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연재, 이것이 TRPG다] 컴퓨터 RPG의 선조지만, 한국에서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TRPG. 디스이즈게임이 TRPG의 역사와 한국 TRPG의 변천사를 들어보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15년 동안 한글 TRPG만 출판해온 ‘도서출판 초여명’의 김성일 편집장이 소개하는 한국 TRPG 이야기를 들어 보시죠.
<던전앤드래곤>(Dungeons and Dragons, 이하 D&D)은 출간 직후, 유행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한 호응을 누렸다고 기억합니다. 중고등학교에서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TRPG를 하는 학생들에 관한 이야기를 적지 않게 들었습니다. TRPG 하기 좋다고 소문이 난 서울 시내 몇몇 카페들은 주말에 가면 서너 팀씩 자리를 잡고 있기도 했습니다. 패스트푸드점에서 주사위를 굴리는 사람들을 우연히 목격한 일도 몇 차례 있습니다.
PC 통신 서비스에 정식 TRPG 동호회가 생긴 것도 <D&D> 출간을 전후해서입니다. 인터넷이 별로 쓰이지 않던 시절, 나우누리, 천리안, 하이텔 등의 TRPG 동호회들은 TRPG 팬들을 집결시키고 노하우를 공유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습니다. TRPG는 친구들끼리 모여서 플레이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동호회에서 팀원을 모집해서 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D&D> 출간 직후는 아니지만, 나중에는 일간신문과 주간지에도 관련 기사가 났습니다. 심지어는 TV에서 관련 다큐멘터리를 방영하기도 했습니다. 새롭고 신기한 TRPG라는 취미가 순풍에 돛을 달았고, 외국처럼 일반화되는 것도 금방이라고 당시의 많은 사람은 생각했습니다.
이 작은 붐이 가능했던 첫 번째 이유는 <D&D>를 출간하던 커뮤니케이션 그룹이 <게임 매거진>에 TRPG 코너를 마련하여 뒷받침해 준 것입니다. 전국에 배포되는 잡지에 매달 수십 페이지의 광고가 나간 셈이니 그 효과는 무시할 수가 없었습니다.
더불어 간과할 수 없는 큰 이유는 1995년 당시 <D&D>와 경쟁할 만한 놀이가 많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디아블로>가 나온 것이 2년 후인 1997년, <스타크래프트>가 나온 것이 1998년입니다. 심지어는 보드게임조차도 알려진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당시에는 친구들과 같이 놀 거리를 찾을 때 TRPG의 경쟁력이 지금보다 훨씬 강했습니다.
<게임매거진>을 통해 연재된 TRPG 리플레이 <천일모험기>
하지만 그 경쟁력은 금세 사라졌습니다.
컴퓨터 게임이 TRPG 시장을 잠식하는 것은 세계적인 현상이었습니다. 비단 한국에서만 일어난 일은 아닙니다. 단지 한국 TRPG계가 여기에 특별히 취약했던 이유를 하나 들자면, 제 생각에는 이렇습니다. 급속한 IT 기술 발전, 게임 콘솔의 저변 확대, 인터넷 멀티플레이어의 일반화가 일어난 시점에서 미국이나 일본은 이미 TRPG의 팬층이 두터웠습니다. 반면 한국 TRPG는 이제 막 기지개를 켜고 시작하려는 참에 인터넷, 컴퓨터∙콘솔 게임, PC방, 외환위기라는 악재를 동시에 맞이했습니다.
게다가 그때까지 한국에 소개된 TRPG는 컴퓨터 게임에 대체되기 쉬운 형태를 하고 있었습니다. <D&D>는 미니어처 워게임 <체인메일>(Chainmail)에서 파생된 작품입니다. 최초의 <D&D>는 개인 단위 전투를 위한 게임이었고, 던전에 들어가 괴물을 잡고 보물을 얻어 성장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D&D>만이 아니라 초기 TRPG가 대체로 그랬습니다.
<D&D>의 모태인 <체인메일>은 전투 자체에 초점을 맞춘 미니어처 워게임이었다.
