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래프톤이 산하 개발 스튜디오들의 분사를 추진한다. 처음 관련 정보가 외부로 흘러나온 것은 지난 4월 매체 파이낸셜 뉴스를 통해 보도된 ‘프로젝트 벨루가실’의 분사 소식이다. 당시 보도에 대해 크래프톤은 “일부 조직이 분사하는 것은 사실”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이후 복수의 매체의 추가보도를 통해 벨루가실을 포함한 거의 모든 개발 스튜디오가 분사 대상인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디스이즈게임 역시 크래프톤 내부 취재원 인터뷰를 진행, 지난 2월경부터 본격화된 분사 계획에 따른 회사 내 상황을 알아봤다.
분사 소식에 대한 부서간 온도 차는 크다. 크래프톤 내부 사정에 정통한 취재원 A는 “펍지 코퍼레이션 등 실질적으로 돈을 버는 조직에 속한 직원들은 분사에 큰 관심이 없다. 반면 새롭게 만들어진 신사업 조직들은 분사 얘기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전했다.
분사 이후 개별 스튜디오는 모두 지원받은 초기 자본금으로 시장에서 스스로 살아남아야 한다. 문제는 아직 본격적인 수익 창출 단계에 들어서지 못했던 신사업 조직들이다. 이들 팀의 경우 조직장이 매출 외 KPI를 설정, 이사회 승인을 받는 방식으로 초기 자본 산정이 이뤄졌다.
일반적 스타트업과 비교해 이들에게는 초기부터 적지 않은 금액 지원이 이뤄지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도전적 분야의 스튜디오가 단독으로 자생력을 갖추기는 쉬운 일이 아니기에 구성원들은 여전히 불안을 느끼고 있다. 특히 아직 시장이 무르익지 않은 분야에 도전 중인 팀들일수록 더욱 그렇다. 취재원 A는 "새로운 분야에 장기적 뜻을 품고 입사했던 개발자들도 많은 것으로 알아 안타까움이 크다"고 전했다.
기업 입장에서는 장기적 생존을 위한 ‘특단의 조치’였을지 모른다. 이렇듯 일부 스튜디오 구성원들에게는 좀처럼 받아들이기 힘든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다. 특히 개인의 직업 안정성 측면에서는 날벼락과 다름없다. 거칠게 말해 '대기업에 입사했는데 스타트업 직원이 될' 상황이다.
분사 대상 스튜디오에 속한 취재원 B는 "팀원 중엔 이전 커리어에서 프로젝트가 무산되거나, 회사 자체가 흔들리는 등의 경험에 지쳐 대기업인 크래프톤을 찾아온 분들이 있다. 나 역시 크래프톤의 기업 규모가 입사 결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안정적 회사생활이 가능할 것으로 믿었다"고 전했다.
그러나 분사 가능성이 대두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분사가 확정될 경우 스튜디오의 네임밸류와 재정 안정성에 대한 외부 평가가 낮아지는 것은 당연지사이며, 그만큼 시장에서의 실패 가능성도 커진다.
한편 개발자들 사이에서도 근속연수에 따라 분사 소식을 받아들이는 자세는 서로 크게 다른 편이다. 조직에 오래 몸담았던 개발자들은 비교적 여유롭다. 그간의 경력과 내부 인맥 등에 의해 본사나 펍지 코퍼레이션 등으로의 부서 이동이 어렵지 않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어서다. 여기에는 경력 오랜 개발자를 구하기가 쉽지 않은 업계의 사정도 한몫한다.
취재원 A는 “분사될 스튜디오마다 연차가 오래된 개발자들이 조금씩 흩어져 있는데, 이들은 사태를 덜 심각하게 보고 있다. 실제로 일부 부서 이동이 약속된 인사도 있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반면 본사에 어필할 만한 성과를 올릴 기회가 아직 없었던 신규 채용 개발자, 그 외 사업 직군, 아트 직군은 분사 사태를 훨씬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분사 논의가 비교적 일찍 나왔다는 모 스튜디오의 경우 비개발직군은 이미 대부분 이직을 결정했다. 개발자 상당수도 이직을 결심했다. 약 40%의 개발자들이 이직했거나 이직 의사를 밝힌 상태이며, 대부분 주니어급이다.
이처럼 분사가 온전히 이뤄지기 전 인재 유출이 벌어지기도 하는 만큼, 크래프톤의 분사 '전략'이 개별 스튜디오의 생산성을 제고하는 묘수가 될 수 있다는 해석에도 적지 않은 의문이 제기된다.
이탈 현상에는 스튜디오에 주어지는 자본금 규모에 대한 직원과 본사 간 인식차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취재원 B는 팀에 약속된 자본금 규모에 대해 회의적 시각을 밝혔다.
