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분만은 애초에 불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다.
첫 번째 걱정. 출산 중 돌발상황이 발생할 경우 보호자인 내가 의사의 이야기를 듣고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의사의 말을 제대로 알아 들을 자신이 없었다.
두 번째 걱정. 산통이 오래 지속될 경우 열악한 시설과 역시 말이 통하지 않는 의료진을 절대적으로 의지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애가 태어나기 좋은 날짜와 시간의 사주를 받아 정확히 맞춰 제왕절개 출산을 계획했다. 실제 출산 전날 병원에 입원했다. 원래는 4인 1실인데 개원 이래 최초의 외국인 산모라고 병원측에서 특별하게 1인실을 제공해줬다. 그렇다 하더라도 병원은 참 낡았다. 내가 어릴 적 갔던 70~80년대 한국 병원의 느낌과 매우 흡사했다.
생명의 탄생은
어느 순간이나 경이로운 법이다. 그 생명이 내 자식이라면 그 어떤 순간보다 흥분되고, 기대되고, 아름다운 순간일 것이다. 둘째 유민이가 태어나던 그 순간 내 마음은 그러한
경이로운 감정으로 가득차 있었다. 단, 그 감정을 만끽하기엔
시간이 너무 짧았다.
아내가 내
손을 한번 잡아주고 수술실로 들어간 지 10분 만에 애 울음소리가 났다.
잠시 후 간호사가 아기를 안고 나왔다. “귀여운
공주님이에요”라고 이야기해 주면서 복도 의자에 앉아 있던 나에게 아기를 보여 주었다. 과연 나와 매우 닮은 아기였다. ‘오오’ 하며 다시 기쁨과 감사의 감정이 샘솟고 있었는데 간호사가 아기를 나에게 주더니 그냥 수술실로 들어가 버리려는 게 아닌가? 첫째 유정이를 출산할 때 바로 신생아실로 직행했던 기억이 또렷한 나에게는 매우 당황스러운
순간이었다.
“저기.. 아니.. 덩.. 덩이샤(자..잠깐만요..)” 급하니 한국어와 중국어가 동시에 나오는데 간호사가
들어가다 말고 돌아 보았다.
간호사: “왜? 당신 애가 아닌가?”
나: “맞다.”
간호사는 친절한
미소를 한번 더 지어주면서 “산모와 애는 문제 없다”고 이야기하고 바로 수술실로 들어갔다. 나는 이 순간 중국에서는 애를 낳으면 보호자에게 바로 인계한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리고 적어도 이 병원은 신생아실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도 알았다.
하필 그날 따라
엘리베이터가 고장이 났다. 수술실에서 병실까지 계단을 통해 내려가야 했다. 나는 태어난 지 10분도 안 된 아기를 안고 계단으로 갔다. 중국인 서너 명이 모여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계단은 너구리 소굴이었다. 내가
신생아를 안고 있는 것을 보더니 화들짝 놀라며 담배를 끄는 것이 아니라 다들 담배연기를 뿜어대면서 “꽁시꽁시(축하한다)”를 연발한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 자욱한 담배연기를 뚫고 나는 유민이를 안고 병실에 갔다. 그녀가 태어나서 처음 맡은 냄새가 하필 담배 연기였던 것이다.
병실에 가서
갓 태어난 아이의 얼굴을 쳐다보니 또 한번 생명에 대한 경이의 감정이 밀려왔다. 눈물이 한 방울 고일 무렵 이번에는 애가 깨어나더니 울기 시작한다. 어, 어쩌지… 그래도
첫째를 키워본 아빠라고 노련하게 달래 보았으나 애는 아랑곳하지 않고 힘차게 운다. 이건 육아의 경험이
있는 아빠의 경험상 배가 고파서 우는 것이 분명했다. 한국의 산부인과에서는 보통 신생아실로 아기가 들어가고
거기서 분유도 주는데 여기는 어떤 시스템일까? 문제는 한국의 시스템을 생각한 우리 부부는 관련한 준비를
아무 것도 해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복도에 나가
간호사를 불렀다.
나: “애가 운다.”
간호사: “힘차게 우는 걸 보니 애가 건강하네. 축하한다.”
나: (중국어가 딸리니) “애가 운다.”
간호사: “애가 배가 고프면 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빨리 우유를 먹여라.”
나: (방법이 없으니) “애가 운다. 난
아무것도 준비해 오지 않았다.”
그제서야 간호사는
황당하고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얼마 있다가 젖병 하나에 분유를 담아서 가지고 왔다. 이전에 이
병원에서 출산한 산모가 쓰고 버리고 간 젖병과 남기고 간 중국 분유일 확률이 매우 높았지만 배고파 우는 아이에게 그거라도 먹일 수 밖에 없었다. 유민이가 태어나서 처음 먹은 식사는 모르는 누군가 버리고 간 중국산 분유였다. 유민이는 만족스럽게 먹고 다시 잠들었다. 다만 이쯤되니 애
사주를 위해 좋은 날짜와 시간이라고 받은 것이 맞나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이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너무 많은 일을 겪고 있지 않는가?
유민이가 태어나서
첫 번째 식사를 맛있게 하고 다시 잠이 들 무렵 최초 아기를 나에게 안겨 주었던 간호사가 병실로 나를 찾아왔다. 내용인즉 고장난 엘리베이터의 수리가 늦어져서 아직 마취에서 깨어나지 않은 산모를 이동용 구급침대를 통해 병실로 옮겨와야 하는데 사람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즉 나에게 함께 힘을 써 달라는 거부할 수 없는 요청이었다. 간호사의
얼굴 표정에는 ‘니 와이프니 니가 일손을 보태야지’라고 쓰여
있었다.
