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12월 베타 서비스를 시작한 넥슨 MMORPG <일랜시아>는 아직 서비스 중이다. 그간 넥슨은 셀 수 없이 많은 게임을 개발하고 운영하고 접었지만 <일랜시아>는 조용히 자기 수명을 이어가고 있다. 전체 용량 600MB도 넘지 않는 게임에는 아직도 유저가 모인다.
<일랜시아>는 이제 게이머에게 유력한 선택지가 아니다. 그런데 오늘날, 20년 전 MMORPG <일랜시아>를 다시 꺼내 든 사람이 있다. 대학교 졸업 작품으로 <내언니전지현과 나>를 제작한 박윤진 감독은 2년 동안 <일랜시아> 유저들을 인터뷰하며 게임의 궤적을 추적했다.
다큐멘터리는 <일랜시아>엔 '추억'만으로 매듭지을 수 없는 독특한 가치가 있다고 설명한다. 미디어가 '흉가'라고 표현하고 유저들마저 '버려진 게임'이라고 자조하는 <일랜시아>는 '넥슨 클래식 RPG'라는 타이틀 이상으로 값진 게임이라는 것이다.
게임의 업데이트는 2008년을 마지막으로 멈췄다. 현재는 유지·보수만 가까스로 이루어진다. 대부분의 유저가 매크로를 쓴다. 그럼에도 게임은 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랜시아>에는 게임을 진심으로 아끼면서 현실에서 누리지 못했던 것들을 얻는 유저들이 있다.
19일 서울 모처에서 박윤진 감독을 만났다.
다큐멘터리 <내언니전지현과 나>를 찍은 '나'는 누구인가?
박윤진 감독: 16년째 <일랜시아>를 즐기고 있는 박윤진이라고 한다. 다큐멘터리는 대상에 대한 애정이 있어야 찍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2년 동안 이 주제에 애정을 가지고 영화를 찍었다. 내언니전지현은 내 <일랜시아> 아이디다.
다큐멘터리를 찍으면서 몇 명이나 만났나?
10명에서 15명 정도 만났다. 대부분 길드원이다.
요즘 몇 명이나 <일랜시아>를 하고 있나?
한 사람이 여러 계정을 켜놓는 경우가 있어 정확한 계측은 어렵다. 예측하기로 피크타임 때 200~300명 정도 게임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일랜시아>라는 게임을 잘 기억하지 못하거나, 아예 어떤 게임인지 모르는 독자가 많을 것 같다.
1999년 정식 서비스를 시작한 넥슨의 세 번째 MMORPG다.
레벨이 없고 요리, 미용, 재단, 낚시 등의 어빌리티를 원하는 만큼 자유롭게 키운다는 파격적인 설정으로 주목받았다. 이 어빌리티가 얼마나 다양하냐면, 같은 맵에 다른 유저가 있어야만 어빌리티를 올릴 수 있는 '대화', 우체국에서 아이템을 받아 다른 NPC에게 건네주는 '배달', '흥정' 같은 것들도 있다.
<일랜시아>는 "이런 것도 있어?"라고 생각할 정도로 놀라운 디테일이 살아있는 게임이다. 요리도 어떤 재료를 첨가하느냐에 따라 다른 결과물이 나오고, 낚시로 낚을 수 있는 물고기의 종류도 수십 종이다.
옛날에는 꽤 많은 인기를 끌었지만, 지금은 이제 워낙 오래됐다 보니 소수의 유저만 남은 게임이다.
아기자기한 도트 디자인 덕에 게임에 여성 유저가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맞다. 확실히 지금도 여성 유저 비율이 다른 게임보다 높은 편이다. 다큐멘터리를 찍으면서 만난 유저들도 여성이 많다. 다큐멘터리를 찍으면서 다른 클래식 RPG도 접속해봤는데, <일랜시아>의 여성 비율이 제일 높은 것 같았다.
