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 전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지난 19일 대선 출마를 선언했습니다. 게임 매체가 대통령 후보에 대해 종합적으로 깊이 있게 다루기는 아직 어렵습니다. 언젠가 그럴 날이 오겠죠. 특히, 게임과 IT에 대한 ▲과거의 선택들 ▲현재의 이해수준 ▲향후 정책방향과 추진의지 등에 대해 따져볼 때가 곧 오리라 믿습니다.
그런데, 뜬금없이 대통령 선거 이야기냐고요? 어쩌면 게임과 가장 인연이 깊은 대통령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걸핏하면, 정부나 국회, 미디어로부터 구박, 타박, 압박, 핍박을 받고 있는 게임계로서는 관심을 가질 만한 이슈 아닐까요? 바로 안철수 후보 이야기입니다. /디스이즈게임 시몬
■ 윌리엄 깁슨을 아는 대통령 후보
19일 온 국민의 관심을 받았던 대선 출마 선언. 게임과의 옅은 연줄이 슬며시 보였습니다. 출마 선언의 마지막 대목이었죠.
“마지막으로 제가 좋아하는 작가, 윌리엄 깁슨의 말을 하나 소개하고 싶습니다. ‘미래는 이미 와 있다. 단지 널리 퍼져 있지 않을 뿐이다.’ 그렇습니다. 미래는 우리 앞에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여기서 언급된 윌리엄 깁슨(William Gibson)은 SF소설 팬들에게는 유명한 인물입니다. 세계 3대 SF 문학상(휴고, 네뷸러, 필립 K. 딕상)을 석권한 소설 <뉴로맨서>(1984)의 작가니까요. 이 소설은 SF의 중요한 하위 장르인 ‘사이버펑크’의 시초이자 전범으로도 무척 유명합니다. 그 덕분에 그는 ‘느와르 프로피트’(noir prophet, 검은 예언자)라는 칭호를 얻었죠.
특히 <뉴로맨서>에서는 ‘사이버스페이스’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등장했습니다. 사이버스페이스, 지금 이 글을 보는 인터넷, 우리가 하는 온라인게임 모두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이뤄집니다. 소설을 썼던 1984년 당시에는 완전히 황당한 공상이었죠. 게다가 당시 깁슨은 ‘컴맹’이었습니다. ^^;
사이버스페이스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나왔던 <뉴로맨서>의 메인 타이틀 화면.
젊은 시절의 깁슨. 며칠 전 미국 IT 전문지(Wired)와의 인터뷰에서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최신 사이버펑크의 예로 언급하더군요. 전혀 모르는 곳에서 불쑥 솟아 나와 사이버스페이스(YouTube)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화제가 되는 매력적인 하위문화로 말이죠. 곧 다른 유전자에 의해 대체될 것으로 예상하지만, 싸이의 다음 비디오가 나온다면 꼭 보겠다네요.
그의 다른 유명한 코멘트로는 “인터넷으로 많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많은 돈을 낭비하지는 않는다”, “테크놀로지는 윤리적으로 중립이다. 우리가 그것을 사용할 때, 선악이 부여된다” 등이 있죠.
그래서였을 겁니다. 한 유명 게임 개발자가 안 후보의 출마 선언 직후 이런 위험한(?) 소감을 페이스북에 남긴 것은요.
“윌리엄 깁슨을 인용하는 대통령 후보라니… 최고다.”
■ 오락실에서 동전 하나로 온종일 버티던 소년
이 소감을 보면서 저는 아주 옛날 안 후보를 처음 직접 봤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1999년 8월 15일 연세대 백주년 기념관이었습니다. 한여름, 게이머들이 바글바글했던 소프트맥스 <창세기전 3> 제작발표회를 취재갔던 날이었죠.
지금은 무척 흔하지만, 90년대 말 국내 게임업계에서 제작발표회는 매우 귀했습니다. 1년에 한두 차례였죠. 소프트맥스는 당시 매년 유저들을 초청해 제작발표회를 했던 유일한 업체였습니다. 99년 발표회에서는 안철수연구소(현 안랩) 대표였던 안 후보가 직접 축사를 하러 왔었습니다.
