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변하는 환경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파악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TIG 룩백' 코너에서는 업계 전체에 도움이 될 만한 경험과 인사이트를 가진 개발사들의 발자국을 톺아보며, 그들의 등 뒤에 남겨진 살아있는 이야기들을 전해드리려 합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누군가와 함께 할 때 나는 시너지도 분명 있다. 하지만 '공동의 목표를 위한 합심과 협업'이라는 게 말처럼 쉽진 않다. 괜히 대학생들이 조별과제를 기피하는 게 아니고, 적잖은 직장인들이 이유 없이 사표를 가슴에 품고 사는 게 아니다.
어떤 리더와 구성원이 모여야 좋은 조직 문화를 만들 수 있을까. 최근 많은 화제가 됐던 방송 <흑백요리사>의 팀 미션을 보며 사람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엇갈렸다. 역시 리더가 방향을 모두 정하고 카리스마 있게 이끌어야 해. 아니 각자의 특장점을 살리지 못하면 팀 전체가 침몰해. 정답이 있는 논쟁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방송에선 '카리스마'의 미덕이 좀 더 강조되었기에, 방영 직후 목소리를 높여야겠다(?)는 다짐을 하던 리더들을 적잖게 봤다.
한편, 게임사의 경우 결국 주목 받는, 신선한, 재밌는 게임을 만들어야 생존 가능성이 높아진다. 지난 1편에선 AI를 활용하는 렐루게임즈가 가히 충격적이라 표현할 만한 두 게임 <즈큥도큥>과 <스모킹 건>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소개했다. 2편에서는 실험적 조직인 렐루가 탄생하게 된 배경을 살펴봤다. 마지막화인 3편에서는 어디에도 없던 아이디어가 출시까지 이어질 수 있던 렐루만의 조직 문화를 소개하려 한다.
렐루의 게임을 모르거나, 해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이 글은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사회적 관계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없으니까 말이다. /기고=렐루게임즈 김민정 대표, 서문 및 편집=디스이즈게임 김승준 기자
[TIG룩백 렐루게임즈 포스트모템 3부작]
① 화제의 작품 '즈큥도큥'과 '스모킹 건'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바로가기)
② 당신이 몰랐을 렐루게임즈의 뿌리, '스페셜 프로젝트 2' (바로가기)
③ "발언권은 모두에게, 결정은 빠르게, 변화엔 유연하게" (현재 기사)
[딥 러닝으로 새로운 게임 경험을 만든다]. 이 문장에 대한 구체적인 예시를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렐루게임즈 내부에서도 마찬가지다.
일반적인 게임 스튜디오들은 한두 명의 코어 리더들에 의해 움직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정 분야에서 전문가 이상의 경험과 뛰어난 리더십을 갖춘 리더들이 게임의 비전과 방향을 제시하고, 스튜디오 구성원은 그에 따라 게임 제작 실무를 진행하게 된다. 완전히 일반화 할 수는 없겠지만, 게임이 먼저 정해지고 조직이 따라오는 경우가 조금 더 많다.
이에 반해 렐루에는 그런 슈퍼 비전을 가진 리더는 없다. 무엇을 만들지 정하는 사람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의미이다. 이유는 명확하다. 첫째, 전례가 없고 사례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금 먼저, 조금 더 많이 고민한 사람은 있을지 몰라도, 그 누구라도 아이디어 레벨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둘째, 딥 러닝의 특성상 직접 만들어보기 전에는 그것이 구현될지 안 될지를 짐작하기 어렵다.
그런 이유로, 렐루의 극초기 준비 단계에서 우리가 집중한 일은 [이제 우리가 뭘 만들고 싶은지 생각해 봅시다]였다. 그렇게 판이 깔렸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렐루 안에 쌓여 있는 아이디어는 80여 개가 조금 넘는다.
그렇게 탄생한 아이디어들을 선정하는 기준은 세 가지다. ▲ 새로운가 ▲ 재미있나 ▲ 딥 러닝이 없으면 안 되나. 우선 순위는 따로 없고, 무엇 하나 빠져선 안 된다. 그리고 이 기준을 넘는지-에 대한 판단은, 구성원들의 공감대의 크기를 가장 많이 고려한다.