우리는 다시 계단을 통해 수술실로 올라갔다. 의사, 경비원,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 그리고 나까지 해서 4명이 한 조가 되어 다시 그 계단으로 마취에서 깨어나지 않은 아내를 야전침대에 뉘여 들고 내려왔다. 마치 119 소방대원들처럼 말이다.
갓 태어난 유민이에게 담배연기를 선사해 주었던 그 서너명의 중국인들은 여전히 그 계단에 모여서 수다를 떨고 있었고 여전히 너구리 소굴을 만들고 있었다. ‘이 녀석들, 정체가 무얼까?’라는 생각과 동시에 담배연기에 분노가 생겨 째려 보는데 그들은 도리어 ‘산모는 괜찮냐?’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어봐 주기까지 했다. 그 와중에도 담배는 계속 물고 쉴새없이 연기는 뿜어내고 있다보니 그 진정성에는 별로 믿음이 가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내 옆에는 간호사가 유민이를 안고서 함께 왔다갔다 했으니 유민이는 태어난 지 한 시간도 안돼 무려 3번씩이나 자욱한 담배연기를 헤치고 왔다갔다 하는 보기드문 경험을 한 셈이다. 이때의 영향이었을까? 후일담이지만 유민이는 담배연기를 정말 싫어하고 심지어 예민하게 잘 잡아내기까지 한다. 다행히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그 이후 아이의 출생신고-비자신청-신생아 접종 등 일련의 과정은
간단해 보이지만 나에게는 정말 험난한 미션들이었다. 그때 각종 관공서에서 겪었던 경험 덕분에 훗날 내가
중국에서 사업을 해 나가면서 부딪혀야 했던 각종 공공기관에서의 업무능력(이라고 쓰고 멘탈이라고 읽는다)이 배양됐다. 한번에 오직 하나씩만 알려줘서 같은 일처리를 위해
5~6번은 기본이고 10번 이상 방문했던 이 때의 경험이 아니라면
중국의 은행, 세무소, 비자국, 등기소 등을 직접 다니는 것을 엄두도 내지 못했을테니까 말이다.
어째든 난 두 아이의 아빠가 됐다. 출산 전에는 애가 하나이건 둘이건 밥상에 숟가락만 하나 더 놓으면 되는 거 아니냐는 나이브한 생각을 했다. 그런 생각은 바로 깨졌다. 당장 중국 기저귀에 이상한 알레르기가 생겨 매주 일본 백화점에 가서 일본 기저귀를 사오는 것만으로도 시간과 비용의 투자가 만만치 않았다. 현실적인 고민에 직면하게 되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학교의 왕 총장은 감감무소식이었다. 학교측에서는 주택과 생활비를 제공했지만 그건 그야말로 그 동네에서 먹고 살 정도의 수준인 것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난 쓰촨 청두에서 명예뿐인 교수로 늙어가기는 싫었다.
여전히 청두에서 김봉두 선생의 역할을 하고 있을 뿐...(출처: 영화 <선생 김봉두>)
그 무렵 내가 가르치던 학생들은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다. 재능이 보이는 친구들도 있었다. 이 친구들을 데리고 학교의 시설과 장비를 이용해 프로젝트에 착수할 수는 있었다. 아니, 실제 몇몇 소규모 프로젝트는 과제삼아 진행하기도 했다.
당시에 쓰촨 청두에 대규모 IT투자 자본이
몰리기 시작했고(정글만리 1장 참조) 나는 ‘한국의 1세대
MMORPG 개발자’라는 경력을 레퍼런스 삼아 회사를 설립하면
투자유치도 어려울 것 같지는 않았다. 단, 원래 이 구도는
왕 총장이 제안한 것인고 그게 사실이라는 것도 알았지만 내가 온전히 리스크를 감당하기에는 너무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은 생각치도 않았다. 오라는 곳(회사)은 몇 군데 있었지만 가기는 싫었다. 중국 회사에 취직하기에는 청두에는
회사도 별로 없을 뿐더러 아직 중국회사 들어가서 일하기엔 언어의 한계가 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상황 속에서 의외의 방법이 생겨났다.
‘중국 시장에 관심이 있는 한국 회사 혹은 나를 필요로 하는
한국 회사인데 내가 늘 한국에 있을 필요가 없는 상황이라면 되지 않을까?’라는 발상의 전환을 하니 원하는
곳을 찾을 수 있었다. 한국의 스타트업이었다. 비록 게임개발사는 아니었지만 게임이 매체로서 중요한 역할을
해야 했고, 그런데 상대적으로 창업멤버들이 젊어서 나처럼 경력있는 사람을 필요로 했다. 무엇보다 중국 사업에도 관심이 많아 중국을 베이스로 일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었다.
쓰촨 청두에 온지 약 1년여만에 난 둘째 유민이를 낳았고, 새로운 회사에 취직했으며, 학교에서는 (횟수는 줄었지만) 여전히 강의했고, 내 학생 제자들이 만든 프로젝트 팀에 조언해 주는 역할까지 바쁜 나날들을 보내게 됐다. 바야흐로 본격적인 일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