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TRPG다] 컴퓨터 RPG의 선조지만, 한국에서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TRPG. 디스이즈게임이 TRPG의 역사와 한국 TRPG의 변천사를 들어보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15년 동안 한글 TRPG만 출판해온 ‘도서출판 초여명’의 김성일 편집장이 소개하는 한국 TRPG 이야기를 들어 보시죠.
‘RPG 컨벤션’은 PC 통신(하이텔, 나우누리 등) TRPG 동호회에서 모인 사람들의 자원봉사로, 관련 기업의 후원금, PC 통신 서비스의 보조금, 그리고 관람객 입장료를 받아 1997년 1월에 처음 열렸습니다. 그 뒤로 8년 동안 매년 개최됐죠. 그 목적은 TRPG의 다양성을 알리고 동호인들이 서로 교류하는 것이었습니다.
RPG 컨벤션 1회는 하이텔 본사 회의실을 빌려서 조촐하게 열렸습니다. 하지만 2회부터는 거평프레야, 과천시민회관과 같은 본격적인 행사 공간에서 꽤 번듯한 규모로 개최되었습니다. 행사 기간은 2~3일 정도였는데, 사람이 많았던 시절에는 연인원이 2,000 명을 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1997년부터 2005년까지 개최된 RPG 컨벤션.(이미지 출처: RPG MOOK 1호)
RPG 컨벤션의 기본 테마는 평소 TRPG를 하는 여러 팀이 행사장에 부스를 열어 보유한 자료를 전시하고, 각 팀에서 마스터를 내보내 입장객들의 신청을 받아 플레이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행사장 벽을 따라서는 부스가 진을 치고, 가운데에는 테이블과 의자가 여럿 배치돼 실제 플레이를 할 수 있는 장소로 쓰였습니다.
여기에 강의나 라이브 액션 RPG(TRPG의 변종. TRPG는 테이블에 앉아서 대화로 플레이하지만, 라이브액션 RPG는 분장과 실제 연기를 통해 플레이한다) 같은 중앙 행사도 곁들여졌고, 관련 업체가 부스를 내거나 주최 측에 상품을 위탁하기도 했습니다. TRPG 책은 물론 판타지 및 SF 서적들도 진열되어 팔렸습니다. 팀들은 자료를 전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회지를 내거나 기념품을 팔기도 했습니다.
1998년 개최된 2회 RPG 컨벤션 전경.(이미지 출처: RPG MOOK 1호)
1997년 당시 한국에 나온 TRPG 시스템은 <던전앤드래곤>과 <소드월드 RPG> 2종밖에 없었으며, 그나마도 둘 다 서로 비슷한 종류의 판타지 배경이었습니다. 관련 서적의 수도 한 손에 꼽을 정도였습니다. 그런 현실에서, RPG 컨벤션은 소문으로만 들려오던 여러 TRPG 시스템과 관련 자료를 볼 수 있는, 그리고 이런 시스템으로 실제 플레이를 해 볼 수 있는 뜻깊은 행사였습니다.
지난 회에서 언급된 <어드밴스드 던전앤드래곤>(Advanced Dungeons & Dragons, 이하 AD&D)을 플레이하는 팀도 있었습니다. <AD&D>의 아성을 무너뜨리고 90년대를 휩쓴 <월드 오브 다크니스>(World of Darkness)를 주로 플레이하는 팀도 있었고요. 범용 시스템 <GURPS>(겁스)도 잘 알려졌었고, 일본 작품을 즐겨 쓰는 팀도 있었습니다.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시스템이어야만 의미가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TRPG는 팀 단위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 팀의 플레이에만 집중하고 있으면 다른 가능성을 상상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RPG 컨벤션에서는 팀의 회지나 플레이 이벤트를 통해, 자기가 이미 잘 알고 있는 TRPG 시스템이 다른 팀에서는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비록 수는 많지 않았지만, 컨벤션은 한국의 창작 TRPG가 발표되는 장이기도 했습니다. 이 중 유명한 것으로 조선풍 조정에서의 권력 다툼을 그린 <적전>(赤典)과 고전 추리 시스템 <대저택>이 있습니다. 이 두 작품은 후에 온라인으로 배포됐기 때문에, 지금도 쉽게 읽어 볼 수 있습니다.
조선과 유사한 국가에서 벌어지는 권력 다툼을 소재로 한 국산 창작 TRPG <적전>. 이미지는 온라인으로 배포된 공개 버전의 일부.
