 있다. 기본적으로 의식은 박수를 5회 치면서 시작한다. 그러면 "당신의 행동은 N회 정확했다"라는 메시지가 뜨는데, 이 메시지에 따라 절하기와 박수를 섞어 올바른 행동을 해야 귀신을 퇴치할 수 있다. 올바른 다섯 가지 행동은 전투마다 항상 달라진다.
귀신 퇴마법 분기를 정리한 사진 (출처 : 월드 오브 호러 위키)
마지막으로, 로그라이트 게임이기 때문에 모든 콘텐츠를 해금하기 위해선 반복 플레이가 요구된다. 게임을 클리어하거나 특정한 행동을 함으로써 도전 과제가 완수되고, 도전 과제를 완수해야 새로운 아이템이나 캐릭터를 해금하는 식이다. 이런 반복 속에서 다양한 심령 현상과 마주하고, 미스터리를 풀어내는 것이 <월드 오브 호러>의 주된 목적이다.
# 1.0 좀 내 주세요!
아쉽게도 흥미로운 초반부가 끝나면, <월드 오브 호러>는 단순 반복 플레이만 남은 게임으로 전락한다. 1인 개발의 한계로 볼륨이 그다지 크지 않아 여러 랜덤 이벤트에 금방 익숙해져 버리기 때문. 손쉽게 엔딩까지 진입하기 위한 꼼수도 많다.
창발적인 플레이를 시도하려 해도 너무나 빠르게 올라가는 파멸 게이지 때문에 다른 길로 새기도 쉽지 않다. 가령 전투에서 주문을 사용하면 파멸 게이지가 오르는데, 페널티에 비해 메리트가 크지 않아 사용할 일이 적다. 로그라이트 게임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마지막 스테이지 진행 방식과 엔딩은 솔직히 말해 김이 샌다. 허무한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파멸 게이지는 진짜로 빨리 올라간다. 툭하면 이벤트로 추가로 올라가니 플레이어 입장에선 골치아프다
미스터리마다 퀄리티 편차가 크다는 것도 문제다. 진행 분기도 여러 갈래로 나뉘고, 진행 방식이 흥미로운 미스터리도 있지만, 단순히 조사만 하다 보면 허무하게 끝나는 미스터리도 있다. 가장 결과가 좋은 'A 엔딩'을 보더라도 진상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끝나 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다.
어떤 미스터리를 먼저 클리어하냐에 따른 분기도 있다. 그러나 이런 콘텐츠가 아직 제대로 구현되지 않았다는 것도 문제다.
가령 한 미스터리는 학교가 화재로 전소되면서 엔딩을 맞는데, 이후 학교에서 진행하는 미스터리를 진행하면 최종 보스가 불에 탄 채로 등장한다. 미스터리를 클리어하고 획득한 아이템을 다음 미스터리로 가지고 갈 수도 있다. 다만 이 정도 선에서만 그친다. 엔딩이나 전투 양상이 극적으로 변한다거나, 새로운 진상이 드러나거나 하는 요소는 없다.
명확한 서사와 구조를 가진 '시나리오 모드'에 대한 아쉬움도 있다. 로그라이트 방식보단 구체적인 묘사와 스토리 서술, 인물 묘사가 포함된 모드 말이다. 게임 모드 선택 화면에 시나리오 모드가 존재하긴 하지만, "짧은 모험"이라는 문구를 보면 볼륨이 그다지 크지는 않은 방식으로 준비 중인 것으로 보인다. 아직 자세한 내용은 밝혀진 바 없다.
흥미로운 미스터리도 있지만, 용두사미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시나리오 모드는 언제 추가될지 알 수 없다. 저 'Coming Soon' 이라는 문구조차 1년이 넘게 지났다
가장 치명적인 사실은 2020년 10월을 마지막으로 <월드 오브 호러>의 업데이트가 전혀 없었단 것이다. 활발하게 업데이트되던 개발자의 트윗도 2020년 12월을 마지막으로 멈췄다. 아무 예고가 없었기에 공식 디스코드에서는 개발자의 신상에 문제가 생긴 것 아니냐는 추측이 돌기도 했다.
공식 트위터는 약 10개월이 지난 2021년 10월에야 업데이트되었다. 개발자는 스크린샷을 통해 커스텀 미스터리 추가 등 신규 콘텐츠를 예고하면서 "정말 비참한 한 해였다. 곧 좋은 뉴스가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업데이트가 멈췄던 것으로 추측된다.
다음 대규모 업데이트에선 커스텀 미스터리가 추가될 것으로 보인다
# 언젠간 빛을 볼 수 있길
그래도, <월드 오브 호러>에는 아직 일말의 희망이 있다. 개발자도 복귀했으며, 누구나 간편하게 모드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간단한 프로그램 조작과 그림판을 다룰 수 있는 실력이 있다면 누구나 게임에 자신만의 이벤트를 추가할 수 있다. 모드 공유는 공식 디스코드에서 이루어지는데, 지금도 유저들이 모드를 간간이 업로드하고 있다. 개발자가 트윗에서 예고했던 대로 커스텀 미스터리 기능까지 추가되면 다시 유저 모드 제작이 활발하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개발자도 긴 침묵을 마치고 복귀했으니 2022년에는 완성된 <월드 오브 호러>가 출시되길 기대해 본다. 다른 게임에서 쉬이 찾기 힘든 그래픽과 독특한 콘셉으로 주목받았던 게임인 만큼, 미완성 게임으로 기억에서 잊히기엔 너무나 아쉽다.
유저가 개발한 모드 중 하나. 형이 거기서 왜 나와? (출처 : 공식 디스코드)
2022년에는 게임이 완성되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