당시 각광 받던 소프트웨어 벤처 회사는 몇 없었고, 두 회사 대표 사이에 친분이 있었겠죠. 각종 시상식이나 행사에서 자주 마주쳤을 테니까요. 의례적인 인사말 정도 하고 내려올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라, 조근조근 이야기하던 안 후보의 한 마디가 제 귀를 쫑긋하게 했습니다. 자기 소개 대목이었죠.
“어렸을 때 동전 하나를 들고 오락실을 가면 하루 종일 버틸 정도의 열렬한 게임 마니아였습니다.”
그 밖에 게임 관련 동호회에서 열심히 활동했던 경험과 게임산업이 앞으로 크게 성장할 것이라는 전망 등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는 그냥 예의상 찾아와 축사를 낭독하는 사람이 아니라, 정말 잘 알고 있고, 잘 내다보고 있었던 동호인 출신이었던 거였죠.
그가 활동했던 동호회는 우리나라 게임 역사의 전설적인 공간, ‘개오동’이었습니다.
■ 하이텔 개오동의 네임드 - ahn.cs
지금은 게임 웹진도 많고, 카페나 커뮤니티 등 게임에 대해 이야기 나눌 곳이 많습니다. 너무 흩어져 있는 게 오히려 흠이 될 정도로요. (그러니, TIG에 와서 많이 놀아주세요, 부디~.) 하지만, 인터넷이 나오기 전까지는 그럴 만한 곳이 거의 없었습니다. PC통신을 제외하곤 말이죠.
1990년 11월, 한국에서 게임에 관한 게시판이 처음으로 생겨났습니다. 개오동(개털 오락 동호회의 약자)이었습니다. ‘개털’은 하이텔의 전신이었던 우리나라 최초의 PC통신 ‘케텔’의 별칭에서 따왔죠. 프리뷰나 리뷰는 물론 게임 제작에 관한 각종 수준 높은 글도 많이 올라왔죠. 공동구매를 통해 정품게임의 가격을 낮춰, 회사나 유저 모두 윈윈할 수 있는 풍경도 보였고요.
당시 소위 게임에 한 가닥 하는 사람들은 다 이 곳에 몰려들었죠. ‘ahn.cs’라는 아이디를 썼던 안 후보를 비롯해, 이찬진(한글과 컴퓨터 창업자, 현 드림위즈 대표), 이원술(손노리 대표), 김학규(IMC게임즈 대표), 최연규(소프트맥스 이사), 김남주(전 웹젠 대표), 김유식(디씨인사이드 대표) 등이 소싯적 이 곳에서 활동했습니다. ‘게제동’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게임제작동호회도 이 곳에서 게시판으로 출발해 분리됐었고요.
안 후보는 개오동 말고도, 고전게임 동호회, 게임기 동호회, OS 동호회 등에서 활동했던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몇 년 전 한 매체에는 이런 보도도 나온 적이 있죠.
“94년에는 안 원장과 이찬진 대표(드림위즈)가 RPG <위저드리 7>을 놓고 게시판에서 열띤 토론을 벌인 적도 있었다.”
아쉽게 그 글을 찾을 수는 없었습니다. 개오동이 문을 닫으면서 해당 DB에 접근할 길이 끊겼거든요. 관련 자료들을 살피다 보니까, <위저드리 7>에 관한 안 후보의 자취가 그래도 몇 개 남아 있더군요.
(※ 이하 PC통신의 자료는 TIG 회원 이후 님의 적극적인 도움을 통해 얻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안철수 님이 위저드리 땐 가끔 분석실에 나타나곤 했는데.”(개오동, 96년 2월)
“92년과 93년 초 당시 이 게임(위저드리 7)의 집중분석이 비교적 잘되어 있습니다. 한때 안철수 님도 이 게임을 즐겼나 봅니다… 단 한 차례! 글이 있더군요.”(고전게임동, 98년 3월)
<위저드리 7 : 다크 사번트의 십자군>의 무대인 외계 행성 ‘로스트 가디아’의 지도. 다크 사반트의 음모를 막기 위한 퀘스트를 깨기 위해서는 대부분 지도와 관련된 퍼즐을 풀어야 합니다. 92년과 93년 무렵, 안 후보도 모험으로 가득찬 이 외계 행성을 헤치고 다니며 퍼즐을 풀었겠죠. 광활한 필드를 배경으로 자유도가 높았던 게임이었기 때문에 많은 분석과 공략이 개오동을 통해 공유됐습니다.