듣고 보니 <일랜시아>가 굉장히 선구적인 타이틀이라는 생각이 든다. 생활형 콘텐츠와 교류를 전면에 내세운 MMORPG인데 <마비노기>(2004)보다 수년 앞섰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힐링 코드는 <동물의 숲>과 유사한데 시리즈 첫 작품이 2001년에 출시됐다.
<일랜시아>밖에 몰라서 예시로 든 게임들은 잘 모른다. (웃음)
요즘 <동물의 숲>(모여봐요 동물의 숲, 2020)이 워낙 뜨다 보니 유튜브로 플레이 영상을 찾아봤는데 <일랜시아>와 비슷한 점이 많았다. <동물의 숲>은 "이거 해야만 해"라는 미션이 없어서 유저가 스스로 일을 찾아서 하지 않나? 마찬가지로 <일랜시아>도 유저가 뭔가를 해야만 한다는 강박이 없다. 업데이트가 워낙 오랫동안 멈춰서 할 게 없어진 것도 있다.
다큐멘터리를 찍으면서 <마비노기>를 해봤다. 들어갔는데 캐릭터랑 세계가 너무 귀엽고 예쁜데 해야할 일일 퀘스트 목록이 숙제처럼 쌓여있더라. 하나하나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랑 안 맞더라. <일랜시아>에는 "오늘은 이걸 하세요" 같은 요소 자체가 없다.
그렇게 샌드박스처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일랜시아>인데 왜 매크로를 쓰고, 성장 루트를 공유하고, 부주를 쓸까? 다큐멘터리에는 <일랜시아>의 힐링 요소와 이전투구가 나란히 등장한다.
뭔가를 해야만 한다는 강박이 없는데도 유저들은 <일랜시아>에서 치열하게 경쟁 활동을 한다. 어디서 한국 유저들이 유독 <동물의 숲>을 치열하게 한다는 글을 봤는데, 그게 한국 게이머의 특징인 것 같기도 하다.
<일랜시아>는 노력에 따른 성취가 분명하다. 다른 RPG와는 달리 <일랜시아>는 캐릭터에 문제가 생겨도 직업을 자유롭게 바꿀 수 있다. 내가 인터뷰한 사람들은 현실에서 경쟁하고 노력해도 즉각적인 성취를 얻지 못했는데 <일랜시아>에서는 노력한 만큼 오르는 캐릭터를 보면서 만족감을 얻는 경우가 많았다.
같은 학교에 <일랜시아> 친구가 있었는데 시험 기간이면 꼭 <일랜시아> 매크로를 틀어놓는다고 그랬다. 오늘의 시험 공부는 수치로 올라가지 않지만, 게임은 딱 얼만큼 올랐다라는 게 눈으로 보이니까 그게 만족스럽다는 것이다. 시험은 망칠 수도 있지만, 게임에서 올린 능력치는 일한 만큼 정직하게 반영되니까.
또 나 자신은 이 세상에서 성장하고 싶은데 현실에서 수치화된 보상을 얻기 힘들지 않은가? 그래서 게임을 통해서 대리만족을 하고 싶은데, 이제는 너무 바빠서 시간이 없다고들 한다. 그래서 시간이 없는 사람들이 매크로를 하거나 돈을 주고 내 캐릭터를 대신 키워주는 부주를 고용하는 것이다.
요새 모바일 게임에도 자동 사냥이나 돈을 주고 성장을 사는 요소가 들어가지 않나?
인터뷰를 진행 중인 기자의 스마트폰에도 지금 자동 사냥이 돌고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아이디를 맡기면서까지 캐릭터를 키워놓으려는 심리를 선뜻 납득하기는 어렵다. 자유도 높은 RPG를 표방하는 <일랜시아>라면 더더욱.
