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 중국 베이징에서 <아이온> PvP 대회가 열렸다. 이번 대회는 <아이온>의 중국 퍼블리셔 샨다에서 자체적으로 열었는데, 결승전 우승팀은 사전에 초청된 한국 대표와 ‘한중 대항전’을 벌일 예정이었다. 한국 대표로는 BJ로 활동 중인 검은검객, 러너, 우레가 출전했다.
한중 대항전 결과는 당일(15일) 현지 언론을 통해 접할 수 있었다. 한국팀이 져서 3위에 머물렀다는 내용이었다. 멋지게 승리하고 돌아오길 기대했던 필자로서는 아쉬운 소식이었다.
그런데, 현지 언론의 보도를 보면서 머릿속에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한국팀은 이벤트 형식으로 중국 대회 우승자와 붙을 예정이었는데, 갑자기 3위라는 등수로 토너먼트 결과가 발표됐다. 만일 우승자와의 대결을 순위에 넣는다면 패배해도 2위에 머물러야 한다. 3위라는 등수가 나올 수 없었는데, 사전에 알고 있던 대진표와 실제 결과가 너무나 달랐다.
현지 게임매체 기자에게 관련 내용을 캐물은 결과, 경기 당일에 룰이 변경됐다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당시 BJ들과 함께 중국에 출장 중이던 후원 업체와의 통화에서도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거기에 여러 가지로 한국팀에 불리한 조건이었다는 이야기였다.
경기 당일 베이징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한국 대표팀 입국 날짜에 맞춰 이들을 직접 찾아가 이야기를 들어 보기로 했다. 인터뷰에는 출전 선수 검은검객, 러너, 우레와 이들의 소속사인 ‘지스타 엔터테인먼트’의 정지호 팀장이 참여했다. /디스이즈게임 리스키
왼쪽부터 검은검객(석현준), 러너(윤대훈), 우레(한동학).
디스이즈게임이 한국팀 멤버들을 만난 곳은 인천의 한 카페였다. 그들은 대회 종료 후 한국에 돌아오는 비행기 시간이 늦어져 인천에서 하룻밤을 묵고 인터뷰 자리에 나왔다고 했다.
해외 대회 참가 소감은 어떨까. 현지에서 룰이 어떻게 변경된 걸까. 패배의 원인은 무엇일까. 물어보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았는데, 정작 이들을 앞에 두고 어떤 얘기를 먼저 꺼내야 할지 망설여졌다.
“많은 분들이 기대해 주셨는데, 결과가 아쉽게 나와 한국 유저분들께 정말 죄송합니다.” (러너)
인터뷰 자리에서 러너 BJ가 가장 먼저 꺼낸 말이었다. 경위야 어찌됐든 태극기를 달고 나간 시합에서 패배한 것에 대한 사과였다. 그렇게 인터뷰는 자연스럽게 경기 당일의 이야기로 흘러갔다.
■ “이벤트에 게스트로 초청해놓고, 갑작스럽게 대회에 출전시켰다”
이들이 이번에 중국을 방문했던 것은 사실 한중 국가대항전에 한국 대표로 출전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대회를 개최한 중국 퍼블리셔 샨다 게임즈에서 요청한 것은 ‘중국 유저들 사이에게도 유명한 검은검객을 비롯해 한국의 BJ들을 대회에 게스트로 초청하는 것’이었다.
<아이온> 중국 서비스 3주년을 기념해 개최된 PvP 대회에서 최종 우승자와 이벤트 성격으로 대결하고, 팬 서비스 차원에서 현지 유저들과도 PvP 이벤트를 진행하자는 게 처음 샨다의 요청이었다.
샨다 쪽에서 국내 BJ 검은검객을 직접 언급한 것은 그의 <아이온> PvP 영상이 유튜브를 통해 중국 유저들에게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중국 유저들 사이에서는 국내와 달리 캐릭터 상성에 심하게 매달리는 경향이 있어 ‘살성은 마도성에게 절대 이기지 못한다’는 것이 하나의 공식처럼 각인돼 있었다.
그런데 BJ 검은검객의 영상에서는 살성 하나로 수많은 캐릭터를 ‘학살’하는 모습이 펼쳐져 현지 유저들 사이에서 큰 화제를 모았다. 검은검객은 중국에서 ‘살통령’으로까지 불리며 유명해졌다.
우리나라 BJ의 <아이온> 영상은 중국 유저들 사이에서도 인기다.
