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서는 혼자서 동인 게임 개발에 뛰어들게 된 사연과 스토리를 완성하기까지의 과정을 다뤘습니다. 사실 여기까지의 과정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상상과 글쓰기의 단계였는데요.
스토리가 완성되고부터 본격적인 비주얼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비주얼 노벨 게임을 구성하는 3대 비주얼 요소, 캐릭터 스탠딩 이미지와 배경 이미지, 이벤트 CG를 만들 차례였죠
첫 번째 고민은 다양한 표정을 짓는 캐릭터였습니다. 이전까지는 표정이
바뀌는 그림을 그릴 일이 없었기에 항상 완성된 펜선 위에 채색을 해왔는데, 표정을 바꾸기 위해서는 그림
작업 과정 자체를 바꿔야 했거든요.
하지만 표정이 바뀌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선 이 방법에 변화를 줘야 했습니다. 다른
종이에 여러 표정을 그린 뒤 눈코입 파츠만 떼어 붙이는 방법을 먼저 시도해 봤지만 퀄리티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원본에서 눈이나 눈썹이 머리카락과 겹치는 경우는 수정하기도 어려웠죠.
사실 이 문제는 예전부터 그림을 그려온 방법이 스탠딩 이미지 제작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케이스입니다. 처음부터 타블렛을 이용해 PC로 그림을 그려온 사람이라면 레이어만
나누면 되니까 전혀 문제 될 게 없는 부분이었죠.
최종적으로 종이에 그리는 그림은 눈코입만 연필로 그린 뒤 나머지를 볼펜으로 그리고, 눈코입은 스캔 후 마우스로(...) 그리는 방법을 썼습니다. 처음엔 마우스로 그리는 게 어색해서 실패도 여러 번 했지만, 익숙해지고
나니 이것도 나름 할만하네요. 허허허...
완성된 스토리를 처음부터 다시 읽으면서 대사 하나하나마다 이 캐릭터가 지을 표정을 눈코입의 조합으로 하나씩 만들어갔습니다. 1번 표정은 보통 눈+보통 눈썹+웃는 입, 2번 표정은 눈웃음+화난 눈썹+다문 입
등등으로요. 새로운 표정마다 하나씩 이미지를 저장하고, 스토리의
대사 부분에는 해당 캐릭터의 몇 번 표정인지를 표시하는 식으로 진행했죠. 경우에 따라선 눈물 파츠, 홍조 파츠도 추가하면서요.
가장 놀랐던 것은 단순히 눈과 눈썹, 입의 조합만으로 캐릭터당 3~40개에 달하는 표정이 나올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새삼 인간의
얼굴이 얼마나 효율적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기관인지 느끼게 되네요.
최종적으로 캐릭터가 옷을 바꿔 입는 경우를 포함해 총 21장의 그림을
그리고, 표정 변화를 모두 합쳐 무려 260개에 달하는 스탠딩
이미지가 완성됐습니다. 개수가 많긴 하지만 실제 작업은 21장의
그림을 그린 것 외에는 눈코입 파츠만 바꿔가면서 저장한 것인지라 약 2주 정도의 시간이 소요됐네요.
여기까지의 작업은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됐습니다. 항상 하던 글쓰기와 항상 하던 그림 그리기의 연장선에 지나지 않았으니까요.
# 배경 작업? 난 미술 못하는데 어떡해?
문제는 캐릭터 스탠딩 이미지를 다 만든 뒤, 스크립트 코딩과 배경
작업을 병행하면서 시작됐습니다.
스크립트 코딩 자체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습니다. 애초에 렌파이 툴
자체가 코딩 언어가 단순하기도 했고, 완성된 스토리에 맞춰 앞서 제작한 캐릭터 이미지를 띄우면 되는
작업이었거든요.
하지만 배경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캐릭터 이미지가 평소 하던
팬아트 덕질의 영역이라면, 배경은 미술의 영역에 들어갔거든요. 필자
역시 평생 여캐만 그려봤지, 배경 그림을 본격적으로 그려본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다음으로 생각한 건 실제로 배경 사진을 찍은 뒤 포토샵에서 블러로 수정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실제로 많은 동인 게임 제작자들이 사용하는 방법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이 방법은 시도를 해보기도 전에 포기해야 했습니다. 현대 일상 물이면 주변의 동네 사진 등으로 대처가
될 텐데, 필자가 쓴 스토리는 '동양 판타지' 세계였거든요. 심지어 공중 전함까지... 이건 어디 가서 사진을 찍기 이전에,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
게 대부분이었습니다.
고민 끝에 떠올린 방법이 바로 3D였습니다. 3D로 세트장 하나만 만들고 나면, 그 뒤는 카메라 위치만 바꿔가면서
다양한 배경 이미지를 뽑아낼 수 있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그래서 무료 3D 프로그램인 '블렌더 3D'를 받아, 무작정 유튜브에서 초심자 강좌를 보면서 하나씩 따라 해 봤습니다. 네모 박스를 만드는 법, 기둥을 만드는 법 등
기초적인 부분부터요.
도면에 따라 바닥의 크기를 조절하고, 간격에 맞게 기둥을 세워주니 그럴듯한 모양이 나오네요.
(물론 작업 중간에 막히는 부분이 있을 땐 그걸 해결해줄 선생님이
없다는 단점이 있지만요. 기껏 포토샵으로 지붕 텍스쳐를 만들어서 입혀놓고도 이걸 렌더링 할 때 나타나게
하는 방법을 몰라 며칠씩 인터넷 뒤져가며 머리 싸매는 등...)