유저들 사이에 캐릭터 하나쯤은 정석대로 키워놔야 <일랜시아>의 높은 자유도를 제대로 즐길 수 있다는 심리가 있다. 사람들이 본 캐릭터 하나를 가지고 있어야 마음이 놓인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 캐릭터에 접속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우리도 '취미'생활을 '취미'라고 부르고 본업은 따로 있다고 말하지 않나? 이런 느낌으로 본 캐릭터를 제대로 갖춰놓지 않고 게임하는 것을 마음의 짐처럼 생각하고 있다. 제대로 키워놓은 캐릭터 하나를 갖춰놓고 그것으로 마음의 위안이 되게 한 뒤 <일랜시아>를 자유롭게 플레이하는 거다.
다큐멘터리는 유저들이 현실에서는 얻지 못했지만 <일랜시아>를 통해서 얻을 수 있었던 것들을 말한다. 지금까지 이야기했던 것 이외에 또 어떤 요소를 발견했는지?
익명성에서 오는 소통의 평등이 있다.
우리나라는 사람들끼리 너무 나이를 따지고, 직책을 따진다. 누군가를 이름으로 부르는 일이 잘 없다. 그 사람을 직책으로만 불러서 이름을 까먹는 경우도 더러 있다고 하지 않나? 그런데 게임에서는 누구 님, 누구 님 이렇게 부른다. 현실에는 없는 종류의 소통이 유저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다.
정리하자면 힐링,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될 수 있다는 희망, 열린 소통 이런 것들이 현실에는 없고 <일랜시아>가 채워주는 것들이다.
감독은 물론 인터뷰이까지 하나같이 매크로의 필요성을 적극 인정하고 있다. 요컨대 레벨 디자인 조정이 사라진 <일랜시아>에 매크로가 생명력을 불어넣었다는 이야기인데.
이제는 매크로가 꼭 필요해진 상황이다. 매크로를 돌리고 있으면 (매크로가) 없던 시절 유저들은 "대체 어떻게 게임을 한 거지?"라는 생각도 든다. 미용사가 되기 위해선 몇천 번의 미용을 해야 하는데 매크로를 돌리면 하루 이틀이면 마칠 수 있다. 직접 일일이 몇천 번을 클릭해가며 게임을 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일랜시아>에 더는 신규 발표가 없어서 유저들은 매크로를 통해서 훨씬 자유롭게 게임을 즐길 수 있다.이루고자 하는 것들을 더 빨리 이룰 수 있다. 지금은 거의 99%의 유저들이 매크로를 쓰고 있다. 유저들이 운영진에게 제재를 바라는 지점은 매크로를 악용해 다른 유저를 괴롭히는 경우에 한정된다.
현행 게임법상 사업자가 제공하지 않은 프로그램을 제작, 배포하면 처벌받을 수 있다. 또 일반적인 운영정책을 읽어봐도 매크로의 단순 사용마저 제재 대상으로 분류한다.
현재 <일랜시아>에 매크로가 없으면 그냥 추억만 남은 게임이 됐을 것이다.
수천 수백 번의 반복 행위를 해야만 게임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데, 이제는 그런 옛날 방식으로는 도저히 <일랜시아>를 할 수 없다. 이제 이 게임에는 누가 봐도 매크로가 필요하다.
그래서 다른 유저의 게임 플레이를 방해하는 수준의 매크로나 악성 프로그램을 제재를 해줬으면 한다. 게임이 유지만 될 수 있게끔, 악성 유저들만 알맞게 조치해줬으면 좋겠다.
개·변조된 프로그램이 악성인지 아닌지 무슨 기준으로 판단하나?
유저들 사이에서 아이템을 복사한다거나, 다른 사람의 사냥을 방해하는 매크로 정도는 문제시하는 공감대가 있다. 매크로 때문에 게임 플레이가 쉬워졌다고 볼 수 있지만, 매크로를 모르거나 접근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불평등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는 문제는 남아있다.
수동 조작 대체 성격의 매크로가 아니라, '광산 탈출 지도' 같은 애드온 성격의 프로그램은 도입을 검토할 만하다. 블리자드의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를 봐도 오랫동안 라이브 서비스를 해오면서 유저 편의를 위해 만든 애드온 기능을 공식 UI에 삽입해왔다.