참가 요청을 받은 것은 검은검객의 소속사인 지스타 엔터테인먼트(이하 GE)였다. GE 측에선 다시 한 번 ‘정식으로 대회에 참가하는지, 아니면 이벤트에 게스트로 참가하는지’에 대한 확인을 요청했고, 최종적으로 ‘이벤트에 참가했으면 한다’는 답변을 받았다.
이에 따라 GE 소속의 BJ 검은검객, 우레, 러너가 나가기로 했고, 캐릭터도 각자 방송에서 사용하던 것 처럼 살성·살성·검성으로 결정됐다. 영상으로만 보던 ‘살통령’과 직접 만나는 것이 현지 유저들에게도 좋은 호응을 얻을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번 대회 타이틀이 ‘한중 국가대항전’이라고 결정된 것도 TIG 기사를 보고 처음 알았어요. 저희에게 온 요청은 단순히 이벤트에 게스트로 참여하는 것이지, 공식 대회 참가가 아니었거든요. 만일 한국 대표팀 자격으로 대회에 참가한다는 것을 사전에 알았다면 클래스 조합부터 멤버 선정까지 완전히 달랐을 거예요.” (정 팀장)
“처음 예정은 최종 우승자와의 이벤트 대결이었는데, 다른 팀의 참가자들이 자신들도 한국 선수와 붙어보고 싶다고 주최 측에 요청해 경기 당일에 대회 내용이 변경됐어요. 그쪽(샨다) 입장에서는 현지 유저를 위한 행사다 보니 이들을 만족시켜야 했고, 저희는 초청받아 간 입장에서 이를 거절할 수가 없었죠. 그래서 178 대표팀과 전 대회 우승팀, 그리고 예선에서 탈락한 뚜오완 대표팀까지 저희와 붙게 됐어요.” (정 팀장)
GE 정 팀장은 그렇게 이번 대회 참가의 경위를 밝혔다. 처음부터 이벤트 및 현지 팬 서비스를 예상하고 라인업을 구성했는데, 현지에서 갑자기 정식 대회 참가가 결정돼 적잖이 당황했다고 했다.
사전에 공개된 대진표. 한국팀은 결승 종료 후 이벤트 대결만 참여할 예정이었다.
■ 예상을 벗어난 룰 변경과 연속된 시합
사실 여기까지만 들어봤을 때는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었다. 중국 참가자 입장에서는 한국 유명 BJ와 PvP를 경험할 수 있는 귀중한 기회가 될 테니 이것 또한 팬 서비스의 일환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갑작스럽게 일정이 변경되면서 급조된 룰이 한국팀의 목을 조였다. 중국의 PvP 대회에서는 한 시합마다 3판 2선승 제를 적용하면서 판마다 모든 스킬의 쿨타임(재사용 대기시간)을 회복할 수 있도록 10분 정도의 텀을 둔 것이다. 이에 따라 수호성의 ‘주신의 갑옷’, ‘이중 갑옷’이나 마도성의 ‘빙설의 갑주’ 등 쿨타임이 긴 스킬이 시합마다 사용됐다.
검은검객은 “첫 라운드에서 상대 수호성의 스킬을 모두 빼놓는 데 성공하고 다음 판에서 이기려고 했더니 경기 시작은 커녕 사회자 멘트만 10분이 넘게 이어졌다. 결국 다음 판에서도 모든 스킬이 돌아온 ‘완전체 수호성’을 상대해야 했다”고 당시의 상황을 전했다.
중국의 3개 대표팀이 연속으로 한국팀과 경기를 치른 것도 문제가 됐다. 3판 2선승인 점을 감안하면 3:3 대전을 총 9번 치른 것이다. 당시 경기 도중 사용하도록 모든 캐릭터에게 ‘회복의 결정’ 아이템(생명력·정신력 5,000 회복)이 지급됐는데, 이 아이템은 한 번 사용하면 어비스 신약과 함께 30분의 쿨타임이 적용된다.
한국팀은 연속된 경기에서의 어비스 신약 사용을 위해 이를 활용할 수 없었던 반면, 중국팀은 차례가 한 번 씩이었기 때문에 모든 선수가 경기 도중 회복의 결정으로 체력을 회복했다.
중국은 3개 팀이 차례로, 한국은 1개 팀이 연속으로 경기를 치뤘다.
