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틀그라운드>가 배틀로얄의 ‘채산성’을 증명해낸 지 4년이 지났다. 이후로 많은 게임사들이 황금빛 꿈을 꾸며 ‘배틀로얄 광맥’에 뛰어들었다. 우후죽순으로 출시되는 동종 작품들에 일부는 우려를, 일부는 조소를 보내기도 했다.
혁신은 금세 풍경이 된다. 변화가 빠른 업계일수록 더하다. EA의 <에이펙스 레전드>와 액티비전의 <워존> 유저가 각각 1억 명을 돌파했다는 소식이 최근 짧은 간격을 두고 연이어 들려온다. 꾸준히 성장해온 게임들이다. 놀랄 얘기가 아니다.
다만 궁금증은 생긴다. 두 게임이 성과를 자랑하는 현재, 그 많던 다른 ‘후발주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성공작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배틀로얄 장르는 계속 갈 수 있을까? / 디스이즈게임 방승언 기자
<배틀그라운드> 이후의 여러 배틀로얄 중 가장 돋보인 게임은 뒤를 바짝 이어 출시한 에픽의 <포트나이트 배틀로얄>(이하 <포트나이트>)이다. <포트나이트 세이브 더 월드>에 기반한 무료 모드로, 출시 2주 만에 1천만 유저를 모으며 <배틀그라운드> 못지않은 흥행작이 됐다.
<포트나이트>처럼 ‘모드’로 출시한 배틀로얄은 <콜 오브 듀티: 블랙 옵스 4 블랙아웃>, <배틀필드 V: 파이어스톰>, 데인저 존>, <콜 오브 듀티: 워존> 등이 있다. 스탠드얼론 게임으로는 <에이펙스 레전드>, <링 오브 엘리시움>, <렐름 로얄> 등이 인기를 끌었다. 2020년에 급부상했던 <폴 가이즈> 역시 넓은 의미에서는 배틀로얄로 분류된다.
모바일에서는 <콜 오브 듀티 모바일>, <배틀그라운드 모바일>, <프리 파이어> 등이 유의미한 성적을 내는 중이다. 국산 작품으로는 <헌터스 아레나>, <영원회귀>가 출시됐다. 닌텐도 스위치 전용으로 발매된 <테트리스 99>, <팩맨 파티 로얄>은 아케이드 게임을 배틀로얄과 접목하는 독특한 시도로 주목받았다. 이외에도 많은 게임이 출시되어 왔다.
게임계에서 ‘장르 유행’은 드물지 않은 현상이다. 그러나 배틀로얄 장르는 유독 급격하고 집중적으로 신작이 쏟아지면서 업계 내에서 일종의 ‘신드롬’으로 조명되기까지 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핵심 룰’의 직관적 매력: ‘다수의 플레이어와 동시 경쟁을 벌이며 생존한다’는 핵심 룰은 이해하기 쉽고 자극적이어서 다양한 유저가 매력을 느꼈다. <배틀그라운드>가 여타 FPS에 비해 어려운데도 폭넓게 사랑받은 이유 중 하나다.
'모방' 어렵지 않은 장르: TCG, MOBA처럼 밸런싱이 난해하고 노하우가 필요한 여타 장르보다, 배틀로얄의 핵심 룰은 생산자 입장에서도 비교적 쉽고 단순했다. 여기에 더해 크래프톤(당시 블루홀)이 에픽을 상대로 준비하던 표절 소송까지 모종의 이유로 철회하면서, 장르의 ‘법적 소유권’은 희미해졌고 이후로 다양한 작품이 나왔다.
차별화 마케팅의 용이함: 오래된 장르는 신작에 대한 유저 관심이 비교적 덜하다. 장르 안에서 이미 각종 시도가 이뤄졌기 때문에 새로운 매력을 발견할 확률이 낮아서다. 반면 신흥 장르의 경우 시도해 볼 신선한 아이디어가 많아 작품 차별화와 마케팅이 비교적 쉽다.