<일랜시아>도 그러면 정말 좋겠다. 게임이 옛날 거라 불편 요소가 너무 많다. 인벤토리도 자동으로 정리가 안 되고 창 모드도 공식 지원을 안 해준다. 자동 사냥이나 작업 대체 같은 것들은 몰라도, 편의성 개선은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다큐멘터리에는 본인이 직접 매크로를 만들어 쓰는 사람도 등장한다. <일랜시아>의 보안이 얼마나 취약한 건가?
어떤 유저가 게임 안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다. 이 게임은 프로그래밍할 줄 아는 사람들의 놀이터라고. 프로그래밍을 할 줄 알면 다른 플레이어들을 손쉽게 게임에서 접속 종료시킬 수도 있다. 자동 사냥 매크로를 돈 받고 파는 경우도 있어서 프로그램 제작자들이 모두 공익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2019년 특정 아이디가 자신을 마주치는 유저들을 모두 게임 강제 종료 시켰던 '팅버그 사태'가 다큐멘터리에서 비중 있게 등장한다.
사실 <일랜시아>에 악성 프로그램을 쓰는 유저는 많이 있었다. 대체로 손쓸 도리가 없었기에 모두 그러려니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어차피 운영자는 나타나지 않으니까. 솔직히 "나만 아니면 된다"라는 마인드도 있었고.
그런데 게임 플레이어 모두를 종료시키는 팅버그가 등장하면서 정말 큰 문제가 됐다. 나는 그때 게임 서비스를 종료할 줄 알았다. 게임 안에 유저가 한 명도 없고, 접속을 시도하면 게임이 꺼지던 상황이었다. 유저들은 <일랜시아> 카페에 모여 좌절했다.
이 와중에 누구도 넥슨을 직접 찾아갈 생각을 안 했다. 답답해서 평일에 넥슨 본사에 갔다. 고객상담실에서 친절하게 응대해줬지만 "고쳐는 주겠지만 너무 오래된 게임이라 얼마나 걸릴지 장담할 수 없다"라는 대답을 들었다. 부정적 답변을 듣고 씁쓸한 마음으로 돌아왔다.
그랬는데 이틀 뒤에 팅버그를 고쳐주더라. 너무 놀랐다. 기간에 대한 답변을 안 주길래 안 고쳐주겠다라는 뜻으로 이해했다. 서비스 점검 공지 하나로 사람들이 설렜다. 그렇게 <일랜시아>에 팅버그가 사라지고 사람들이 광복절처럼 광장으로 모여나와 소리를 질렀다. 팅버그 캐릭터 앞에 가서 욕했던 사람들도 있었던 기억이 난다. (웃음)
팅버그 문제로 판교까지 가서 클래식 RPG 담당자가 아니라 넥슨 노조를 만났다.
"본사 건물이 그렇게 큰데 <일랜시아> 관리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을까?" 했지만, 누구도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넥슨의 누구라도 만나고 싶었다.
넥슨 노조는 포괄임금제를 폐지하면서 넥슨을 바꾼 사람들이다. <일랜시아> 유저들이 "넥슨을 바꾸라"라는 거창한 요구를 하지는 않지만, 우리를 관리해주도록 나서달라는 요구를 하고 있지 않은가? 어떻게 보면 넥슨 노조와 <일랜시아> 유저들이 같은 길을 걷고 있다고 느꼈다.
배수찬 노조 지회장이 "우리는 넥슨을 사랑해서 노조를 한다"라고 말했는데, 나도 같은 마음이었기에 인상적이었다. <일랜시아>를 좋아해서 게임을 고쳐줬으면 좋겠고, 그래서 이 일에 나선 거니까.