“경기 도중 회복의 결정을 사용해도 된다는 얘기를 대회가 다 끝나고 처음 들었어요. 저쪽 스태프가 왜 회복의 결정을 쓰지 않았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저희는 회복의 결정을 쓰면 신약도 같이 쿨타임이 돌기 때문에 더 불리해진다고 했죠. 그런데 대회 스태프가 이걸 모르더라고요. 결국 다 끝나고 직접 보여주고 나서야 처음 알았다고 했어요.” (러너)
“살성으로 저쪽 팀 마도성을 거의 이기고 있었어요. 강철 보호막과 빙설의 갑주까지 다 빼는데 성공했죠.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 회복의 결정을 쓰고 단숨에 체력이 꽉 차더라고요. 그런데 이런 상황이 마도성 뿐만 아니라 수호성, 치유성, 정령성과의 싸움에서 모두 벌어졌어요. 저쪽 팀은 한 판이 끝나면 다음 시합이 없어서 회복의 결정 사용에 아무런 제한이 없었습니다.” (검은검객)
러너와 검은검객은 당시의 상황에 대해 지금도 어이없어하는 분위기였다. 모든 참가자에게 공평하게 아이템이 지급됐지만, 정작 진행 방식이 공평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불리한 상황에서 경기를 진행한 한국팀의 현장 모습.
한국팀을 압박한 것은 변경된 룰과 회복 아이템만이 아니었다. 중국팀의 클래스 조합, 스티그마, 신석 선택 등도 오로지 한국팀을 겨냥해 세팅됐다. GE 정 팀장은 “한국팀의 캐릭터가 살성·살성·검성 조합이라는 것이 사전에 공지돼 모든 참가자가 이에 대한 준비를 해왔다”고 밝혔다. 반면에 한국팀에게 사전에 전달된 중국 선수들의 클래스 조합은 경기 당일 대부분 바뀌었다.
“처음 중국 출장 이야기를 들었을 때, 중국 선수의 클래스 조합도 같이 전달받았어요. 그래서 출장 전까지 해당 조합을 상대로 국내에서 많이 연습하고 대비책도 세워 뒀죠. 그런데 막상 가보니 저쪽 조합이 완전히 달라져 있더라고요.” (러너)
“대회용 캐릭터를 받으면서 신석 세팅을 자유롭게 하도록 종류별로 신석을 지급받았어요. 그런데 저희는 경기가 계속 이어지다 보니 상대 조합에 따라 신석을 바꿀 기회가 없었죠. 중국 선수는 모두가 저희 조합인 살성·검성에 맞춰 실명 신석을 세팅했고요.” (우레)
러너는 상황을 설명하면서 “마치 9:1로 레이드를 당하는 느낌이었다”고 표현했다. 당시 대회 참가자 모두가 처음부터 한국팀만을 노리고 칼을 갈았다는 것이다. 또, 정작 중국 선수끼리 붙었던 대회 본편에서는 게임 내 소셜액션으로 가위바위보를 하고 패자가 그냥 죽어주는 등 대회답지 않은 모습도 연출됐다고 했다.
■ 최선을 다해 첫 시합은 이겼지만…
물론 한국팀이 모든 시합에 패한 것은 아니다. 첫 시합에서 중국팀은 마도성·치유성·검성의 조합으로 출전했고, 한국팀에서는 검은검객이 1번으로 출전해 순식간에 마도성을 쓰러트렸다. 다음 차례인 치유성은 우레에게, 검성은 러너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후 진행된 첫 팀과의 나머지 대결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이어졌다.
첫 시합 1라운드 영상
빨간 옷의 살성이 검은검객, 하얀 옷의 살성이 우레, 창을 든 검성이 러너 선수다.
경기 전에 무대에 선 양국 선수. 왼쪽이 한국팀이다.
그런데 두 번째 시합에서 양상이 바뀌었다. 상대 팀의 수호성·정령성·궁성 조합에 맞춰 한국팀의 출전 순서 변경을 요청했는데, 대회측에서 이를 거절한 것이다.
