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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충우돌 오늘] 3월 18일 - 동아일보에서 쫓겨난 기자들

임상훈(시몬) 2014-03-18 18:45:33

70년대 박정희 정권 아래서 우리나라 언론은 엉망이었다. 기관원들이 주요 언론사에 상주했다. “이 기사 넣어라, 이 기사 빼어라”며 개입했다.  시위 기사는 1단을 넘지 못했다. ‘1단 벽’이라는 푸념이 나왔다. 특정 단어는 쓸 수 없었다. ‘학원 시위’는 ‘학원 사태’로, ‘중앙정보부’는 ‘모 기관’으로, ‘부정부패’는 ‘사회부조리’로 바뀌어 나왔다. 만나주지 않은 변심한 애인을 찾아 방화한 군인을 취재한 기자는 기관에 끌려가 ‘공산당의 사주를 받았냐’고 심문을 당해야 했다.

 

71년 3월 서울대 학생 50여 명이 동아일보 앞에 모였다. 당시 동아일보는 가장 잘 나가는 매체였다. 학생들은 언론화형식을 진행했다. 동아일보 젊은 기자들도 자극받았다. 같은 해 4월 ‘언론자유수호선언’을 했다. 다른 신문사들도 따라 선언을 했다. 변화가 따르지는 않았다.

 

설상가상, 72년 10월 유신체제가 왔다. 긴급조치들이 발표됐다. 국민의 기본권, 언론자유 등이 봉쇄됐다. 

 

74년 10월 23일 동아일보의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서울대생이 유신반대 시위를 했다는 기사를 딱 한 줄 썼는데, 그 때문에 편집국장과 지방국장 등이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곤욕을 당한 사실이 알려졌다. 동아일보 기자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 1면엔 ‘자유언론실천선언’이 게재됐다. '실천'이라는 단어가 들어갔다.

 

기자들은 이렇게 선언했다. 언론사 외부의 간섭을 받지 않겠다. 기관원이 출입을 막겠다. 불법적으로 연행당하는 것을 거부하겠다. 우여곡절 끝에 ‘1단 벽’이 깨졌다. 금기시되던 용어(ex. 부정부패)도 사용됐다. 유신정권은 위기감을 느꼈다. 광고주를 압박했다.

 

광고가 줄줄이 해약됐다. 12월 26일, 3면의 하단광고가 백지로 나왔다. 동아일보계열의 방송사와 잡지사도 타격을 받았다.

 

 

 

 

국민들이 움직였다. 성금과 격려가 쏟아졌다. 그때 등장한 게 그 유명한 ‘격려광고’였다. 격려광고는 백지가 된 광고지면을 단단한 벽돌처럼 채웠다. 7개월 간 총 1만 352건의 격려광고가 등장했다. 98%가 익명이었다. 최초의 게재자도 익명이었다. 나중에 김대중 전 대통령으로 밝혀졌다.

 

명문구들이 쏟아져나왔다. 

 

‘동아! 너마저 무릎 꿇으면 진짜 이민 갈꺼야 - 이대 S생’ 

‘이렇게 화날 땐 어떤 약이 좋은지 광고야 말해다오 - 약사’

‘작은 광고들이 모두 민주탄환임을 알라 - ○○출판사 편집부’

 

 

 

기자들은 배신하지 않았다. 경영진은 정권에 굴복했다. 이대 S생은 이민을 고민했을 것이다. 75년 3월 8일 송건호 편집국장이 사표를 냈다. 기자와 아나운서 등이 제작거부를 했다. 130여 명의 기자, 프로듀서, 아나운서가 해고됐다. 그들은 신문사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1975년 3월 17일 새벽 3시 반 , 일군의 청년들이 철문을 부수고 신문사에 난입했다. 통행금지 시절이었다. 배후는 뻔했다. 기자들을 끄집어냈다. 다음 날인 1975년 3월 18일 기자들은 신문사 밖에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를 결성했다. 열심히 싸워오고 있다.

 

떳떳한 기자들이 떠난 동아일보는 그 뒤 완전히 바뀌었다. 쫓겨난 기자들은 아직 복직되지 못하고 있다. 기자들을 쫓아낸 동아일보사는 당시 언론자유를 지키려는 기자들의 활동을 홈페이지에서 자랑하고 있다. 좀 그렇다. simon

 

- 1975년 3월 18일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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