이야기를 나누는데 지회장이 "넥슨에서 개발자들이 만들고 싶은 게임을 만드는 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라고 말했다. 그 모습이 자유를 즐기라고 만든 <일랜시아>에서 똑같은 루트를 만들어서 플레이하는 우리들 모습과 겹쳐졌다. 개발자나 유저나 자유 없는 삶을 살고 있구나. 주어진 길을 가야 하는구나.
<내언니전지현과 나>가 <일랜시아> 유저들의 소소한 추억을 호출하는 감상적인 다큐멘터리일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요즘 다큐멘터리에서 자주 나오는 IMF 뉴스로 시작하면서 다소 진부하다고 느꼈다가, 각박한 청년의 삶을 <일랜시아>가 어떻게 위로하는지 소개하면서 1997년과 연결점을 찾는다는 인상을 받았다.
IMF 뉴스가 두세 컷 정도 들어간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다. 그때 뉴스들을 들어보면 요즘이랑 상황이 똑같고, 워딩도 비슷하다. 그 이후로 IMF를 극복하고 경제 성장을 했다는데 경제만 성장했지 청년의 삶은 나아진 게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큐멘터리가 거기까지 깊숙하게 들어가지는 않지만, 영화의 맨 처음을 그렇게 시작해보고 싶었다.
<일랜시아>는 오래된 게임인데 인터뷰를 한 이들은 대부분 90년대생이었다. 이 점이 굉장히 흥미로웠다. 요즘 화제가 되는 책 <세습 중산층 사회>에서는 90년대생을 "출신 학교, 직업, 소득, 자산, 사회적·문화적 경험에 이르기까지 불평등을 공기처럼 경험하는 세대"라고 소개한다. <일랜시아> 유저는 세대적으로 지극히 일부겠지만, 사람들이 게임에서 현실의 불평등을 극복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도 처음에는 단순히 추억이라는 키워드로 접근했다. 사람들이 옛날 추억이 좋아서 <일랜시아>에 남아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람들을 만나서 2시간씩 이야기를 나눠보니 오로지 추억 하나만으로 <일랜시아>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떤 순간이 제일 기억에 남아요?"라는 질문도 분명 좋았지만, "이 게임으로 무엇을 채울 수 있어요?"가 더 좋은 질문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지금 이 순간까지 <일랜시아>를 즐기는 이유를 물었고, 사람들이 현실에서는 얻지 못했던 뭔가를 채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다큐멘터리의 방향이 한 차례 틀어졌다. 이들이 현실사회에서 얻지 못한 것들에 대해, 지금의 내가 읽을 수 있을 만큼 읽어내자 생각했고 그런 의도를 계속 가지고 갔다.
다큐멘터리에 감독의 길드가 굉장히 자주 등장한다. 이들을 실제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물론, MT를 가는 장면까지 등장하는데 어떤 길드인지 소개해줄 수 있나?
작은 <일랜시아> 세계 안에도 파벌이 있다. 대단한 이권을 두고 싸우는 것은 아니고, 길드전에서 승리한 길드의 마크가 달라지는 정도다. 우리 길드는 어느 파벌에도 속하지 않는 중립 성향의 친목 길드로 7년 정도 유지됐다. 싸우지 않고 친목을 유지하는 길드라서 옛날부터 꽤 자주 만났다.
그런데도 실제 생활에서 뭐하고 사는 사람인지 모르는 길드원이 많다. 서로 궁금해하지도 않는다. 친한 사람들이야 직업이 뭔지 알지만, 대부분의 길드원은 서로 모른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게 장점 아닐까?
또 길드원끼리 오랫동안 이 게임을 지켜왔다는 유대감이 엄청 깊다. <일랜시아>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옛날 동네 친구 같다.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일랜시아>를 누가 어떻게 개발했는지 알아봤지만 찾을 수 없었다. 개발일지 같은 것도 없었고. 아마 지금은 넥슨을 떠났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렇게 기사가 나오고 영화도 나오면 그때 개발자가 응답하지 않을까? 수소문해서라도 만나고 싶다.