“상대 팀 조합에 수호성이 있는 걸 보고, 저희의 살성·살성·검성에 맞춰서 수호성이 1번으로 나올 거라고 예상했어요. 그래서 저희도 출전 순서 변경을 요청했죠. 검성을 제일 앞에 세워 어떻게든 수호성을 이겨야 살성으로 나머지 클래스를 상대할 수 있거든요. 그런데 주최측으로부터 ‘순서는 지금 변경할 수 없다. 변경하려면 그 다음 시합부터 가능하다’는 대답을 받았어요. 결국 처음 순서대로 살성 두 명이 먼저 나갔고, 예상대로 저쪽 1번 수호성에게 무너졌죠.” (러너)
“두 번째 시합과 세 번째 시합에 수호성이 한 명씩 있었는데, 둘 다 ‘반격방어’ 스티그마를 세팅했더군요. 사실 PvP에서는 잘 쓰지 않는 스킬로, 일종의 ‘대 살성용 스킬’이에요. 두 번째 시합에서 저쪽 수호성이 ‘반격방어+주신의 갑옷’으로 버티다 ‘회복의 결정’까지 쓰니 저희 살성은 답이 없었죠. 살성 두 명이 당하고 검성 차례가 돼서 겨우 수호성을 이겼어요. 다음 차례인 정령성이 시작부터 대역 스킬을 쓰면서 달려들길래 어떻게든 버티면서 정령 먼저 녹이려고 했는데, 정령 체력 회복 스킬과 회복의 결정이 동시에 튀어나오더군요. 두 번째 시합은 그렇게 패배했습니다.” (러너)
상대 팀의 조합을 보고 긴급 작전회의 중인 한국팀.
세 번째 시합 또한 비슷하게 진행됐다. 두 번째 시합에서의 순서 변경 요청이 겨우 받아들여져 세 번째 시합에서는 검성이 1번으로 출전했고, 상대편은 수호성, 치유성, 마도성의 순서로 출전했다. 검성 러너가 중국팀 수호성을 상대로 회복의 결정까지 빼는 등 선전했지만 결국 패배. 나머지 두 명의 살성이 수호성과 치유성을 모두 쓰러트렸지만 마지막 남은 마도성 앞에 무너졌다.
“지금도 생각나는 건 첫 번째로 상대했던 팀이예요. 유일하게 저희에게 졌는데, 대회가 다 끝나고 나서 패배를 인정할 수 없다고 재시합을 요청하더라고요. 저희는 2, 3 시합을 모두 진 상황에서 그나마 이겼던 팀한테까지 지게 되는 게 탐탁치 않았죠. 하지만 요청을 거절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라서 결국 받아들였습니다. 대회 결과와 관계없는 승부였고, 결국 대충 상대해서 대충 져줬어요. 다 끝나고 숙소에 와서는 정말 멍하니 누워만 있었죠.” (검은검객)
■ ‘한국 공식 대회 룰’이 없던 것이 아쉬웠다
전체적인 이야기를 들어 보면, 일방적인 룰 변경과 공정하지 못한 아이템 사용이 패배의 큰 요인으로 작용한 셈이다. 그들은 국내에서 활성화돼 있는 PvP 룰을 적용했다면 스킬 쿨타임 계산과 그에 따른 스킬 운용, 컨트롤 등으로 승산이 있었을 텐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지금도 아쉬움이 남는다고 했다.
경기 당일 적용된 룰은 국내 대회와 많은 차이가 있었다.
GE와 참가 BJ들은 국내 PvP 룰에 대해 주최측에 사전 설명했다. 하지만 중국과 한국 유저의 인식 차이와 ‘NC 공식 대회 룰’이 아니라는 이유로 기각됐다.
필자가 인식 차이라고 언급한 부분은 정확히 말하면 ‘PvP에 대한 유저 인식’이다. 국내에서는 투기장과 필드전을 기준으로 스킬을 운용하고 무빙과 모션캔슬 등 컨트롤이 PvP에서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반면 중국에서는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한 번에 모든 스킬, 아이템을 사용해 밀어붙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컨트롤보다 스킬 성능에 모든 것을 의존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중국 대회에서는 라운드마다 스킬 쿨타임을 회복할 시간이 주어졌다.
또 다른 차이 하나는 ‘NC 공식 대회 룰’이다. 한국에서는 아직 공식 PvP 대회가 개최된 적이 없고, 유저가 직접 개최한 대회는 ‘공식 대회’라고 여기기 힘들다는 것이다.
“샨다의 경우 유저들에게 매우 약한 편이더군요. 이번 대회 룰이 변경된 것도 현지 유저 의견에 최대한 맞춘 거죠. 물론 저희 의견도 많이 들어주려고 했습니다. 한국의 공식 룰을 알려주면 거기에 맞추겠다는 이야기도 있었어요. 중국 현지에서는 이런 대회가 자주 열리는 편이라서, <아이온>의 종주국인 한국이라면 좀 더 많은 대회가 열리고 세분화된 룰도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죠. 그런데 정작 저희에게는 거기에 맞서 내세울 ‘한국 공식 룰’이 없었어요. 그래서 샨다에서도 많이 당혹스러워 하더라고요. 한국팀 의견을 들어주고 싶었는데 현지 유저를 납득시킬 ‘근거’가 없었으니까요.” (정 팀장)
정 팀장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하며 허탈하게 웃었다. 같이 인터뷰에 참석한 3명의 BJ도 국내에 이런 공식 PvP 대회가 없다는 점을 아쉬워했다.
