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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코 엘리시움은 어떻게 공식 한국어를 지원하게 됐나?

[인터뷰] 디스코 엘리시움 번역 '팀 왈도'의 김옥현&강재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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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석(우티) 2020-09-07 11:32:41

"우리는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다소 난해한 신작 <테넷>을 들고 온 놀란 감독의 전작 <인터스텔라>의 명대사다. 어떤 분야든​ '우리' 중 일부는 이 문장을 몸소 실천하며 산다. 

 

작년 출시된 추리 RPG <디스코 엘리시움>은 평단과 유저의 극찬을 두루 받은 걸작이었으나 한국은 그 열풍에서 빗나가 있었다.​ 한국어를 지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등장하는 단어만 수십만 개. 사이코드라마에 가까운 심리묘사와 원인과 결과 사이 무수한 선택이 전부 외국어라서 좀 한다는 게이머들도 포기하기 일쑤였다.

 

번역하고픈 게임이 생길 때마다 등장해 팀원을 조직하고 결과물을 내는 '팀 왈도'는 답을 찾아 나섰다. 스탠드 얼론 게임을 즐기는 게이머라면 모를 리 없는 이름. 이번에도 '총대'는 사람을 모아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유저 번역은 공식 번역으로 인정받았으며, 시작 5개월 만에 100% 한국어화를 마쳤다. 이렇게 모두가 한국어로 <디스코 엘리시움>을 즐길 수 있게 됐다.

 

이들은 어떻게 답을 찾을 수 있었을까? <디스코 엘리시움> 번역팀 총대와 번역 프로그램 '대화문 시뮬레이터'​를 개발한 프로그래머와 이야기를 나눴다.

 


 

자기소개를 부탁한다.

 

강재석: 취미로 게임과 번역을 하는 평범한 공대생이다.

김옥현: 팀에서 해리(<디스코 엘리시움>의 주인공) 역할과 미친 생각을 담당하는 복실복실이다.

 

 

원래 통/번역 업계에 종사 중인가? 

 

강재석: 번역은 취미일 뿐이다. 앞으로도 전문적으로 번역 관련 일을 할 생각은 없다.

김옥현: 재석 님은 만화 <원펀맨>의 주인공처럼 취미로 번역을 하는데도 엄청 잘하시는데, 나는 그냥 취미로 번역을 하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아무것도 아닌 자랑스러운 백수다. 

 

 

이전에도 게임 유저 번역을 해본 적이 있는지?

 

강재석: 가장 처음으로 번역을 한 게임은 <프로스트 펑크>였다. 먼저 작업하던 분들이 번역은 거의 다 끝내 놓았는데 한글 폰트가 없어 게임에 적용하지 못하는 걸 보고 해외 포럼을 뒤져가며 공부해서 폰트를 만들어 준 게 시작이었다. 그 이후로 게임 파일을 분석하고 수정하는 툴을 제작하는 것에 흥미가 생겼다. 

 

그런데 게임을 뜯어놓아도 번역을 할 사람이 없었다. 결국 직접 번역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킹덤 컴: 딜리버런스>를 번역하고, 공식 번역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김옥현: <폴아웃 4> 유저 번역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DLC 번역부터는 책임을 맡으며 유저 번역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 외에도 <엘더스크롤 스카이림> 모드인 엔데랄 번역과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 2>의 유저 번역(공식 번역은 다른 팀원에게 인계)한 경험이 있다. 그 외에도 이런저런 번역에 참여한 적 있다.

 

 

<디스코 엘리시움>의 번역을 결정한 이유가 궁금하다.

 

강재석: 해외 게임 웹진에서 역대급 RPG가 나왔다는 소문을 듣고 알아보기 시작했다. 사실 처음 번역 준비를 시작한 것은 게임 출시 직후였다. 그때 게임 데이터를 분석하고, 한글패치 모드를 만들고, '대화문 시뮬레이터'의 뼈대를 만들어 놓았다.

