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년 전, 미국 유학생 시절에 있었던 일입니다. 당시 같은 과목을 수강하던 친구들이 기자에게 "어제 서포터 '매드라이프'의 그랩은 미쳤다"라며 저에게 게임 하나를 권했습니다. 당시 '매드라이프' 홍민기는 팬들의 마음을 송두리째 흔든 서포터였고, 저 역시 서포터라는 포지션에 빠져들었죠. 그게 기자와 <리그 오브 레전드>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하지만 <리그 오브 레전드> 초창기, 서포터는 그저 와드 설치하는 기계에 불과했습니다. 수급한 골드를 전부 시야 장악에 투자해야 했거든요. 하지만 서포터는 군중 제어기를 통해 전황을 한방에 뒤집을 수 있는 만큼, 슈퍼 플레이를 만들어내는 스타 선수들을 많이 배출한 매력적인 포지션이기도 합니다.
캐리할 수 '없다'는 편견을 깨고 <리그 오브 레전드> e스포츠 역사에 획을 그은 3명의 '슈퍼 서포터'들을 돌아봅니다. / 디스이즈게임 이형철 기자
본 콘텐츠는 디스이즈게임과 오피지지의 협업으로 제작됐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리그 오브 레전드> 초창기 서포터는 다른 포지션에 비해 그다지 큰 주목을 받지 못했는데요. 당시만 해도 서포터는 팀원들을 위해 와드를 사는 등 궂은일을 처리해주는 '보조'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매드라이프'는 달랐습니다. 군중 제어기를 활용해 능동적으로 판을 만드는 플레이를 밥 먹듯 선보이며 서포터도 캐리할 수 있다는 걸 증명했기 때문이죠.
매드라이프가 가장 빛났던 장면은 2012 아주부 챔피언스 서머 결승전인데요. 유럽의 강호 CLG.EU와 결승에서 맞붙은 매드라이프는 2:0으로 몰린 3, 4세트에서 마법사 챔피언 럭스와 그랩으로 적을 끌어올 수 있는 블리츠크랭크를 활용해 경기를 5세트까지 끌고 갔습니다. (이후 블리츠크랭크는 매드라이프의 상징과 같은 챔피언으로 자리매김, 수많은 경기에서 슈퍼 플레이를 선보이게 됩니다.)
천신만고 끝에 펼쳐진 5세트, 매드라이프는 상대를 공중에 띄우고 밀어낼 수 있는 알리스타로 상대 팀의 핵심 챔피언인 다이애나를 밀착 마크하며 딜로스를 유발했죠. 당시 경기를 해설한 김동준 위원이 외친 "알리스타가 꿈에 나오겠어요"는 지금도 회자되는 명대사로 꼽힙니다. 결국 매드라이프는 소속팀과 함께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고 감격의 눈물을 쏟아냈습니다.
캐리와 가장 거리가 멀었던 포지션에서 슈퍼 플레이가 터져 나오자 사람들은 환호했고, 매드라이프에게 '메멘'이라는 별명을 붙여 칭송하기 이르렀습니다. 그는 알리스타, 블리츠크랭크 외에도 쓰레쉬를 활용해 절정의 플레이를 선보이며 오랜 시간 많은 팬의 사랑을 독차지한 선수로 자리매김했죠. 또한, LCK 생활 막바지에는 신인 선수들로 구성된 CJ 엔투스의 기둥 역할을 수행하며 마지막 불꽃을 태우기도 했습니다.
2013년 MVP 오존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한 '마타' 조세형은 서포터 포지션에 있어 또 다른 이정표를 세운 선수로 꼽힙니다. 전자두뇌를 연상케 하는 매서운 오더와 상황 파악 능력, 빡빡한 시야 장악 등 똑똑한 플레이로 팀을 이끌었기 때문이죠.
마타의 활약은 2014년 <리그 오브 레전드> e스포츠를 주름잡은 '삼성 화이트'의 폭주와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삼성 화이트는 롤챔스에서 꾸준히 3위 이상의 성적을 올리는 한편, 2014 롤드컵에서는 절정의 경기력을 선보이며 우승컵을 들어 올린 강팀이었는데요. 그때 팀의 중심에 있던 선수가 바로 마타였습니다.
당시 마타는 원거리 딜러 '임프' 구승빈과 함께 라인전부터 상대를 찍어누른 뒤, 그 우위를 바탕으로 적 정글에 와드를 설치하거나 상대 정글러의 동선을 파악해 교전을 펼치는 등 빠르게 이득을 챙기며 경기속도를 올렸습니다. 많은 팬이 삼성 화이트의 운영을 두고 너무 빡빡해서 마치 탈수기를 돌리는 것 같다고 칭찬한 이유였습니다.
