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스포츠 대회 조별 예선에서 1위를 차지한 팀에겐 두둑한 혜택이 주어진다. 토너먼트 상대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은 물론, 향후 펼쳐질 상위 라운드에서도 타 팀에 비해 넉넉한 준비 시간이 부여된다. 많은 프로팀이 대회 조별 예선 1위를 꿈꾸는 이유다.
하지만 <리그 오브 레전드> e스포츠 최강팀이 참가하는 2021 미드 시즌 인비테이셔널(이하 MSI)의 상황은 조금 다르다. 한국의 담원기아는 조별예선 최종 라운드에 해당하는 럼블 스테이지 1위에 올랐음에도 22일 4강을 치른 뒤, 다음날 곧바로 결승에 들어가는 의아한 일정을 배정받았다. 1위 팀에 주어지는 혜택 중 가장 큰 것 하나를 잃어버린 셈이다.
이에 팬들은 라이엇 게임즈가 '중국팀'을 위해 일정을 조정했다고 믿는다. 사실여부를 떠나 팬들은 럼블 스테이지 2위를 차지, 4강과 결승을 연달아 소화해야 했던 RNG를 위한 조정이라며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과연 2021 MSI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라이엇 게임즈는 정말 '중국'을 편애하고 있는 걸까. / 디스이즈게임 이형철 기자
2021 LCK 스프링 우승팀 자격으로 MSI에 참가한 담원기아는 대회 내내 순항하고 있었다. 휘청거린 순간도 있었지만, 착실히 승리를 쌓으며 럼블 스테이지를 1위로 마무리했다. 남은 건 '규정집에 명시된 것'과 마찬가지로, 22일 금요일 4강을 치른 뒤 일요일 펼쳐질 결승을 준비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라이엇 게임즈가 공개한 4강 일정은 규정에 명시된 내용과 달랐다. 럼블 스테이지 2위에 오른 중국팀, RNG가 금요일에 경기를 펼치는 스케줄이 공개됐기 때문이다. 1위를 차지한 담원기아에 주어질 혜택이었던 '4강 종료 후 하루의 여유 시간'이 한순간에 RNG로 옮겨간 것이다.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2021 MSI는 아시아와의 시차가 큰 아이슬란드에서 펼쳐지고 있다. 따라서 RNG와 담원기아는 자국 팬들의 시차를 고려한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문제는 두 팀의 일정이 공정하지 않았다는 거다. 실제로 RNG는 한국 시간 기준 럼블 스테이지 내내 단 한 번도 새벽 2시 이후(5, 6라운드) 경기를 소화하지 않았다. 반면, 담원기아는 5일의 럼블 스테이지 중 하루를 제외하면 항상 늦은 시간대 경기를 배정받았다.
한국 팬들은 분노를 토하고 있다. '중국 편애'가 담긴 일정을 소화한 것도 모자라, 1위가 누려야 할 권리까지 2위에 넘어갔기 때문이다. 라이엇 코리아 역시 '4강 일정 조정'에 대해 본사에 정식으로 항의한 뒤 답변을 기다리고 있다.
그만큼, 라이엇 게임즈 센트럴의 결정은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규정집 내용을 바꾸면서까지 RNG에 특혜를 줘야 했느냐는 비판의 목소리가 쏟아지고 있다.
<리그 오브 레전드> e스포츠를 돌아보면 한국 팬들이 분노할 요소는 차고 넘친다.
2018 롤드컵 우승팀 IG의 스킨에 포함된 '왕쓰총 와드 스킨'이 대표적인 예다. 그간 롤드컵 우승을 차지한 팀 중 선수가 아닌 인물을 테마로 한 와드 스킨이 제작된 건 2016년 T1의 '꼬마 와드'가 처음이었다. 그마저도 롤드컵 3회 우승을 견인한 김정균 감독을 기리기 위해 제작된 아주 특별한 스킨이었다. 반면, IG는 2018년이 첫 번째 롤드컵 우승이다. 게다가 왕쓰총은 코칭스태프가 아니라 구단주에 불과했다.