B가 속한 팀 구성원 대부분은 분사된 스튜디오에서 일할 생각이 없는 상태로, 전환 배치나 이직을 노리고 있다. B는 "팀원 중에는 프로젝트와 팀 자체에 개인적으로 강한 애정을 가진 분들이 있다. 만약 자본금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규모였다면 그분들은 분사된 회사에서 도전을 이어 나갔을 것이다."라고 전했다.
한편, 팀 구성원들과 함께 누구보다도 배수진의 자세로 임해야 할 조직장급들의 경우 정작 ‘위기’를 느껴야 할 필요성이 크지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간 크래프톤이 보여온 인사 방식에 따른 추측이다.
조직장급의 경우 특정 프로젝트에 실패하더라도 큰 지장 없이 새로운 프로젝트를 맡는 경우가 있었다고 취재원 A는 전했다. 만약 분사 이후 각 스튜디오가 폐업 수순을 밟더라도 조직장급은 기존처럼 본사에 남을 수 있다는 정서가 형성되어 있다면, 이들이 '사활'을 걸고 스튜디오 운영에 힘쓸 이유는 현저히 적어진다.
분사 결정 자체를 넘어 절차와 소통 차원의 불만도 제기된다. 취재원 B는 회사가 직원들에게 분사 동의 여부를 물어오면서도 정작 개인이 결정에 있어 반드시 고려해야 할 사안들의 확정과 공유에는 소홀했다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분사 이후의 직원 복지 변경에 관해 명확히 들은 바가 없다. B는 "구두로 '최대한 유지하겠다'는 식의 이야기는 들었다. 하지만 실제 세부 사항에 대해선 '협의 중'이란 말 이후 아직도 이야기가 없다"고 전했다.
이어 "팀원 대부분이 분사에 반대한 여러 이유 중 하나다. 복지 뿐만 아니라 연봉이나 직원이 짊어져야 할 기타 리스크 등 전반적 사안에서 확정된 바가 거의 없다. 그런데 어떤 직원이 쉽게 동의할 수 있겠나"라고 반문했다.
원론적 차원의 공감대 형성 시도 또한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분사를 추진해야 하는 근본적 이유에 대해서 회사가 명확히 설명한 적은 없다고 취재원들은 입을 모았다. 본사를 퍼블리셔로 전환하고 대부분의 스튜디오를 분사하겠다는 '기조'가 이미 결정된 채 직원들에게 전달되었을 뿐이다.
취재원 B는 "예를 들어 '회사의 재무가 어려워서 어쩔 수 없다'는 식의 설명은 전혀 없었다. 차라리 그렇게 말했다면 직원들이 이해는 했을 것이다"라고 이야기했다.
직원 일부는 회사 위기에 대한 경영진의 책임도 함께 묻고 있다. 현재 크래프톤이 처한 상황에서 분사는 취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해법 중 하나일 수 있다. 문제는 투자 및 프로젝트 관리 등 측면에서 경영진 역시 현 사태에 대한 책임을 벗어날 수 없음에도, 분사에 따른 리스크는 직원들만 지는 형국이라는 것.
대표적 예시로 크래프톤은 <서브노티카> 개발사 언노운 월드의 인수에 약 5,000억을 들였지만 언노운 월드의 차기작 <문브레이커>는 기대 이하의 시장 성적을 낸 바 있다.
취재원 A는 “제대로 투자하는 것은 고사하고, 그 돈을 쓰지만 않았어도 지금의 사태는 면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프로젝트를 스무 개는 돌릴 수 있는 돈이다”라고 전했다.
지난 2018년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개발자의 끊임없는 도전'이라는 모토 아래 탈바꿈한 크래프톤. 2020년 김창한 대표이사 취임 후 개발 스튜디오 독립성을 강조한 이래 오늘에 이르러 각자도생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리고 지속 가능성을 약속하던 '게임 연합' 크래프톤에 발을 들였던 개발자 중 적지 않은 수가 이제 '실패를 두려워하며 한정적인 도전'에 나서야 할 가능성을 마주하고 있다.
<서브노티카> 개발사 '언노운 월즈'의 인수에는 약 5,000억 원이 들었다
산하 스튜디오 중 가장 먼저 분사 소식이 외부로 알려졌던 음성AI 서비스 개발 조직 벨루가실의 분사에 대해서 크래프톤은 "정해진 바가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한편, 디스이즈게임 취재 결과 벨루가실은 사업 정리 후 스튜디오 폐쇄 수순을 밟을 가능성이 열려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폐쇄가 결정될 경우 구성원들은 크래프톤 내 타 조직으로의 이동 절차를 밟게 된다. 그러나 공석을 찾아 채용 면접을 통과해야만 이동이 이뤄지는 만큼, 신규 입사 절차에 다름 아니라는 평가가 나온다.
이동이 좌절된 직원들이 회사 잔류를 선택하기란 현실적으로 어려우리라는 전망이다. 회사에 의한 권고사직은 없을 예정이지만, 경력 공백이 발생할 경우 이후 커리어에 큰 불이익으로 작용하기에 자진퇴사를 선택하게 될 공산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