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뉴스] “나는 프로 일러스트레이터입니다.”

2004년, PS2로 발매된 여성 프로레슬링을 주제로 한 게임 <럼블 로즈>. 섹시하면서도 개성 있는 매력적인 캐릭터들의 뒤에는 이들을 디자인한 한 명의 일러스트레이터가 있었다.

세밀하면서도 생동감이 느껴지는 그의 작품은 오로지 '입'만으로 그려진 그림이다.

고토부키 시로. 목 아래를 움직일 수 없는 전신마비 환자이자 일러스트레이터. 휠체어에 앉아 입으로 펜을 물고, 한 획씩 정성스레 그림을 완성해 나가는 아티스트다. /디스이즈게임 이승운 기자 

그는 처음부터 그림을 그려왔던 건 아니었다.

대학생 시절이던 1991년. 갑작스럽게 찾아든 오토바이 사고는 그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갔다.

경추 손상. 목뼈 아래로는 팔도 다리도 움직일 수 없는 전신마비 장애.

대학을 그만두고 들어간 재활 시설에서 의사는 그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그림을 그려 보지 않겠습니까?"

입으로 펜을 물고 목을 움직여 그림을 그리는 재활 훈련. 하지만, 의사의 그런 권유에도 의욕은 생기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장애는 그에게서 모든 희망을 앗아가 버렸다.

의사의 고집과 그의 고집이 이어졌고, 절대로 그리지 않겠다고 의사와 싸움도 많이 했다.

그렇게 사고로부터 1년. 의사의 열정이 전해진 것일까. 병상에 있던 그는 결국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의 나이 24세 때의 일이었다.

그날 이후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팔도 다리도 움직일 수 없던 그는 입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에 열중했다. 그리고 2003년. 당시 코나미에서 개발 중이던 <럼블 로즈>의 캐릭터 디자인을 맡기에 이르렀다.

그가 입에 문 펜 끝으로 그려낸 캐릭터는 언제나 건강미가 넘치며, 자신만만한 눈빛으로 팬들을 사로잡아갔다. 옷의 주름, 무늬, 머리카락의 휘날림 등 세밀한 부분도 거침없이 그려냈다.

한 획씩 그리고, 고치고. 다시 한 획을 그리고, 고치고. 작업에 걸리는 시간은 평균 20시간 이상. 결코 쉽지 않은 작업. 그렇게 정성스럽게 완성된 캐릭터에는 보는 이를 매료시키는 '힘'이 담겼다. 고토부키 시로는 단순히 '장애를 극복한 사람'이 아닌 '프로 일러스트레이터'로서 이름을 알려갔다.

2010년 그는 그동안 그려온 작품들로 자신만의 개인 전시회를 여는 데 성공했고, 2012년에는 그의 작업 과정이 담긴 DVD와 작품, 작화법 등이 수록된 일러스트 강좌 책 '고토부키 시로 일러스트 테크닉'이 발간됐다. 이 책은 일반 판매 외에도, 같은 장애를 지닌 사람들을 위해 교육 기관에 무료로 배포됐다.

같은 해, 본인의 작품을 전시한 가게 '고토부키 시로 갤러리'가 오픈됐다. 그리고 갤러리 수익금의 일부를 동일본 대지진 피해자에게 기부했다. 2013년에도, 2014년에도, 2015년에도 그의 아티스트로서의 활발한 활동은 계속됐다.

그러나... 활동이 한창이던 2016년 6월 15일. 그의 SNS를 통해 한 소식이 전해졌다.

그의 조카가 작성한 글은 고토부키 시로의 부고를 알렸다. 심장질환으로 인한 갑작스러운 소식이었다. 향년 47세. 떠나기엔 아직 젊었던 나이였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활발이 활동하며 최선을 다해 살아오던 그였기에, 팬들도 관계자도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장애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개척한 일러스트레이터 고토부키 시로. 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손발을 움직일 수 있는가 없는가가 아니었다. 포기하는가, 포기하지 않는가 뿐이었다.

고향에서 진행된 그의 장례식에는 그동안 그를 지켜봐온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끝까지 최선을 다해왔던 고인을 추도했다. 고인이 생전에 남긴 작품은 지금도 홈페이지와 SNS에 남아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