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검색창에 ‘야설록’을 입력해 보면 사뭇 다른 내용들이 검색된다. ‘야설록이 사람인가요?’로부터 시작되는 검색 결과들은 소설, 만화, 영화, 드라마, 프로덕션 이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기 그지없다. 이제는 ‘스토리 작가’를 넘어 ‘종합 예술인’으로 불리는 그가 지금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온라인게임이다.
글 짓는 사람으로 데뷔한 지 25년. 활자로 시작해 만화책을 지나 스크린을 넘어 이제는 PC 모니터에 펼쳐지게 될 그의 이야기는 과연 어떤 것일까. 예당온라인의 <패 온라인> 개발실에서 야설록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디스이즈게임 박광현 기자
열혈 게이머로 시작한 게임 도전 |
유난히 햇살이 뜨거웠던 8월의 어느 날, 어깨에는 DSLR을 메고 등에는 노트북을 짊어진 채 <패 온라인> 개발실의 문을 두드렸다.
“방금 전까지 <무림외전>을 하고 있었습니다. 실은 지금도 청신부로 계속 사냥하는 중이죠.”
‘요즘엔 어떤 게임 하세요?’라는 필자의 첫 인사에 그가 대답한 말이다. 이미 많이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는 열혈 게이머다.
<리니지>를 하면서 성주가 되어 보기도 하고 <리니지2>를 하면서 최초는 놓쳤지만 2위로 50레벨을 찍기도 했다. <WoW>를 하면서는 레이드에 푹 빠져 보기도 했다.
<리니지>가 서비스를 시작한 지 10년. 그가 데뷔한 지는 25년. 벌써 작품활동의 절반 가까이를 게임과 함께 지낸 야설록 상임고문은 ‘게임을 할 때면 곳간에 뭔가를 가득 채워 둔 느낌’이라고 한다.
“<리니지2>를 할 때였어요. 50레벨이 된 이후에 용의 계곡으로 사냥을 가야 하는데 파티사냥이 아니면 도저히 게임을 할 수가 없었어요. 어떻게든 혼자서 해 보려다 안 되겠어서 결국 접게 되었지요. <WoW> 때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네요. 초기에는 레이드 한 번에 5시간이나 걸리는 데다 정해진 멤버가 아니면 가기가 힘들었죠. 그게 너무 힘들어서 한두 번씩 계속 레이드에 빠지고 나니 장비가 빈약해서 같이 못 하겠더군요. 그 즈음에 생각했죠. ‘아, 나도 게임을 만들어 봐야겠다’라고요. 저는 글을 쓰는 사람이고, 게임에도 글이 있었기 때문에 도전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가장 힘들었던 작업은 통념 깨기 |
그가 개발팀을 꾸리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기존의 통념을 부수고 새로운 것을 생각하는 것이었다. 최근의 기획자들을 보면서 느낀 점은 한국에서 유행했던 게임들의 통념에 너무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런 과정에서 그가 찾아 보게 된 것들이 중국의 게임들이다.
“중국 게임은 한국 게임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지존이 되는 길이 열려있죠. 현직 의사가 갖는 1시간과 학생의 1시간이 한국 게임에서는 같은 의미를 지니지만, 중국 게임에서는 그 차이를 인정해 줍니다.”
한국에서는 소위 ‘현질’이라고 부르며 부정적인 이미지를 지닌 현금거래를 중국에서는 하나의 게임 콘텐츠로 즐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점과 함께 퀘스트나 숨겨진 요소에서도 차이점을 이야기한다. 한국 게임들은 퀘스트를 내놓으면 ‘이런 퀘스트를 만들었으니 즐겨 보라’는 식으로 알리는데, 중국 게임인 <무림외전>에서는 유저들이 몰라서 못 하는 퀘스트가 있다는 것이다.
“길을 지나다 보면 항상 보게 되는 기둥이 있어요. 하루에도 대여섯 번 꼭 지나치게 되는 기둥인데, 어느 날 같이 게임을 하는 사람이 기둥 위에 올라가면 퀘스트를 준다고 하더군요. 은근히 올라가기 힘들게 만들어 놓은 기둥인데, 반신반의하면서 올라가 봤습니다. 아무 반응도 없어서 헛수고를 하게 만든 친구에게 귓속말을 하려는 차에 캐릭터 앞에 왠 귀신이 나타나서 퀘스트를 주더군요.”
야설록 상임고문은 ‘<무림외전>의 기획자가 장난끼 있고 여유가 있는 친구 같다’고 하면서 웃었다. 그러면서 현재 만들고 있는 <패 온라인>에도 색다른 요소를 많이 넣고 싶다고 덧붙였다.
<패 온라인>은 자유로운 게임 |
“파티를 꼭 해야 하나요? 솔로잉을 하고 싶은 사람도 있을 테고, 파티를 하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 아닙니까?”