올해 1월 공개된 시즌 티저 영상도 마찬가지다. 라이엇 게임즈는 매년 초 <리그 오브 레전드>를 정리하는 영상을 공개해왔다. 당연히 롤드컵 디펜딩 챔피언의 세레모니도 포함된다. 실제로 2019, 2020 시즌 티저 영상에는 2018, 2019 롤드컵을 거머쥔 IG와 FPX가 등장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당연한 수순이다.
하지만 올해 시즌 티저 영상에는 2018 롤드컵을 차지한 IG가 등장했다. 2020 롤드컵 디펜딩 챔피언 담원 게이밍(현 담원기아)이 나와야할 자리를 IG가 차지한 것이다. 일각에서는 중국(LPL)이 역사상 처음으로 롤드컵을 들어 올린 걸 기념하기 위해 IG를 삽입했다는 지적까지 나온다. 라이엇 게임즈가 중국팀을 편애하고 있다는 목소리가 결코 과장이 아닌 듯한 이유다.
기자는 이번 MSI를 보며 2015년 개최된 국제 야구 대회 '프리미어 12'를 떠올렸다. 프리미어 12는 '야구 월드컵'을 목표로 일본의 주도 아래 개최된 대회다. 하지만 2015년 펼쳐진 첫 번째 프리미어 12는 엄청난 논란에 시달렸다. 개최국 일본이 노골적으로 홈 어드밴티지를 활용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은 자국 경기에 일본인 심판을 배정한 데 이어 본인들이 4강에 오를 경우, 11월 20일이 아닌 19일에 경기를 펼칠 수 있도록 조정했다. 4강에서 승리한 뒤 하루의 휴식일을 더 갖기 위해서다. 다만, 일본은 '개최국'이라는 명분이라도 있었다. 물론 쉽게 이해하기 어렵지만, 최소한의 명분은 있었던 셈이다.
반면, MSI는 다르다. 규정집에 1위 팀이 먼저 경기를 치른다는 게 고지되어 있음에도 라이엇 게임즈는 별다른 의견 조율 과정 없이 일정을 조정했다. 담원기아 관계자도, 라이엇 코리아도 이 내용을 알지 못했다. 물론 라이엇 게임즈가 '아시아 시청자들을 위해서'라는 명분을 제기할 순 있다. 하지만 담원기아 역시 아시아 팀에 해당한다.
만약 라이엇 게임즈가 부득이한 사정으로 인해 일정을 조정할 거였다면, 가장 먼저 다른 참가팀에 해당 내용을 알리고 협의했어야 했다. 어느 쪽으로 시선을 돌려도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라이엇 게임즈가 정말 e스포츠를 '스포츠화'하려는 꿈을 갖고 있다면 현 상황을 유야무야 넘겨선 안 된다. 더군다나, 라이엇 게임즈는 그간 특정 지역을 편애한다는 의혹을 지속적으로 받아왔다. 만약 그것이 정말 헛된 이야기라면 지금이야말로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대답을 내놓을 때다.
다시 프리미어 12로 돌아가 보자. 당시 한국 대표팀은 일정 조정, 불공평한 연습 환경 등 여러 제약속에서도 4강에서 일본을 격파한 뒤 미국까지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대회에 참가한 두산 베어스의 오재원은 "너무한다는 단계를 넘어서 할 때까지 해봐라 같은 분위기였다'"라며 프리미어 12를 회상한 바 있다.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 4강까지 남은 시간은 채 하루가 되지 않는다. 라이엇 게임즈가 일정을 재조정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제 할 수 있는 건 원통하지만 담원기아가 실력으로 보여주는 것뿐이다.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조정 작업을 진행하고도 한국에 패한 프리미어 12의 일본이 그러했듯, 담원기아가 가장 높은 곳에서 RNG를 꺾을 수 있다면 '편법으로 실력을 뚫을 수 없다'는 걸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부디 담원기아가 2015년 프리미어 12를 재현해주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