"그래, 진짜
산을 그릴 실력이 되지 않는다면 이건 사진을 찍어서 활용하자!"
혹시나 해 3D로 산을 만들어 봤지만 영 좋지 않았습니다. 색 입히고 배경에 합성하니 어색했어요.
작품의 큰 무대가 되는 성이 얼추 완성됐으니, 이번엔 각종 실내 배경을 만들 차례였습니다.
영화의 세트장을 만들듯이 한쪽 벽면과 바닥, 천장만 있는 방을 만들고, 안쪽에 들어갈 가구는 엔틱 가구나 유적지 사진, 호텔 방 사진 등을
참고해가며 하나씩 조립해 갔습니다. 그나마 넓은 성을 만들면서 3D 오브젝트를
만드는 법을 연습한 덕택에 가구 자체는 모양만 떠오르면 어떻게든 만들 수 있게 됐네요.
주인공의 침실부터 시작해서 회의실, 어전, 연회석 등이 차례로 완성됐습니다. 의자나 책장 등 몇몇 가구는 여러 방에 재활용하는 식으로 배치하니, 꼭 온라인 게임에서 하우징을 하는 느낌이네요. 물론 가구의 퀄리티는 많이 차이 나지만...
요런 식으로 온라인 게임 하우징을 하듯이 세트장을 만들고 카메라를 배치하면...
짠! 게임 내에서 쓸 배경 하나가 완성됐습니다.
복잡한 가구도 잘 보면 상자랑 기둥 같은 기본적인 도형을 합친 거라서 만들기 어렵지 않아요.
밤낮의 변화도 광원만 바꾸면 되고, 다른 앵글이 필요할 땐 카메라만 옮기면 끝!
작중 주요 배경인 건축물은 어느 정도 궤도에 접어들었는데, 이번엔 '전함'이 문제였습니다.
게다가 작중 세계관 설정으로 동쪽 나라는 동북아시아(한중일) 풍의 건축 양식을, 남쪽 나라는 태국풍 건축 양식을 모티브로 삼았던지라... 남쪽 나라 출신인 주인공이 모는 전함은 태국의 사원 같은 화려한 건축물을 배 위에 얹어야 하는 상황이었죠.
태국 사원의 특징은 여러 겹으로 겹쳐 올려진 지붕과 그 위에 솟아오른 뿔, 화려한
장식 등으로 대표됩니다. 쉽게 말해 더럽게 복잡합니다. 그동안 3D로 만들었던 건축물과는 비교도 안 되게요.
어차피 갑판 앵글의 배경 이미지로 쓰일 거라서 화면에 보이지 않을 부분은 대충대충!
여기에 함포와 부스터를 달고 나서 "어떻게든 다됐다~!" 하고 선박 설계업을 하는 친구에게 보여줬습니다. "내가
만들어본 전함인데 어떻게 생각해? 크고 아름다워?"
당연히 일갈과 함께 무시무시한 피드백이 돌아왔습니다. 그야 그렇겠죠. 선박에 대한 지식은 문외한이나 마찬가지인 필자가 상상만으로 만든 전함과 실제
선박 설계와는 어마어마한 갭이 있을 테니까요. 전함 이전에 배로서 존재하기 위한 기본적인 게 너무 없다는
피드백과 함께 하나하나 자문해가며 디테일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세밀한 부분이 많아 수정에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고 하소연하니 필자에게 그럴 땐 업계 좌우명을 따르라는 조언도
해주네요.
"대충, 빨리, 완벽히"
3D로 배경 제작에 뛰어들고 약 2주가량 지났습니다. 처음엔 어려울 줄 알았던 3D 배경도 막상
몸으로 부딪히고 나니까 나름 노하우도 생기고 그동안 잘못 작업했던 부분도 발견하고 금방 익숙해지네요.
처음엔 넓은 성터, 다음은 실내 세트장, 다음은 공중 전함. 여기까지 만들고 나니 그동안 애써 현실 도피하며
외면하고 있던 다음 배경을 만들 차례가 왔습니다. '포격을 맞아 폐허가 된' 성터요.
일단 시험 삼아 회색 상자를 하나 만들고 이리저리 깎고 늘리고 해서 바위 파편을 하나 만들어봤습니다. 어디선가 깨져나온 것 같은 돌덩이가 하나 완성됐네요.
비슷한 방식으로 돌덩이 패턴을 몇 개 구깃구깃 만들어 보고, 현대인의
전설의 기술 중 하나인 Ctrl+C, Ctrl+V로 수를 늘렸습니다.
여기서 몇 개를 골라 크기를 줄이고, 전체를 다시 복사해서 크기를 통째로 줄여 위에 얹고, 다시 전체를 복사해 살짝 방향만 돌려서 옆에 쌓아놓고.
# 번외, 먹물 떨어진 연출을 만들고 싶어서...
배경 이미지 작업을 하면서 3D 배경 외에도 몇 가지 연출이 더 필요했습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칼을 휘두르는 연출이라든지, 피가 뿌려지는 연출 같은
거요.
사실 피가 뿌려지는 연출은 포토샵에서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습니다. 흩뿌려지는
형태의 브러시로 대충 문지르고 빨간색을 입히면 끝이니까요.
하지만 가장 어려운 건 '먹물' 효과였습니다. 동양적인 세계관을 연출할 때 가장 많이 쓰이는 것 중 하나가 먹물 방울이 흩뿌려진 건데요, 자연스럽게 먹물이 튀긴 형태는 포토샵 브러시로 흉내 낼만한 것이 아니었거든요.
#젓가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