그가 생각하는 <패 온라인>의 핵심 키워드는 ‘자유’. 그 자유에 따른 어느 정도의 책임은 있지만, 플레이어가 원하는 방식의 플레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파티 플레이를 하던, 솔로잉을 하던 좋은 아이템을 얻을 수 있는 기회는 동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본적으로 3개 국이 싸우는 RvR 게임이지만 같은 국민끼리의 PK도 가능하다. PK를 반복하면 학살자가 되어 현상금이 걸리고 쓰러졌을 때 드랍하는 아이템이 더 많아진다. 하지만 같은 레벨의 캐릭터보다 약 10% 강해지는 데다 RvR에도 정상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등 나름대로 학살자로서의 삶도 충분히 가능하도록 만들 것이라고 한다.
3개 나라가 싸우게 될 전장의 전체 지도 콘셉트.
“이런 시스템을 만들면 다들 서브 캐릭터로 학살자를 만들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도 예전에 <리니지>를 할 때는 길을 막고 비켜 주지 않는 유저나, 시비를 걸어 오는 유저를 상대하기 위해 캐릭터를 따로 만들어서 썼거든요.”
PK와 관련해 살생부 시스템을 만들 생각은 없냐는 질문에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살생부라는 것이 결국 ‘복수’를 위한 것인데, 그렇게 편리한 복수는 오히려 게임의 재미를 떨어뜨린다는 것이다. 그는 오히려 전체 채널에 ‘제보 바랍니다’라는 식으로 묻고 물어서 마침내 복수하는 방식의 재미를 원한다.
그 외에도 <패 온라인>은 여러 가지 독특한 시스템을 선보일 계획이다. 캐릭터를 만들면 국가와 출신이 결정된다. ‘이국의 하대마을 출신’ 같은 식이다. 이렇게 고향이 같은 사람들끼리 파티를 하면 버프를 주기도 하고, 랜덤하게 지역 장학금을 받기도 한다. 세 개로 나뉜 국가 내에서도 지역별로 사람들이 엮이게 되는 셈이다.
“이성 캐릭터 간의 결혼도 지원하게 됩니다. 게임 내에서 이성를 자동으로 매칭해 주는 시스템도 있죠. 퀘스트를 거쳐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서 부모의 절반 레벨까지 키울 수 있고, 최종적으로 부모가 만렙이 되었을 때 능력을 자식에게 그대로 물려줄 수 있습니다.”
지존으로 가는 길이 확실하게 열려 있는 게임 |
“다 같이 사이 좋게 파티를 맺어서 어느 세월에 지존이 되겠는가?”
이 말은 야설록 상임고문이 한 말이 아니라, 그가 어느 중국 기획자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다. 온라인게임은 ‘너’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고, 내가 ‘너’보다 나은 캐릭터가 되고 싶기 때문에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야설록 상임고문은, 게임상에서 ‘지존’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를 원한다.
“어느 중국 게임을 하면서 제가 100만 원을 써 본 일이 있어요. 어떤 사람은 같은 일에 400만 원을 썼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해서 지존급이 되었죠. 400만 원이라면 정말 큰 돈 같은데, 어지간한 한국 게임에서 400만 원으로 지존이 될 수 있나요?”
그는 묻는다. 한국에서 서비스되는 게임들 중에서 정말 ‘지존’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게임이 있는지를. 정말 열심히 게임을 하면 한 클래스 내에서 최고봉에 오를 수는 있지만, 역상성을 가진 클래스의 최고봉에게는 1:1로도 쓰러지게 된다. 게다가 비슷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면 누구든지 최고봉이 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지존이 아니게 된다.
“장비가 지존이라면 혼자서 같은 레벨의 캐릭터 한 파티(6명) 정도는 거뜬히 상대할 수 있게 만들었으면 합니다. 제가 항상 밸런스팀에 강조하고 있는 부분이죠. 15%의 유저가 지존을 바라보는 유저들이라면, 나머지 유저들은 그들을 바라보면서 게임을 한다고 봅니다. 지존이 되는 길은 항상 열려있지만 그 길을 지날 것인가는 유저의 선택입니다.”
<패 온라인>에서 강해지기 위해서는 3개 국의 RvR 전장에서 상대 진영의 캐릭터를 쓰러뜨려서 ‘공훈패’를 모아야 한다. 전장에서는 모든 캐릭터가 같은 복장으로 변하기 때문에 상대의 레벨도, 장비 상태도 알 수가 없다. 결국 남는 것은 캐릭터의 ‘강함’ 뿐이라고 한다.
“강해지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공훈패를 모아야 합니다. 같은 레벨이라도 공훈패를 얼마나 모았느냐에 따라 강함의 정도가 확연하게 다르기 때문이죠. 레벨을 올리다 보면 전장에서 해결해야만 하는 어려운 퀘스트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공훈패의 중요성을 알게 됩니다.”