비록 성사되지는 않았지만, 1998년에 넥슨에서 <일랜시아>를 만든 사람이 우리 옆에 앉아있다고 가정해보자. 무엇이 제일 궁금한가?
사람들이 <일랜시아>의 세계에서 어떻게 살기를 바랬는지 묻고 싶다. 레벨도 없는 게임을 왜 만들었을까? 다른 사람이 없으면 쓸 수도 없는 변태 같은 '대화' 스킬 같은 건 왜 집어넣었을까? 봄 바다랑 겨울 바다가 달라서, 연어를 잡으려면 겨울 바다로 나가야만 하는 디테일은 무슨 의도로 넣었을까? 누가 어떻게 만들었는지, 지금은 어디서 뭐하는지 너무 궁금하다.
감독을 비롯한 <일랜시아> 유저들에게는 자기 게임에 대한 책임감 있는 답변을 듣고 싶다는 욕구가 큰 것 같다.
게임을 손쓸 수 없다면 왜 그런지, 정말 계속 서비스해줄 건지 이런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고 싶다. 책임자가 누구일까? 책임자가 있기는 한 걸까?
<일랜시아>를 비롯해 '넥슨 클래식 RPG' 이름을 건 게임들이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게임을 서비스해주고 있는 건 아닐까? 사회 공헌 차원에서 <일랜시아>를 서비스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그렇게 볼 수 있다. 게임을 계속 서비스해줘서 고마운 마음도 있다. 그런데 <일랜시아>에도 캐시 아이템이 있다. 그게 게임 유지비를 맞출 수 있는 수준인지는, 유저 입장에서 잘 모르겠다. 하지만 유저들이 게임을 그냥 하고 있지는 않다. 기본적으로 캐릭터를 보다 잘 꾸미기 위해서는 캐시 아이템이 들어간다.
그리고 <일랜시아>는 아직도 캐릭터가 죽으면 아이템을 떨어뜨리는데, 이걸 방지해주는 캐시아이템을 판매한다. <일랜시아>에서는 캐릭터 별 충돌이 없는데 '몸찌'라는 스킬을 사용하면 다른 캐릭터를 밀쳐서 죽여버린 뒤 떨어뜨린 아이템을 먹을 수 있다. 이런 경우를 방지하려면 캐시 아이템을 사야 한다.
무료 게임이지만 부분 유료의 성격이 있는 것이다. <일랜시아>는 몇천 원 정도 하는 캐시 아이템들을 월 단위로 결제해야 원활한 게임 플레이를 할 수 있다. 죽었을 때 아이템 떨어뜨리는 것 정도는 개선 패치를 해달라는 이야기를 정말 오랫동안 했는데 답변이 없다.
옛 <바람의 나라>의 '체류'가 아직 남아있는 셈이구나. 여담이지만 도박성 콘텐츠로 문제가 됐던 '가위바위보'나 그 이후 생긴 유저 도박장까지 생각해보면 <일랜시아>의 자유는 이런 '나쁜 재미'도 포괄하는 것 같다.
맞다. 과거 스킬 중엔 훔치기도 있었다. PK 공간에서 다른 유저를 죽이는 것을 즐기는 플레이어도 있다. 그런 부분에 재미를 느끼는 사람들이 분명 있다. "이거 왜 하고 있지?"가 아니라, <일랜시아> 안에서 그 상황 자체를 즐긴다고 해야 되나? 운영진은 게임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을 방관하고 있고.
넥슨에 애증이 정말 많은 것 같다. 하고 싶은 말 다 해도 좋다.
넥슨이 정말 좋은 게임을 많이 만들었는데 '돈슨'이라고 욕먹는 게 아쉽다. <롤>에 돈 쓴다고 욕하는 경우 거의 없지 않나? 넥슨과 싸울 생각은 전혀 없다. 그러면 시위를 했겠지. 그러려고 만든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솔직히 걱정이 크다. 일이 이렇게 커질 줄 몰랐다. 나는 그냥 대학교 졸업 영화를 찍은 거고, 영화제에서 상영되면 감사할 뿐인데. 영화제 못 가면 유저들끼리 상영하고 간직해야지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이슈가 됐다. 나는 그저 넥슨 게임에 남아있는 유저들을 통해 청년들의 모습을 비추고 싶었다.