지금은 풍부한 세계 설정, 입체적인 인물 묘사, 자유로운 진행 같은 것이 TRPG의 특징이라고 이야기되지만, 그런 것은 80년대 중∙후반에 비로소 본격적으로 퍼진 생각입니다. TRPG 초기에 개발자들이 주로 염두에 둔 것은 전투와 성장에 관한 기계적인 룰이었습니다. 컴퓨터 게임에 따라 잡히기 쉬운 조건이었습니다.
한국에 소개된 <D&D 초중급 세트>는 그런 TRPG 초창기의 경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세계 설정도 얼마 없었습니다. 캐릭터도 전투 관련 수치가 한 줌 있을 뿐이어서, 복잡한 사정을 가진 주인공을 원하면 임의로 자기소개서를 쓰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엇이든 할 수 있어서 자유롭다고는 하지만, 그 자유로움에 동기와 인과관계, 맥락을 부여해 주는 설정이나 룰은 별로 없었습니다. 던전에서 괴물과 싸우는 것 외에는 사실 마련된 자료가 많지 않았던 것입니다. 물론 D&D에도 ‘미스타라’(Mystara)라는 세계가 있습니다.
<D&D 초중급 세트>에 그 설정 일부가 들어 있었지만 분량은 많지 않았습니다. 반면 미국에서 출간된 미스타라 설정집은 소책자 10권이 넘었습니다. 당시 서양의 주류 판타지 RPG였던 <어드밴스드 던전앤드래곤>(Advanced Dungeons & Dragons, 이하 AD&D)은 미스타라보다 풍부한 세계 설정을 몇 가지나 갖추고 있었고, 이런 세계들을 무대로 다수의 소설과 컴퓨터 게임이 만들어져 호평받기도 했습니다.
<발더스 게이트>, <아이스윈드 데일>, <플레인스케이프: 토먼트> 등이 모두 <AD&D>의 여러 세계에서 벌어지는 게임입니다.
<AD&D>의 세계 중 하나인 ‘포가튼 렐름’을 배경으로 한 <발더스 게이트> 시리즈.
1996년에는 ‘미즈노 료’의 소설 <로도스도 전기>의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일본 TRPG <소드 월드 RPG>(ソード・ワールドRPG)가 한국어로 번역되어 나왔습니다. 이 역시 커뮤니케이션 그룹에서 출간되었습니다. 이쪽은 비교적 잘 알려진 소설과 애니메이션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면에서 <D&D>보다 약간 사정이 나았습니다.
그러나 <소드 월드 RPG>도 일본에서는 엄청난 양의 리플레이, 설정집, 시나리오집 등을 통해 확립된 세계를 갖추고 있었던 반면,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나온 것은 기본 룰북 한 권과 상급 룰북 두 권, 그리고 시나리오집 두 편뿐이었습니다.
TRPG를 잠시 재미있게 하다가도, 모자라는 자료 때문에 한계에 부딪히고 흥미를 잃는 사람들을 저는 적지 않게 보았습니다. 그러면 <AD&D>를 냈으면 좋았을지? <D&D> 설정집을 더 냈으면 좋았을지? <소드 월드 RPG> 책을 많이 냈으면 사정이 달랐을지?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보았을 때, 당시 한국의 TRPG계는 그런 거대한 TRPG 라인을 소화할 수 있는 규모가 되지 못했습니다. 시장이 작으면 출간되는 책이 적을 수밖에 없다는 현실, 그러면 기반이 성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축소되는 악순환이 한국 TRPG의 비극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들을 돌이켜 보면, 당시의 짧은 TRPG 붐은 그보다 지속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런 어려운 환경에서도 TRPG를 하는 사람들은 불씨를 꺼뜨리지 않으려고 이런 저런 노력을 해 왔습니다. 그 중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이 한 가지 있으니, 바로 ‘RPG 컨벤션’이라는 연례행사입니다. 다음 회에는 여기에 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로도스도 전기>의 배경인 ‘로도스 섬’은 <소드 월드 RPG>의 세계인 ‘포세리아’의 일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