■ 중국 출장 중의 에피소드
대회 이야기를 계속 나누다 보니 분위기가 점점 무거워졌다. 카페에서 진행된 인터뷰였지만, 이쯤 되면 커피 대신 소주를 놓고 이야기하는 것이 어울릴 정도였다. 그래서 잠시 다른 주제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모처럼 중국을 방문한 것이니 색다른 에피소드도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중국 출장에서 가장 기억에 남은 건 현지 업체와 언론에서 VIP 대우를 받은 거예요. 사실 외국 선수라고 멀리할 줄 알았는데, 도착하니까 중국 기자들도 많이 오고 호텔에서 만찬회도 열렸어요. TV에서 연예인들이 카메라 세례를 받는 모습을 직접 경험하고 나니까 정말 느낌이 새롭더라고요.” (우레)
토요일에는 한국팀을 초청해 만찬회 이벤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현지 코스튬 플레이어들과 함께 기념 사진도 촬영했다.
“러너는 외모 덕분에 현지에서 여성 팬들이 급증했어요. 여러 명씩 와서 기념 사진도 찍었고요. 어떤 분은 커플로 왔는데 여성분이 러너한테 팔짱을 끼니까 남자친구분이 화를 냈어요. 저희는 말도 안통하고 상황도 애매해서 그냥 도망쳐 나왔죠(웃음)” (정 팀장)
여성 팬 이야기가 나오자 인터뷰 자리는 금세 웃음바다로 변했다. 인터뷰 동안 말을 아끼던 검은검객도 ‘호텔에서 열린 만찬회’에서 뭔가가 떠오른 듯 입을 열었다.
“토요일에 베이징 국제 무역 호텔에서 열린 만찬회 이벤트가 정말 인상깊었어요. 그날 이벤트 회장에서 참가 유저분들과 깜짝 PvP 대결도 했는데, 인터넷 핑이 700이 넘는 거예요. 살성으로 스킬 버튼을 누르면 제자리에 멈췄다가 3초 뒤에 스킬이 나갔어요. 한국 선수라고 갔는데 아무것도 못하고 참가자 분들한테 ‘순삭’당하니까 은근히 실망하는 눈치더라고요.” (검은검객)
이벤트 현장에서는 중국 유저와의 깜짝 PvP 대회도 진행됐다.
“호텔 이벤트에서 인터넷 상태가 그렇게 안 좋은 걸 보고 갑자기 대회장이 걱정돼서 밤 11시에 스태프에게 사정해서 대회장 PC를 체크해 봤어요. 다행히도 대회장은 인터넷 속도가 한국만큼 빨랐죠. 대회장에 갔는데 가장 놀랐던건 그 늦은 시간에도 <아이온> 외에 다른 게임 대회가 실시간으로 진행되고 있던 모습이에요. 그것도 TV 생방송으로요. 국내 게임채널에선 <스타크래프트>나 <LOL> 같은 게임이 주를 이루는데, 중국에서는 MMORPG 대회도 정말 많이 열리고 있었어요. 중국에서 게임문화가 이렇게 발달했을 줄은 몰랐습니다.” (검은검객)
“대회 방청객 매너도 인상깊었어요. 첫 시합에서 검은검객이 순식간에 상대 2명을 쓰러트렸을 때 하필 대회 중계용 옵저버 PC가 에러 때문에 화면이 안 나왔어요. 화면이 돌아왔을 땐 벌써 중국팀 2명이 쓰러지고 세 번째 선수가 나와 있어서 방청객들이 어리둥절 해 있었는데, 사회자가 설명하니까 다들 박수를 쳐주더라고요. 첫 시합에서 저희가 완전히 이겼을 때도요. 중국팀이 졌을 때 야유가 나오면 어쩌나 싶었는데 정말 안도했어요.” (러너)
한국팀에게도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준 중국 방청객들.
■ 국내에서도 공식 PvP 대회가 활성화되기를…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필자는 다시 질문을 바꿔 봤다. “국내 룰로 중국 선수들과 다시 붙는다면 이길 자신이 있는가”였다.