아이디어가 선정된 이후에는, 해당 아이디어에 대한 '의지'를 가진 사람이 일을 추진한다.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할 구성원을 모으고, 일정을 잡고, 제작에 착수한다. 이 지점부터는 PD가 지정되고, PD의 리더십에 따라 프로덕션이 본격화되는 것이다. PD는 회사의 방향성과 얼라인해서 게임의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는 지점까지 개발을 이끌고 갈 책임과 권한을 가진다.
렐루게임즈에는 이 모든 과정에 별도의 직군/직급 등의 자격 조건이 없다. 우리의 기준을 넘고, 구성원들을 설득하고 제작을 완수해낼 수 있다면, 누구나 도전할 수 있다.
앞서, 여러 이유로 '게임을 만들어봐야 안다'고 언급했다. 그래서 프로젝트 착수 이후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빠르게 코어 플레이를 확인할 수 있는 지점까지 가는 것이다. 딥 러닝과 붙은 아이디어가 어떤 식으로 구동되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우리는 이 기술적 상상을 실천하기 위해서, 잦은 빌드 공유와 모두가 참여하는 플레이 테스트를 지향한다. 빌드를 공유하는 과정에서 구성원들은 프로젝트가 방향을 잃지 않고 잘 나아가고 있는지, 얼마나 진척되었는지 등을 공유 받을 수 있다.
당연하게도 많은 프로젝트는 실패한다. 외부로 공개되지 못한 채 중단된 프로젝트도 많다. 해당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 구성원들이 먼저 "GG" 선언을 할 때도 있고, 과몰입이 되어 있는 경우 다양한 경로의 대화와 소통으로 스스로의 한계를 볼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받을 때도 있다. <스모킹 건>의 모태가 된 전설의 망작 <데몬>의 경우, 빌드 공유 바로 다음 날 PD가 직접 그만두겠다는 선언을 하기도 했다.
작다고 실패가 아프지 않은 건 아니다. 기획서를 쓰고, 코드를 짜고, 콘셉트를 잡아서 움직이게 만들어내는 과정을 조금이라도 해보신 분들은 잘 이해하실 것이다.
내 손으로 만들어낸 자식 같은 어떤 물건을, 그냥 버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전체를 고려했을 때, 이 나무가 아니라는 걸 알지만 그 나무를 베어버리는 결정과 행동은 쉽지 않다는 것을. 나무에 몰입했다가 금방 숲으로 나와서 전체를 보고 다시 나무를 봐야 하는 방식으로, 인지와 사고의 범위를 넓혔다가 줄이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도 몹시 고통스러운 일이고.
렐루에서는 이 과정을 가능한 평범하게 다루려고 노력하고 있다. 구성원들도 한 프로젝트가 마무리되면 "FA 시장에 나왔다"라고 하고, 다른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제가 취업을 하게 됐어요"라고 담담하게 받아들이려는 노력을 함께 했다.
우리의 길에는 이 방식이 맞다는 것을 모두가 이해하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믿는다. 때로는 빠른 전멸이 더 큰 승리를 위한 지름길이라고 믿는다.
최근 빅테크들 간의 경쟁이 심화되면서, 인공지능 분야의 발전 속도는 가히 눈부신 수준이다. 전체 산업에 영향을 미칠 범용적인 인공지능은 말할 것도 없고, 특히 게임 분야에 관심을 가진 빅 플레이어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현재는 게임 업계와 함께 성장해온 Nvidia와 MS가 두각을 나타내고 있지만, 게임 엔진을 보유한 Unity 또한 인공지능 기능을 강하게 푸시하고 있고, 중국의 빅 플레이어들 역시 조용히 이 경쟁에서 뒤쳐지지 않는 성능과 성과를 거의 매주 선보이고 있다. 가상 세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시뮬레이션이라는 관점에서, 또한 현실을 반영하되 실질적 리스크가 덜하다는 측면에서, 거대한 원천 모델과 솔루션을 기반으로 넥스트 플랫폼을 노리는 빅테크에게 '게임'은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4년 전 이 여정을 시작한 시절부터 지금까지, 렐루는 소위 SOTA(State of the Art, 현시점 최고 수준의) 기술과 최신 논문들을 빠짐없이 쫓고 있다. 누구보다 빠르게 소식을 접하고, 직접 사용해보고, 기존의 개발된 내용들을 뒤엎어야 하는 의사 결정을 자주 마주하게 된다.