이후 중국 생활을 거쳐 한국으로 돌아온 마타는 LCK에서도 손꼽히는 강팀인 KT와 SKT T1에서 수 차례 LCK 우승컵을 들어 올림은 물론, 롤드컵에도 출전하며 선수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마타의 폼은 전성기에 비해 굉장히 많이 떨어져 있었고 심지어 SKT T1 생활 막바지에는 '에포트' 이상호에게 주전 자리를 내준 채 경기를 지켜봐야 했죠. 결국 그는 2019시즌이 끝난 뒤, 오랜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게 됩니다.
'울프' 이재완은 앞서 언급한 선수들과는 조금 다른 느낌인데요.
매드라이프와 마타가 시작부터 빛을 뿜어내는 선수들이었다면, 울프의 시작은 다소 초라했습니다. 나진 화이트 실드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한 울프는 2013년 SKT T1 S에 입단한 뒤에도 큰 활약을 펼치지 못했습니다. 간혹 슈퍼 플레이를 선보이긴 했지만, 서포터의 기본 소양으로 꼽히는 시야 장악 측면에서 불안함을 노출하며 부정적인 평가를 받아야 했죠.
하지만 울프의 기량은 SKT T1 체제가 시작되면서부터 폭발했습니다. 시야 장악 중 허무하게 끊기는 모습이 줄어든 대신, 넓은 챔피언 폭과 뛰어난 활용도를 통해 팀의 상승세를 이끌었기 때문인데요. 특히 쓰레쉬, 알리스타, 자이라 등 변수를 만들 수 있는 챔피언으로 선보이는 빼어난 스킬 적중률은 울프가 가진 최고의 장점으로 꼽히기도 했습니다.
사실 당시 SKT T1은 '마린' 장경환, '페이커' 이상혁, '뱅' 배준식 등 수많은 슈퍼스타들이 존재한 팀인 만큼, 상대적으로 울프에 쏠리는 시선은 적었습니다. 이에 울프는 여러 대회에서 좋은 활약을 펼치고도 계속해서 저평가에 시달려야 했죠. 하지만 그런 시선을 한 방에 날려버린 대회가 있었으니, 바로 2017 미드 시즌 인비테이셔널(이하 MSI)입니다.
2017 MSI, SKT T1은 유럽의 강호 G2와 결승전을 펼쳤는데요. 울프는 아군을 삼킬 수 있는 탐 켄치를 활용, '수호자' 역할을 수행한 데 이어 3세트에서는 공격적인 챔피언 '자이라'로 상대 진영을 박살 내는 맹활약을 펼쳤습니다. 특히 3세트 후반 아군 정글 쪽에서 플래쉬를 활용해 기습적으로 이니시에이팅을 여는 장면은 울프의 능력을 확실히 드러낸 포인트였죠.
하지만 2018년부터 울프는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폼이 급격히 떨어짐에 따라 에포트에게 주전 자리를 내준 데다 정글러로 포지션을 변경했지만 썩 만족스럽지 않은 경기력을 보였기 때문이죠. 결국 그는 2019년 터키 리그로 이적했고 2회 연속 결승에 진출하는 기염을 토하며 부활을 꿈꿨지만, 끝내 MSI와 롤드컵에는 도달하지 못하며 아쉽게 선수 생활을 마무리해야 했습니다.
이 외에도 한국 <리그 오브 레전드> e스포츠 판에는 수많은 스타 서포터들이 존재하는데요.
소속팀의 롤드컵 우승을 이끌었던 '푸만두' 이정현(SKT T1 K), '코어장전' 조용인(삼성)은 물론, 과거 KT B의 두뇌를 담당한 '마파' 원상연 등은 많은 팬의 가슴을 뜨겁게 만든 '한국 최고의 서포터'들이었습니다. 현재 그 계보는 LCK에 롤드컵을 되찾아준 담원의 '베릴' 조건희로 이어진 상황이죠.
다가올 2021시즌은 더욱 다양한 서포터들이 팬들 앞에 모습을 드러낼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카데미 제도가 본격화됐고, 2군 선수단까지 갖춰 선수풀이 대폭 늘어난 만큼 새로운 얼굴들이 대거 로스터에 이름을 올렸기 때문입니다.
과연 한국 <리그 오브 레전드> e스포츠의 슈퍼 서포터 계보를 잇는 선수는 누가 될까요? 그 옛날 기자는 물론 많은 팬의 가슴을 달궜던 '서포터 슈퍼 플레이'를 다시 한번 만날 수 있을까요? 와드 하나만 손에 들어도 무서울 것이 없었던, 그 시절 슈퍼스타들의 플레이가 괜스레 그리워지는 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