이 질문에 3명은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비단 자신들이 아니더라도, 컨트롤 수준과 PvP 센스는 한국 유저들이 중국 유저들보다 낫다고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방송이나 게시판, 각종 커뮤니티를 통해 서로 PvP 노하우도 공유하고, 자신의 스킬 운용에 대한 연구도 활발해요. 캐릭터 밸런스가 맞지 않아도 이를 컨트롤로 극복하려는 분들도 있고요. 중국 유저들은 그런 부분이 부족했습니다. 공정한 룰로 경기를 한다면 한국 유저가 확실하게 이길 거라고 생각합니다.” (검은검객)
“국내에서도 이번 중국 대회처럼 대규모 공식 PvP 대회가 열리고 많이 활성화됐으면 좋겠어요. 정식으로 한국에서 대표를 선발하고, 다른 나라의 유저들과 붙어서 <아이온> 종주국의 위상을 높였으면 좋겠습니다.” (러너)
“적어도 한국 유저가 해외 대회에 나갔을 때 ‘한국의 경기 룰은 이렇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당연히 국내에서 그만큼 공식 PvP 대회가 열렸으면 하고요. 엄연한 한국 게임인데 다른 나라에 뒤처지면 안되지 않을까요.” (우레)
중국 유저보다 한국 유저의 컨트롤 실력이 좀 더 우위에 있다고 한다.
그들의 자신 있는 대답을 들으며 필자는 아꼈던 마지막 질문을 건넸다. 이번 대회의 참가 소감과 한국 유저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었다.
“출발하기 전부터 많은 주목을 받아서 부담감이 컸습니다. 대회 진행이 이렇게 돼서 많이 허탈했던 부분도 있었고요. 무엇보다 한국 유저분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다음에 기회가 있다면 지금과 다른,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검은검객)
“다른 나라에서 열린 MMORPG 대회에 한국 대표로 초청받을 수 있었다는 게 정말 뿌듯합니다. 같이 간 팀원들에게 패배를 두려워하지 말고 최선을 다하자고 했는데, 다들 지켜줘서 고맙고요. 비록 저희는 졌지만, 그래도 한국 유저의 실력이 외국보다 훨씬 높습니다. 다음번에는 더 준비해서 당당하게 ‘한국팀 1등’이라는 소식을 들려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러너)
“중국 유저들이 살성 클래스를 많이 무시해서 본고장의 살성을 보여주려 했는데, 아쉬운 결과를 전해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래도 같이 간 모두가 최선을 다해 뿌듯하고, 다음 기회가 있다면 ‘한국 살성의 무서움’을 외국 선수들에게 보여주고 싶습니다.” (우레)
■ 우리 선수들이 당당하게 해외에서 우승하는 그날까지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필자는 많은 생각에 빠졌다. 중국 대회에 게스트로 참가했다가 갑작스럽게 대회 출전이 결정되고, ‘작정한’ 중국 선수들과의 경기에서 최선을 다한 세 명의 BJ들. 비록 경기 결과는 패배로 끝났지만, 결과에 굴하지 않고 더 나은 발전과 승리를 선언한 그들은 이미 BJ라기보다 어엿한 ‘한국 대표 선수’의 모습이었다.
이미 지난 일을 되돌릴 수는 없겠지만, 이번 대회는 적어도 한국에 ‘해외의 PvP 대회 수준’을 알리고 많은 유저들에게, 그리고 참가자 3명에게 발전의 기회를 주는 계기가 됐다고 생각한다.
국내에서도 커다란 경기장을 빌려 성대하게 <아이온> PvP 대회를 개최한다면 어떨까. 국내 유저의 PvP 콘텐츠에 대한 관심을 익히 알고 있는 필자였기에, 이런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 어느 나라보다도 <아이온>을 좋아하고 많은 유저가 게임을 즐기는 ‘종주국’으로서, 해외 언론에 알려질 정도의 수준 높은 대회를 열 수 있다면, 같은 한국인 <아이온> 유저로서 이만큼 자랑스러운 일이 어디 있을까?
“국내에서 공식 대회가 열리고, 국가 대표를 선발해 외국 선수들을 이기고 싶다”는 그들의 소원이 기사를 쓰고 있는 지금도 머릿속에서 잊혀지지 않는다. 어떻게 본다면 충분히 실현 가능성이 있고, 또 수많은 유저가 공감하는 소원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한국에서, 혹은 해외에서 열릴지 모를 <아이온> 국가대항전에서 당당하게 태극기가 1위 자리에 걸릴 수 있기를 기원한다. 그리고, 멀리 중국까지 가서 최선의 경기를 보여준 검은검객, 러너, 우레 선수에게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