 

당시에는 <킹덤 컴>의 번역이 끝나지 않았었기 때문에 <디스코 엘리시움> 번역을 바로 시작하지 않고, 누군가 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아무도 시작하지 않는 걸 보고 ‘내가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라는 생각이 들어서, 마침 연락이 된 김옥현 님과 번역팀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김옥현: 번역을 시작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완성하는 건 오직 나만 해낼 수 있는 일이라는 걸 알아서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했다. 나는 생각이 많은 사람이 아니다. 물론 중요한 역할은 재석 님과 ZA/UM 그리고 다른 번역자분들이 했지만, 이걸 해낼 수 있는 건 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디스코 엘리시움> 번역을 위해 쓰인 별도 프로그램

 

아직도 게임을 모르는 분들을 위해 <디스코 엘리시움>이 어떤 게임인지 소개를 청하고 싶다.

 

김옥현:​ <디스코 엘리시움>은 미래의 명작 게임들이 우리에게 보여줄 놀라운 게임성의 일부를 아주 깔끔하게 구현해 낸 멋진 게임이다. 장르, 스토리, 그래픽을 이야기하는 것도 좋지만, 중요한 것은 <디스코 엘리시움>이 게임만의 가치, 선택과 그 결과라는 개념에 대해서 어떻게 보여줄 수 있는가를 예술적으로 구현했다.

 

<플레인스케이프 토먼트>가 게임에 담긴 깊은 철학으로 오래 회자되듯이, <디스코 엘리시움>도 그 게임성으로 세월을 뚫고 회자되리라 본다. 요약하면, 철 지난 과거에 대한 향수를 소재로 하는 현재의 게임인 <디스코 엘리시움>이 게임의 미래를 보여주고 있으니, 게임이라는 문화 자체에 관심이 있다면 꼭 해보시기 바란다. 

 


 

 

팀 왈도는 때마다 필요에 따라 뭉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어떻게 모인 그룹인가? 실체가 있는 모임인가?

 

김옥현: 팀 왈도는 전 세계 46개국에 지부를 두고 있으며, 아주 은밀하게 활동하는 철저한 계급제 그룹이다. 각 지부의 대표(총대)가 게임 역사에 영향을 줄 만한 게임이 출시되면 어둠의 의식을 벌여 번역 노예 핫산들을 소환해 작업을 시작하는 아주 무서운 모임이다. 

 

아니면 저런 수상한 설정은 버리고 여러분의 팀 왈도를 만들어도 된다. 팀 왈도는 따로 대표가 없는 그룹이며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게임을 번역하고 싶으면 누구라도 팀 왈도 이름을 가지고 번역하면 된다. <디스코 엘리시움> 번역도 어쩌다 재석님과 연락이 닿아서 팀을 결성한 것이 계기가 됐다. 여러분도 팀 왈도 이름을 쓰고 싶으면 쓰면 된다!

 

 

총대부터 구인까지, 유저 번역이 이뤄지는 과정이 궁금하다.

 

김옥현:​ 보통 주사위 2개를 굴려서 합이 8 이상 나오면 총대 지망자가 총대 직을 맡는 것을 시작으로 핵심 멤버를 구인한다. 핵심 멤버는 바로 프로그래머다. 프로그래머가 준비되지 않으면, 유저 번역을 할 수가 없다. 가장 문과스러운 작업인 번역에서 이과가 없으면 작업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정말 개탄스러울 따름이다. 

 

프로그래머께 한글 패치가 가능한지 확인하고 가능하다고 하면 본격적으로 홍보를 시작한다. 예전에는 게임 관련 커뮤니티에 홍보를 하러 갔는데 요즘에는 그냥 네이버 블로그에 번역한다고 글을 올린다. 그러면 관심있는 분들 중에 일부가 글을 자기가 하는 커뮤니티에 퍼가는데, 그 글을 보고서 인원이 모이면 번역을 시작한다. 열심히 퍼가주신 덕분에 번역이 성공적으로 마무리 됐다

 

인원 관리, 단어 통일, 분쟁 조정, 실적용 QA, 배포 등 뭔가 있어 보이는 이름을 가진 잡다한 일들이 남아있다. 가장 중요한 건 멘탈이 터지지 않고 끝까지 작업하는 것이다. 도망치지 않는 것, 포기하지 않는 것이 유저 번역의 핵심이다. 진짜로.

 

 

이번 <디스코 엘리시움> 번역에는 몇 명이 작업했나? 여러 명이 어떤 식으로 작업하는지 궁금하다. 

