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TRPG다] 컴퓨터 RPG의 선조지만, 한국에서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TRPG. 디스이즈게임이 TRPG의 역사와 한국 TRPG의 변천사를 돌아보는 연재물을 마련했습니다. 15년 동안 한글 TRPG만 출판해온 ‘도서출판 초여명’의 김성일 편집장이 소개하는 한국 TRPG 이야기를 들어 보시죠.
오랜만입니다. 갑자기 일이 늘어나 글을 쓰는 것이 많이 늦어졌습니다. 오늘은 90년대 말에서부터 2010년대 초까지의 한국 TRPG계에 대해 쓰고자 합니다. 전회에도 말씀 드렸듯, 제가 일하는 회사의 이야기가 많이 나오게 될 것 같습니다.
1997년, 한국 TRPG계에는 ‘RPG 컨벤션’ 말고도 한 가지 사건이 있었습니다. TRPG 전문 출판사인 ‘도서출판 초여명’(이하 초여명)의 설립입니다. 그 해 5월에 결혼한 아내와 저는 앞으로 TRPG 책을 내면서 살자고 생각하고 6월에 사업자등록을 했습니다. 둘 다 번역 경험도, TRPG 경험도 이미 꽤 있었기 때문에 일 자체에 큰 어려움은 없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같은 해 미국 ‘스티브 잭슨 게임스’(Steve Jackson Games, SJG)와 교섭하여, 범용 TRPG 시스템 <GURPS>의 번역출간 계약을 맺었습니다. 저희가 <GURPS>를 택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그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GURPS>가 다양하게 응용될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다양한 종류의 TRPG 시스템이 나오기 어려운 한국 시장의 사정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짜여진 완제품보다는 스스로 하고 싶은 플레이를 만드는 데 쓸 ‘도구 상자’가 완제품보다 도움이 될 터였습니다.
![](http://file.thisisgame.com/upload/nboard/news/2014/03/03/20140303101940_5880.jpg)
초여명의 첫 작품이자 주력 라인업인 <GURPG> 시리즈.
<GURPS>는 이 목적으로 최적이었습니다. 물론 <GURPS>도 다양한 추가 자료가 존재하고, 이런 자료가 없으면 할 수 있는 것에 현실적인 제약이 있는 시스템입니다. 그러나 특정 장르나 특정 세계 설정에 집중하는 다른 TRPG 시스템들에 비해서, <GURPS>의 범용성은 분명히 유용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업을 시작하는 어느 젊은이가 성공을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때 생각하기로는 1년에 몇 권씩 후속 자료를 내고, 머지 않아 새로운 종류의 TRPG를 번역 출간하며, 직원을 두고 독자적인 TRPG 시스템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첫 책의 마무리 작업이 한창이던 1997년 말에 외환위기, 이른바 IMF 사태가 터졌습니다.
<GURPS 기본세트>는 1998년 2월, 제2회 RPG 컨벤션에서 첫선을 보였습니다. 초여명은 스폰서로서 부스를 열고 책을 판매했습니다. 컨벤션의 규모는 그 전해에 비해 훨씬 컸지만, 저희 첫 작품의 판매량은 예상보다 많이 저조했습니다. 경제가 악화된 탓인지, RPG 시장이 줄어든 때문인지, 저희 책이 재미가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TRPG 자체에 대중적인 관심이 없었던 이유인지, 경험이 없는 저희로서는 알 방법이 없었습니다.
![](http://file.thisisgame.com/upload/nboard/news/2014/02/28/20140228194842_9089.jpg)
RPG 컨벤션에 참가한 초여명(오른쪽). (이미지 출처: RPG MOOK 1호)
실패와 손해와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는 지루할 뿐이니 짧게 하겠습니다. 처음에는 서점 매출이 사무실 임대료만큼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첫 책을 맡고 있던 지방 총판들이 줄줄이 도산하는 바람에 상당량의 책은 판매 대금도 되찾을 길이 없었습니다.(<GURPS 기본세트>가 중고서점에 마치 파지처럼 쌓여 있었다는 이야기를 후에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저희는 다른 일로 돈을 벌어다가 <GURPS> 후속작의 출간에 썼습니다. 인쇄비 회수도 요원하던 시절입니다. <GURPS> 라인은 간신히 신간을 내며 유지할 수 있었지만, 새로운 시스템을 발굴하거나 출간 빈도를 늘릴 여유는 전혀 없었습니다. 이것은 다른 뜻있는 사람들이 조금씩이라도 해 주기를 기대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회사가 생기는 일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던전앤드래곤>(Dungeons and Dragons, 이하 D&D)과 <소드 월드 RPG>(ソード・ワールドRPG)를 내던 ‘커뮤니케이션 그룹’이 2000년경 폐업했습니다. 초여명은 꾸준히 책을 냈지만, 나오는 책은 1년에 한 권꼴이었습니다. TRPG 업계는 건포도처럼 쪼그라드는 듯했습니다. 1998년에 최초의 국산 TRPG <라콘도리아 R.P.G>를 냈던 겨울가족 출판사에서도 그 한 권 뒤로 소식이 없었습니다.
