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하기 전부터 계속 일해왔던 아내는 회사를 그만 둬야 한다는 것에 시원섭섭한 표정이었다. 그래도 가족이 함께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게다가 가족들 모두 미국 생활에 호기심을 갖고 있어 별 탈 없이 이사를 결정할 수 있었다.
한국의 짐은 아내가 챙기고 미국의 집과 차는 내가 알아보기로 역할을 나눴다. 나는 가족들보다 먼저 미국으로 들어와서 살 집을 구하러 다녔다.
일단 회사 근처의 아파트를 둘러 보았다. 내가 미국 아파트를 살펴보면서 느낀 첫 인상은 지은지 너무 오래돼 낡았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우리나라처럼 벽돌에 시멘트로 단단하게 지은 아파트도 아니라, 밖에서 보면 금방 무너질 듯 위태로워 보이는 나무로만 지은 아파트가 많았다.
그런데도 월세도 엄청나게 비쌌다. 미국의 아파트 렌트 시스템은 한국과 많이 달라 건설회사가 아파트들을 소유하고 있었다. 즉 아파트의 주인인 건설회사에서 입주자들에게 임대를 주는 구주였다. 그리고 한국에서 흔한 전세는 없었고 오직 월세만 있다.
보증금 체계도 달라서 보통 한달 정도의 월세만 미리 보증금 형식으로 지불한 다음, 매달 꾸준히 월세를 지불하면 된다. 또한 이곳 아파트는 좀 괜찮은 곳은 세탁기, 건조기, 냉장고 등이 이미 갖춰져 있다.
미국의 아파트는 한국의 아파트와 많이 달랐다. 전세 개념도 없고 보증금도 따로 필요 없다.
이곳 저곳 아파트를 둘러보는데 마음에 드는 곳이 없었다.
아내와 한국에서 인터넷을 통해 봤던 괜찮다 싶던 아파트들도 실제로 와서 보니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더욱 화가 났던 건 내가 신용도(Credit)가 부족하기 때문에 돈을 지불하더라도 임대를 해줄 수 없다는 경우였다.
미국은 모든 것이 개인 신용도를 기본으로 운영되는 사회여서 아무리 회사의 대표라고 해도 그 사람의 신용도가 낮으면 사회생활을 영위하기 힘들다. 그렇게 며칠을 보낸 후 간신히 후보 아파트를 정했다.
아파트를 간신히 계약하고 나니 이제 차가 문제였다. 미국에서 신용도를 가장 빨리 쌓는 방법 중 하나가 차를 할부로 구입하는 것이라고 현지 사람들에게 들었기 때문에 나도 차를 할부로 사야겠다고 결정했다.
한국과 달리, 미국에서는 차를 사면 주차장에 있는 차 중 한 대를 바로 준다. 자동차를 사러 가는 날 바로 차를 몰고 집으로 올 수 있는 곳이 미국이었다.
미국에서는 차를 사면 주차장에서 바로 차를 건네준다
‘오늘이면 나도 차가 생기겠구나’ 하는 들 뜬 마음으로 YJ와 함께 자동차 매장에 갔다. 테스트 드라이브도 해보고 색깔도 정한 후 영업사원에게 이 차를 일부는 바로 현금으로 지불하고 나머지는 할부로 구입하겠다고 말했다. “문제없다(No problem)”고 말한 영업사원은 우리를 할부 담당사원에게 데리고 갔다. 허나 거기서 뜻 하지 않은 문제가 생겼다.
할부 담당사원이 내 이야기를 쭉 듣더니 나에게 “너는 신용도가 없어 할부를 못한다”라고 말한 것이다.
정말 당황스러웠다. 그 날 장장 4시간이 넘게 걸려 차종을 고르고 흥정을 해서 결국 사기로 마음을 먹었는데 여기서 안 된다니 말이다. YJ가 몇 차례 설득을 해봤지만 할부 담당사원은 확고했다. 현금을 다 주고 사야만 가능하고 할부는 안 된다고 그는 말했다. 기분이 몹시 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생각해보면 미국은 좀 이상한 시스템을 가졌다. 신용도를 쌓으려면 할부로 차를 구입해야 하는데 신용도가 없으면 차를 못 사니 말이다. 그런 일을 겪고 나서 미국에서 차 사고 싶은 마음이 뚝 떨어졌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차를 빨리 사야만 했다.
미국에서는 차가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가족들도 곧 도착하고, YJ에게 신세를 너무 많이 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화로 나의 상황을 설명하고, 그래도 차를 팔겠다는 곳에 가서 아주 높은 금리를 주고 가족들이 도착하기 바로 전날 겨우 차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드디어 아내와 아들 준이가 도착하는 날. 나는 들뜬 기분으로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마중나갔다. 비행기 도착 메시지가 나오고 잠시 후 아내와 준이가 입국 게이트를 통해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그때서야 진짜로 실감이 났다. 이제 더욱 책임감 있게 이곳 미국에서 사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가슴 속까지 와 닿았다.
아내가 도착한 날 저녁 우리는 식탁도 없이 TV 상자 위에서 햇반으로 저녁을 먹었지만 아내가 해준 저녁은 기가 막히게 맛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