 

김옥현: 총 150명 정도가 번역 그룹에 지원했었다. 하지만 그중 절반 가까이 되는 70여 명이 번역을 10단어 미만으로 하고 1주일도 채 못 된 시점에 나갔다. 나머지 40명 정도도 어느 정도 하다가 사정이 생겨서 나갔다. 개발사 컨펌을 받고 공식 번역이 될 때, 또 효율성을 위해 20명 정도 감축을 했다. 

 

이렇게 고르고 고른 인원들에게 통일성을 위해서 일련의 지침들을 지키게 하면서 작업했다. 그 외에는 번역자들의 자율성을 매우 존중해서 따로 터치하지 않았으며 대부분 알아서 잘하셨다. 번역은 일반적인 번역용 사이트를 사용했는데, 특이한 건 번역 보조프로그램에 재석 님께서 만드신 '대화문 시뮬레이터'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프로그램 속에 실시간으로 번역에 반영되는 형태인데, 이게 번역 능률을 엄청나게 그리고 번역 품질을 엄청나게 끌어올렸다. 이후에 제가 도라에몽의 진구마냥 재석 님께 이것저것 만들어 달라고 해서 나온 여러 가지 번역 보조프로그램들도 있다.

 



텍스트 양이 많아 작업이 어려웠을 것 같은데.

 

강재석: RPG에는 수많은 '숨겨진 플래그'가 있다. 각각 이름이 붙어있는 수천 개의 스위치를 상상하면 된다.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이 스위치가 켜지고 꺼지며, 어떤 선택을 했는지를 기록한다. <디스코 엘리시움>은 이 스위치를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한 게임 중 하나다. 

 

아주 사소한 대화나 지나가는 스킬 판정에도 9,562개의 스위치가 켜지고 꺼지며 대화의 방향을 비튼다. 게임을 직접 플레이할 때는 이전의 선택에 따른 결과가 저절로 연결되기 때문에 잘 체감되지 않지만, 게임 시나리오 속에는 수많은 선택과 결과가 녹아 들어있다. 

 

게임을 번역하다가 이런 플래그에 따른 분기가 나올 때마다 어디서 활성화 되는 플래그이고, 전후 관계를 고려해서 어떻게 연결되어야 하는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번역하는 것이 아주 까다로운 작업이었다.

 

김옥현: 사실 별로 안 어려웠다. 유저 번역의 가장 큰 난점은 바로 동기의 감소다. 번역 초기에는 다들 불타는 의욕을 가지고 완성된 미래를 꿈꾸며 진행하지만 완성까지는 머나먼 여정이 남아있다. 그리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과 계속 이야기하며 작업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순간 번역이 '뿅'하고 터지기 부지기수다.

 

상상해보라. 6개월짜리 조별과제를 하는데 조원들 얼굴도 모르고 끝난다고 딱히 뭐가 나오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나는 항상 급한 마음으로 미친 생각을 해서 번역자분 질리지 않게 하려고 했는데, 마침 모든 수단이 떨어질 때쯤 ZA/UM에서 공식 지원을 약속해줬다. 그 이후로는 적절한 수준의 동기가 보장되어서 느긋한 마음으로 번역했다. 

 

공식 번역이 되고 나서 위기의 순간이 왔는데, 핵심 멤버들 여럿이 의욕을 잃었던 적 있다. 그게 큰 문제였고 텍스트의 양 때문에 문제를 겪은 적은 없다.

 



강재석: 작가가 구현한 독자적 세계관의 고유명사를 번역하는 것 또한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사소한 것도 작가에게 질문하며 원문의 뜻을 최대한 그대로 전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번에 유저 번역이 개발사가 인정한 공식 번역이 되었다. 소감이 어떤지?

 

강재석: 어려운 결정을 한 개발사에 감사할 따름이다. 개발사의 현지화 담당 직원에게 '어째서 검증된 번역업체가 아닌 아마추어 번역팀에게 번역을 맡겼는가?' 물어본 적 있는데 '우리 게임을 좋아하는 팬 여러분들께 번역을 맡기고 싶었다'라는 답변을 받았다.

 

김옥현: 별 감흥이 없다. 번역자들은 보상을 받았고, 유저들은 더 나은 번역을 가지고 예상보다 빨리 게임을 할 수 있게 되었고, 개발사에도 큰 이익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막연히 '잘됐네' 정도로 생각한다. 