생성형 AI 중에서도, 특히 이미지 생성은 상대적으로 직관적이며 대중적으로 퍼진 것처럼 보이는 기술 중 하나다. 하지만, 이를 전문가 급으로 이용하기 위해서는, 기존에 자신이 가진 지식과 경험을 내려놓고, 매일 소개되는 새로운 기술과 기법들을 익히기 위해 힘쓰지 않으면 안 된다.
렐루는 이 모든 과정이 습관처럼 정착되어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이를 자연스러운 문화로 만들고, 새로운 것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되도록 솔선수범하며 이끄는 리더들이 있다. 그 리더들의 보이지 않는 노력들 덕분에, 렐루에는 '세미나'라는 이름의 방대한 자료가 축적되고 있고, 앞서 가고자 함께 학습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런 이유로 렐루 전체가 모이는 모임에서 늘 강조되는 단어가 있다. 바로 [변화]다. 신기술로 새로움을 쫓겠다고 모인 이상, 우리는 늘 변화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고, 유연해야 한다. 그런 이유로 렐루 안에서 장기 계획의 최대치는 6개월이다. 모든 팀이 마일스톤을 확인하고 다음 스텝을 확인하는 호흡은 1~2개월이다. 1년 이후의 계획은 없다. 1년 뒤 인공지능 업계는, 아마도 전혀 다른 새로운 ERA를 맞이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운칠기삼]. 게임은 실패를 잘 흡수해야 하는 흥행 산업이고, 게임이 많은 고객들에게 사랑 받는 좋은 결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운'이 절대적이라는 속설이 있다. 시장, 고객, 기술 모두를 포함한 세상이 변해가고 있기 때문에 '타이밍'이 전부라는 말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2024년의 렐루는 운이 좋은 한 해를 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분사 직전 챗GPT가 세상을 뒤흔들면서, AI 기술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주제로 다뤄졌고, 이 타이밍에 미리 잘 준비되어 있던 렐루의 게임들은, 그 파도를 타고 많은 관심과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새로움'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낯섦'이라는 장벽까지는 아직 다 뚫어내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크다. AI 콘텐츠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아직 이뤄지지 않았고, 막연한 거부감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올해 초 스팀에서도 AI로 생성된 콘텐츠에 대한 배포를 잠시 금지했던 시기가 있던 것처럼, 세상은 생각하고 소화할 시간이 필요하다.
게임을 사랑하는 일반 게이머들에게 렐루의 게임들이 아직은 낯설다는 숙제도 있다. 길이 없는 길을 만들어야 하는 최전선에 있는 만큼 어려움도 크다.
렐루게임즈는 우리의 현재를 Activation Phase(활성화 단계)라고 정의했다. 딥 러닝의 ReLU 함수를 사명으로 채택하면서 생각했던 의미가 제대로 작동하는 것이다.
음수를 0으로 치환해서 뱉는 ReLU 함수처럼, 실패와 좌절이 우리를 갉아먹지 않도록 노력했다. 음수의 입력은 아직 활성화가 되지 않았을 뿐, 숫자와 0 사이 그 차이에 해당하는 모든 레슨들을 흡수했다.
다음에 언젠가 강한 양수의 입력 신호가 왔을 때, 그것을 그대로 뱉어내는 렐루 함수처럼, 우리도 이제 곧 활성화가 된다는 믿음으로, 스스로를 '활성화 단계'라고 정의했다.
세상에 이정표를 세운다는 것은 외로운 일이다. 아직 한국은 물론 글로벌 전체에서도, AI가 게임 업계에서 가져올 미래에 대한 비전을 우리처럼 확실하게 세우고 있는 곳은 흔치 않다. 다만, 우리는 아주 조금 앞서 있을 뿐, 경쟁은 곧 일어날 것이고, 순식간에 또 다른 플레이어가 등장해 주인공의 자리를 꿰차는 것 역시, 게임 업계의 역사를 보건데 쉽게 예측할 수 있는 일이다.
그 길에 렐루가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는 아직 모른다. 우리는 우리의 길이 (허탕이 되지 않을) 불가역적인 미래를 향하고 있다는 굳은 믿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이 기회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저 오늘의 하루하루에 최선을 다해 후회를 남기지 않도록 노력할 뿐이다.
가까운 미래에 온전히 '활성화'되어 반짝반짝 빛나는 렐루를 꿈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