RPG 컨벤션은 당시 TRPG를 하는 많은 사람에게 희망의 상징이었습니다. 여기에 오면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 수백 명 있었습니다. 여기에 오면 모르는 것을 알 수 있었고, 보지 못하던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강사로 참가한 적도 있지만, 주로 기업 부스에 앉아서 저희 회사, 도서출판 초여명의 부스를 지켰습니다. RPG 컨벤션은 저희에게는 신간을 소개하는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천을 덮은 작은 책상 위에 새 책을 쌓아 놓고 앉아서 관람객들을 보고 있노라면 마냥 즐거웠습니다. 아는 사람도 모르는 사람도, 다 동지라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러나 RPG 컨벤션도 3~4회를 정점으로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다가 2005년을 끝으로 더는 열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인터넷의 확산에 따른 PC 통신 동호회의 위축입니다. RPG 컨벤션은 인력과 자금 확보도, 실무자들의 의논도, 대중의 의견 형성도, 모든 것이 PC 통신 동호회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PC 통신 서비스 체제가 붕괴하자 집을 잃은 동호회들은 구심력을 유지할 수 없었고, PC 통신 동호회의 연합 행사였던 RPG 컨벤션도 힘이 빠졌습니다.
인터넷 시대에도 RPG 컨벤션 홍보는 계속 되었으나, 초창기만큼의 영향력을 보여주진 못했다.
둘째는 역시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TRPG 관련 정보를 접하기가 훨씬 쉬워졌다는 것입니다. 국내외의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자, TRPG의 다양성을 알린다는 RPG 컨벤션의 중요한 취지가 퇴색한 것입니다. 이것은 TRPG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일이었지만, RPG 컨벤션만 놓고 보면 악재였습니다.
셋째는 홍보의 어려움입니다. TRPG 홍보의 가장 큰 통로였던 <게임매거진>이 2000년경 폐간되었습니다. 컨벤션을 알릴 길은 막 생겨난 인터넷 포털 카페, 그리고 수명이 다해가는 통신 동호회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요즘이라면 SNS라는 방법도 있었을 테지만 당시에는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넷째는 콘텐츠 공급의 어려움입니다. 컨벤션에 볼거리를 공급하는 것은 주로 부스를 낸 팀이었는데, 많은 팀이 플레이 테이블보다는 회지나 소품 판매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플레이 테이블을 통해서는 기껏해야 5명 정도와 만나게 되지만, 회지와 소품을 통해서는 훨씬 많은 사람과 접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TRPG 팀은 원래 같이 놀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지, 가시적인 결과물을 만들기 위한 조직이 아닙니다. 부스에서 판매하는 자료와 물품의 평균적 양과 질이 대단하다고는 할 수 없었습니다.
<바바 히데카즈의 마스터링 강좌 번역본>처럼 오랜 시간에 걸쳐 TRPG 유저들에게 읽히는 콘텐츠도 생산됐지만, 그 수는 많지 않았다.(이미지 출처: RPG MOOK 1호)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외국과 달리 한국에는 TRPG 관련 회사가 거의 없었다는 점이었다고 봅니다. 외국의 컨벤션은 대부분 업계의 박람회입니다. 회사들이 신제품과 신간을 발표하고, 서로 정보를 나누고, 고객과 대화하는 자리입니다. 아마추어 행사로서의 컨벤션도 분명히 충분한 의의가 있지만, 아마추어 행사만이 홀로 존재하기는 어려웠다고 생각됩니다.
RPG 컨벤션이 열리지 않게 된 지도 이제 8년이 넘었습니다. 언젠가 다시 열릴 수 있을까요? 다시 열린다면 무엇을 목표로 해야 하며, 전과는 무엇을 다르게 해야 할까요? 머리에서 떠나는 법이 없는 질문들입니다.
연재 2회와 3회에서는 1995년 TRPG가 한국에 들어온 뒤 잠시 흥했다가 21세기에 접어들며 쇠락한 과정을 이야기했습니다. 다음번에는 그 무렵부터 2013년 초까지 한국 TRPG계가 어떻게 돌아갔는지를 더듬어 보기로 하겠습니다. 그 사이에는 TRPG 출간이 도서출판 초여명에서만 이루어졌기 때문에, 아무래도 그쪽 위주로 이야기를 하게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