 

공식 번역이 되면서 수많은 이득이 있음에도 시작할 때부터 딱히 뭔가를 바라고 한 것이 아니기에 심경의 변화는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번역을 하면서 만난 사람들과 함께해서 즐거웠고 유저 번역이 아닌 공식 번역을 하게 되며 새로이 해야 했던 일들을 배운 것은 매우 재미있었던 것 같다. 결과의 기쁨은 찰나지만 과정은 영원히 기억되는 법이니까.

 

<디스코 엘리시움>은 스팀에서 영어, 중국어, 스페인어, 그리고 한국어를 지원한다

 

개발사와 연락은 어떻게 주고받았나? 유저 번역이 공식 번역이 된 과정이 궁금하다.

 

김옥현: 머나먼 에스토니아에서 제작되어 세계의 극찬받은 유명 게임이 공식 한글화되는 과정이라서 뭔가 엄청난 것이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사실 별 거 없다.

 

내가 <디스코 엘리시움> 공식 디스코드 채널에 가서 “나 한국어 번역할 거야, 혹시 해줄 말이나 조언 있어?[Translated by Google Translator]”라고 물으니 “요 맨~ 기다려 직원 불러줄게~” 라는 메시지가 왔고 얼마 안 가 개발사 ZA/UM에게서 “왓 섭 맨, 우리 게임 번역한다고? 멋진 걸? 너희 공식으로 번역할래?” 라는 연락이 왔다. 전혀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순도 99%의 사실이다.

 

 

혹시 ZA/UM으로부터 번역에 대한 인센티브를 받기로 되어있나?

 

김옥현: 번역에 대한 보상은 이미 어느 정도 받았다. 추가 인센티브는 아마 없을 것 같다.  내 화술 스킬이 조금만 더 높았으면 인센티브를 받을 수 있었을 것 같은데... 

 

래도 정말 놀라운 것은 얼굴 본 적도 없는 머나먼 땅의 아마추어 번역가에게 빠르게 돈을 주기로 한 ZA/UM의 결정이다. 우리를 믿고 대담하고 위험한 결정을 해주신 ZA/UM에게 감사 인사를 드린다. 이러한 결정으로 우리는 ZA/UM에 대한 깊은 신뢰를 가지게 됐다. 그 결과 엄청난 속도로 번역이 진행됐다. (당초 팀 왈도는 최대 2년의 기간을 설정했다. 개발사의 지원으로 번역은 5개월 안에 끝났다)

 

추가 인센티브는 없더라도 번역가분들과 번역에 많은 기여를 한 유저분들을 위해서도 뭔가 계속 준비하고 있다.

 


 

끝으로 향후 활동 계획은? 앞으로도 유저 번역에 참여할 것인지?

 

강재석: 유저 번역은 즐거운 경험이었지만, 앞으로 출시될 게임들이 더 많이 공식 한국어화가 되어서 앞으로는 유저 번역을 할 필요가 없었으면 좋겠다. 유저 번역은 한계점이 명확하다. 영어를 잘하는 사람은 많고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도 많지만, 영어를 잘하고 게임을 좋아하며 아무 대가 없이 수백 시간을 번역에 투자할 사람은 극히 드물다. 

 

<디스코 엘리시움>도 개발사의 금전적인 지원이 없었다면 이렇게 좋은 완성도로 빠르게 번역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게임 시장이 커져서 개발사들이 한국어 지원을 선택이 아닌 필수로 생각하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김옥현: 기존에 했던 번역했던 게임의 번역을 좀 더 손 볼 계획이다. 처음에 했던 작업물의 경우 지금 보니 미진한 점들이 느껴진다. 하는 사람이 있든 없든 내가 맡은 번역이고 끝까지 다듬을 생각이다. 유저 편의성도 좀 개선하고 싶다. 

 

번역에 관심있는 게임은 <드래곤 에이지: 인퀴지션>인데 이유는 사실상 한국어 번역이 불가능해 보여서다. 원래 안된다고 하면 더 도전하고 싶어지는 법이거든. 하지만 앞으로도 팀 왈도 이름을 걸고 번역할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팀 왈도는 언제라도 돌아올 것이며, 나도 사이드 메뉴처럼 딸려 들어올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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