'야설록'이 3년 동안 가다듬은 세계관 |
<패 온라인>의 스토리를 생각하면서 그가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은 중국 고사의 전설을 파헤치는 작업이었다. 그는 중국의 역사를 ‘붙임과 붙임의 역사’라고 말한다. 넓은 땅만큼이나 많은 전설과 기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역사를 새로 발견할 때마다 계속해서 기존 역사에 붙여 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백제의 동성왕이라는 사람을 아십니까? 마치 관우와 조자룡을 섞어 놓은 듯한 인물이었습니다. 싸움터에서는 더할 나위 없는 명장이었고, 지략도 뛰어났지요. 국내 자료에는 별다른 기록이 없는 사람이지만, 백제와 북위가 한참 전쟁을 하고 있을 때 제 3자였던 남제에서 남긴 기록을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아요.”
역사 이야기가 나오자, 야설록 상임고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옆에 있던 화이트보드에 직접 지도까지 그려가면서 짤막한 강의를 시작한다.
백제 동성왕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백제와 북위의 전쟁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환인과 환웅의 기원인 ‘환’이라는 국가와 삼신할미의 기원인 ‘낙원 마고성’에 이르더니 구약성서의 이야기까지 술술 엮여 들어간다. 이 정도 수준이면 인터뷰에서 옆길로 새다가 책이라도 한 권 뚝딱 써 낼 기세다. 얼마나 많은 자료를 찾아봤으면 저렇게 끝도 없이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는 걸까.
역사 이야기가 나오자 강의(?) 삼매경에 빠진 야설록 상임고문.
그의 사무실은 4면 중 2면에 갖가지 설정자료가 붙은 커다란 지도가 있고, 다른 한 면에는 책이 빼곡하게 들어찬 책장이 있다. 나머지 한 면인 창문 쪽에는 거뭇거뭇해진 화이트보드가 자리잡고 있다. 사무실이 풍기는 분위기 만으로도 야설록 상임고문이 <패 온라인>의 세계관에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느낄 수 있었다.
“예, 사실 유저들은 게임을 하면서 보통 퀘스트 내용은 읽지 않죠. 그래서 저는 그냥 반복학습을 시킬 생각입니다. 퀘스트를 할 때마다 NPC가 세계관 이야기를 합니다. 처음에는 장황하게 이야기하고, 반복될수록 요약된 내용을 이야기합니다. 복잡한 이야기를 늘어 놓기보다 게임에 꼭 필요한 배경지식을 반복적으로 알려주고, 스토리의 재미를 느낄 수 있는 퀘스트는 선택적으로 즐길 수 있게 준비하고 있죠.”
RvR의 형태로 대립하는 3개 국가 중에서 이국과 하국은 중국 설화에 기반을 두고 있고, 오픈 베타테스트 이후 패치로 공개될 묘국은 동남 아시아의 전설을 참고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야설록 상임고문은 인터뷰 자리에서는 정작 <패 온라인>의 스토리를 자세하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말이 필요가 없다는 자신감일까. <패 온라인>의 이야기가 궁금한 독자는 103회까지 업데이트된 <패 온라인> 공식 홈페이지(//paeonline.ndolfin.com)의 연재소설을 확인해 보는 편이 더 나을 것 같다.
“세계관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패 온라인> 만의 독자적인 문자체계도 만들었습니다. 각각의 문자가 한글에 대입되죠. 게임상의 간판 이름 같은 것들이 이 문자로 쓰여 있고, 이 문자만으로 유저 간의 채팅도 가능합니다. 서로 알아본다면 말이죠.(웃음) 유저들이 이 문자를 꼭 알아야 할 필요는 없지만, 이 문자를 익힌 사람들은 게임에서 여러모로 편할 것입니다.”
10월부터 만날 수 있는 <패 온라인>의 전장 |
“사실 시스템적인 부분은 거의 다 구현된 상태입니다. 오늘 인터뷰에서 말씀 드린 부분은 거의 다 적용되어 있죠. 지금은 화장을 하고 있는 단계입니다.”
<패 온라인>의 첫 번째 클로즈 베타테스트는 오는 10월경이 될 것이라 한다. 9월 중순에는 공식 홈페이지를 개편할 예정이다. 아직 한 번도 외부에 검증되지 않은 게임에 대한 이야기인데도 야설록 상임고문은 어서 모두에게 선보이고 싶다는 듯 자신감이 넘치는 말투로 TIG 독자들에게 인사를 전했다.
“지난 25년 동안 글을 써 오면서 항상 추구한 것이 ‘재미’입니다. 재미있지 않으면 안 되죠. 만화책도 1권이 재미없으면 2권부터 어떤 놀라운 이야기가 펼쳐져도 독자들이 주목하지 않습니다. 재미로 생존이 갈리는 환경에서 지금까지 활동해 왔습니다. 하드코어 유저든, 라이트 유저든 상관없이 똑같은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큰 목표이고,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한국에서는 이런 게임도 나오는구나’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도록 만들어 보이겠습니다.”
마무리는 TIG의 손가락 로고 포즈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