<울티마> <마이트&매직>과 함께 3대 RPG 시리즈의 하나로 칭송받던 <위저드리>. 7편에서는 기존의 중세 판타지 배경을 벗어나, 외계 행성과 각종 우주인이 등장했죠. 마법과 용, 광선총과 인조인간이 공존하는 판타지+SF 게임이 됐습니다. 어드벤처 성격이 강한 1인칭 던전형 턴제 RPG였습니다.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82년부터 컴퓨터를 다뤄왔던 안 후보는 아는 사람은 아는 ‘애플 게임 마니아’였다고 합니다.
99년 10월 고전게임 동호회에 안철수연구소의 한 직원(현재도 안랩 근무 중)이 올린 게시물은 이렇습니다.
오늘 회사 한 구석에 쌓여 있는 5.25 인치 플로피를 보고 놀랐습니다.
다름 아닌, Apple 디스크였습니다. 약 100장 정도.
벌써 몇 년째 회사 이사를 할 때마다 한 구석에 처박혀 있는 디스크들이지만, 이게 Apple 디스크인지는 모르겠네요. 상당히 놀란 건, 80년대 중반 정품을 산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플로피 디스크들은 모두 안 소장님(안철수) 겁니다. 안 소장님이 애플 게임 마니아인 건 아는 사람은 압니다. ^^; <Rings of Zilfin> <The Seven Cities> <The Eidolon> <BattleGroup> <Moebius> <Bard's Tale>1, 2, 3 <AutoDeul> <Robot wars> <Phantasie> <Sundog> 등등. |
■ 게임을 제대로 했고, 제대로 아는 유력 정치인
한 나라의 대통령을 뽑는데 게임과 인연은 사실 중요한 판단기준은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자질과 역량 등이 많습니다. '88만원 세대', '하우스푸어', '하우스리스푸어' 등으로 대변되는 사회양극화의 심화, 글로벌 경제불황의 돌파구로 손꼽히는 남북관계의 단절, 언론파업사태와 민간인사찰 등 공권력의 편향화 등 풀어야 할 문제가 산적합니다. 게임과 친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것은 곤란하겠죠.
그래서 그런지 19일 대선 출마 선언일, 기자 질의응답에서 안 후보가 했던 답변이 더 기억에 남습니다. 이번 선거와 관계 없이 계속 정치를 하겠다는 이야기였죠. 안 후보는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와 야권통합을 할 가능성도 있고, 선거에 나가 이길 수도, 질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그는 계속 정치를 하겠다는 뜻을 명확히 밝혔습니다.
대통령이 되건 안 되건, 그는 게임을 즐겼고, 제대로 이해하는 최초의 유력 정치인입니다. 오랜 시간 그 자신이 게임 마니아였고, 게이머들과 소통해왔습니다.
게임대회에 가서 이벤트성 대전에 참가하거나, 게임행사를 지자체에 유치하거나, 선거를 맞아 자기가 주인공인 게임을 만드는 것과는 전혀 급이 다른 거죠. (그렇다고, 정치인들의 그런 노력을 평가 절하 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게이머와 가까워지려는 의미 있는 활동이라고 생각합니다.)
게이머로서의 이력을 다루느라, 이 글에서 언급하지 않은, 다른 중요한 인연도 있습니다. 대학교와 사회 초창기, 격의 없이 쌓아온 게임계 주요 인물들과의 네트워크도 가벼운 것은 아닙니다. 안랩의 온라인게임 보안 프로그램 사업 등을 통해 맺어온 업계 네트워크 등도 무시할 수는 없을 거고요.
게임에 대한 구박, 타박, 압박, 핍박이 뜬금없거나, 지나칠 때마다, 업계인들이 술자리에서 매번 한탄조 혹은 우스갯소리로 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10년쯤 된 술자리 안주입니다. (가끔 게임 커뮤니티에도 그런 글이 올라오곤 했었죠.)
“우리도 유력한 정치인을 배출해야 해!”
지난 19일 오후 3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살며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