![](http://file.thisisgame.com/upload/nboard/news/2014/02/28/20140228200857_1858.jpg)
커뮤니케이션의 폐업과 함께 국내 출판이 멈춰버린 <소드 월드 RPG>와 <D&D>.
이렇듯 국내 출판사에 많은 기대를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떤 사람들은 외국어 TRPG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그중 가장 인기 있었던 것이 <던전앤드래곤 3판>(Dungeons and Dragons 3rd Edition, 이하 D&D 3판)입니다. 카드게임 <매직: 더 개더링>(Magic: The Gathering)으로 기염을 토하던 ‘위저드오브더코스트’(Wizards of the Coast)가 TRPG의 어머니인 ‘TSR’사를 인수한 후 곧 출간한 <D&D> 시리즈의 신 버전이었습니다.(현재는 <D&D>의 제5개정판인 <D&D Next>가 발간을 앞두고 있습니다.)
위저드오브더코스트는 <D&D 3판>을 내면서 텍스트 공개 정책인 오픈 게임 라이선스, OGL을 실시했습니다. 자기들의 텍스트를 누구든지 상업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OGL 정책 아래, 미국에서는 TRPG 출판사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관련 서적을 출간했습니다.
한국에서도 OGL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이 새로운 주류 시스템을 큰 부담 없이 즐길 수 있었습니다. 영어만 알면 웹에 공개된 텍스트 버전을 볼 수 있었고, 아마추어 번역도 저작권에 관한 걱정 없이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국내 판타지 소설 중에도 OGL 자료를 사용하고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http://file.thisisgame.com/upload/nboard/news/2014/02/28/20140228201340_4902.jpg)
<D&D 3판> 플레이어 핸드북의 이미지.
커뮤니케이션 그룹의 폐업 뒤로 비록 새로운 TRPG 출판사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한국 TRPG계의 상황은 천천히 호전되었습니다. 인터넷의 발달과 확산으로 외국의 자료를 접하기 쉬워졌다는 점, 그리고 옛날의 통신 동호회들에서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더욱 개방적으로 교류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TRPG계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고 생각됩니다.
제 기억에, <D&D>의 전성기 당시 한국 최대 TRPG 커뮤니티였던 ‘하이텔 RPG 동호회’의 회원 수는 3,000 명 정도였습니다. 현재 한국에서 가장 큰 TRPG 커뮤니티인 ‘네이버 TRPG Club D&D’는 2014년 3월 현재 회원이 9,000 명을 넘습니다.
초여명도 천천히, 꾸준히 성장했습니다. 2004년 가을에 <GURPS>의 신 버전인 <GURPS 국문2판> 라인이 출범하며 성장세는 두드러졌습니다.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자 전보다 더 두꺼운 책들을 더 자주 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2008년에는 <GURPS 실피에나>라는, 번역이 아닌 자체 제작 판타지 세계 설정을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그리 많이 팔리지는 않지만, 평가는 만족스러울 정도입니다.
![](http://file.thisisgame.com/upload/nboard/news/2014/02/28/20140228201723_8152.jpg)
한국 TRPG계는 21세기의 첫 10년을 그런 식으로 보냈습니다. 인터넷 커뮤니티는 그 중심을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 가며 조금씩 몸집을 불려 나갔습니다. 그 와중에 초여명은 계속 책을 냈고, 신간이 한 권 나올 때마다 <GURPS>의 전체적인 판매량은 늘었습니다. 2010년 무렵에는 초여명이 자체 매출만으로도 책을 낼 수 있을 정도의 형편이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2000년대 초를 TRPG의 ‘암흑기’라고 부르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이 때를 암흑기라고 하는 이유는 아마도 RPG 컨벤션이 시들해져 결국 열리지 않게 되고 <게임매거진>이 폐간하는 등, 규모 있는 ‘판세’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연재 3회에서도 언급했듯, 저는 RPG 컨벤션이 쇠퇴한 것은 역설적으로 TRPG계가 인터넷을 기반으로 흥성한 때문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 기간 동안 커뮤니티들은 커져만 갔고, 초여명도 출간 도서를 늘리면서 성장을 거듭했습니다. 외국어 TRPG 시스템들에 관한 관심도 증가했습니다. 저는 이 시절을 한국 TRPG계가 흙 밑에서 실속을 키우던 시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드디어 작은 싹을 틔우는 것이 2013년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 번, 연재 최종회에서 더 이야기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