작년 넥슨 매각 소식 나왔을 때. "까도 내가 까"라는 마음이 들었다. 남이 까면 "왜 우리 넥슨 욕해?" 했다. 지금도 잘 모르는 사람이 <일랜시아>랑 넥슨 까면 화가 난다. 해보지도 않고, 잘 알지도 않는 사람들이 뭘 안다고! 나는 <일랜시아>만 16년을 했는데! 매각 무산 소식이 전해졌을 때 다큐멘터리에서는 "ㅋㅋㅋㅋㅋ"했지만 속으로는 안도했다. 매각하면 <일랜시아> 같은 게임을 제일 먼저 없앨 거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이제는 새 게임에 적응하기 어려워서 넥슨 신작을 직접 하지는 않지만, 항상 뭐가 나오는지 지켜본다. 넥슨 게임은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세계와 세계관을 만들어줬고, 또 재밌는 추억들을 만들어줬다. 그래서 나는 넥슨에 대한 애정이 있다.
그런데 다른 한 편으로는 <일랜시아>에서 너무 소통이 안 되고 있으니까... 내가 넥슨이라면 클래식 RPG 유저들도 가끔씩 관리를 해줄 것 같다. 실제로 <어둠의 전설>은 업데이트를 해주는데 <일랜시아>는 너무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 않나?
다큐멘터리 기사가 나가고 온라인 커뮤니티에 "이 게임 기억하냐", "완전 추억겜이다" 이런 댓글 달리는데 완전 뿌듯하더라. 내가 하는 게임이고 내가 좋아하는 게임이니까. 이 애증을 어떻게 더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한숨)
넥슨은 회사 차원에서 라이브 서비스의 역량을 '초격차'의 원동력으로 삼고 있다. <서든어택>이나 <카트라이더>처럼 넥슨은 오랜 세월 자기 게임을 가꿔나면서 떠났던 유저들을 다시 불러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일랜시아> 하는 사람은 이제 성인이고, 기업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있다. 과금 넣어도 된다. 모든 유저가 나처럼 생각하지 않겠지만, 나는 운영만 제대로 해주면 차라리 과금 좀 더 넣어도 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어디에 돈을 쓸 거 같은지 아이디어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앞뒤 보지 않고 <일랜시아> 살려내라고 떼쓰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왜 이렇게까지 <일랜시아>에 매달리는가?
우리는 <일랜시아>의 끝을 보고 싶다. 요리 어빌 100을 찍으면 낄 수 있는 키트가 있는데, 재료 구현이 안 돼서 낄 수가 없다. 기존에 추가를 예정했던 것들만이라도 넣어주면 좋겠다. 큰 개조를 바라지도 않는다. 일본 버전에는 추가됐는데 한국에는 추가되지 않은 요소들도 많다.
그래서 박윤진 감독은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당장은 영화를 상영하면서 많은 관객을 만나는 게 목표다. 홍대 롯데시네마에서 열리는 '인디다큐페스티발 2020'에 출품됐다. 5월 29일 낮 12시와 31일 3시에 상영한다. 두 번 다 GV를 한다. 코로나19 영향으로 일정이 연기될 수도 있는데, 다른 영화제 출품도 준비 중이다.
그밖에 <일랜시아> 관련 영상들을 유튜브에 올리면서 유저들의 추억을 자극할 만한 영상을 계속 만들고 싶다. 지금의 <내언니전지현과 나>를 살을 더 붙여서 제대로 찍고 싶은 마음도 있고, 넥슨 클래식 RPG 5개를 하나로 묶어내는 시도도 구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