건축 시스템이 도입된 <포트나이트>는 이를 통한 ‘낮은 교전 스트레스’가 상대적 장점으로 평가받았다. <에이펙스 레전드>는 캐릭터(레전드) 시스템을 통해 “<배틀그라운드>와 <오버워치>의 만남”이라는 입소문을 탔다. <배틀그라운드>와 구분되는 분명한 특징을 지닌 두 작품은 모두 출시 초기부터 대대적 관심과 사용자를 쉽게 끌어모았다.
‘신흥 장르’로서 배틀로얄은 이렇듯 개발사들을 유혹할만한 충분한 장점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여러 게임이 동시다발적으로 운영에 들어서면서 비로소 중요한 난점들도 드러났다.
거대한 ‘유저 풀’ 요구: 초기작인 <배틀그라운드>와 후발주자인 <워존>, <에이펙스 레전드>, <포트나이트> 등의 두드러지는 차이 중 하나는 후자들의 경우 ‘맵 선택’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맵 선택권을 주면 유저가 분산돼 매치메이킹이 어렵다는 이유가 가장 크다. 동시접속자 수십만을 기록하는 게임들조차 원활한 매치메이킹이 어렵다는 증거.
라운드 참가 인원이 많고, 중도에 참여할 수 없는 구조 때문이다. 같은 지역에 사는 수 십 명(혹은 백여 명)의 유저들이 동일 시간대에 매칭을 시도해야만 원활한 게임 운영이 가능하다. 대규모 고객을 유치해 거대한 유저 풀을 만들 역량이 요구된다는 의미다.
유저 잔류의 어려움: 신흥 장르이기 때문에 업계 내 연구가 미진했으며, ‘참고’할 작품도 적었다. 이로 인해 차별화된 재미가 없거나, 타깃 유저를 잘못 겨냥했거나, 만듦새가 부족한 게임들이 적지 않게 시장에 선을 보였고 종국에는 외면받았다.
타깃 유저를 잘못 설정한 사례로는 EA의 <배틀필드 V: 파이어스톰> 모드를 들 수 있다. <배틀필드 V> 유저들의 유입을 노렸던 모드지만, 논란이 많았던 본편 이상으로 흥행에 참패했다. 빠르고 역동적인 <배틀필드>와 게임성이 근본적으로 달라 유저들은 금세 본편으로 돌아갔다. 불친절한 파밍시스템, 단조로운 맵 등 완성도 부족도 비판의 원인이 됐다.
액티비전이 연이어 내놓은 <블랙아웃>과 <워존>의 엇갈린 운명은 ‘일정 수준’ 이상의 독창성이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블랙아웃>은 근미래적 무기와 특수장비들을 제외하면 시스템적 독창성이 크지 않았고, <워존> 출시 이전에 이미 유저가 많이 감소했다. 반면 <워존>은 ‘굴라그’, ‘계약’, ‘150인 매치’ 등 핵심적 재미를 더하는 시도로 전 세계적 흥행에 성공했다.
<폴 가이즈>와 <영원회귀: 블랙서바이벌>는 ‘플랫포머’와 ‘MOBA’를 접목한 신선함으로 초반에 인기를 끌어 각각 16만, 5만의 동시접속자 수를 기록했다. 그러나 현재는 둘 다 1일 최고 동시접속자 수가 1만 명 대로 줄어들었다. 이들 게임의 경우 기초적 운영 문제가 원인으로 지목된다. <폴 가이즈>는 콘텐츠 부족, <영원회귀>는 밸런스와 티밍 등에 대한 유저 원성이 크다.
여러 배틀로얄 게임 중 성공을 거둔 것은 몇 개 되지 않고, 대부분은 대기업 게임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초기 유저를 모으기 쉽다는 마케팅적 이점과 별개로, 노하우 없는 기업은 살아남기 힘들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렇다면 배틀로얄 장르 자체는 과연 장수할 수 있을까? 게임 장르란 영원하지 않고, 그 수명도 제각각이다. RTS는 사실상 ‘멸종위기’로 여겨지는 반면, 30년 된 로그라이크는 최근에도 <하데스>같은 화제작을 낳았다. 트리플 A 신작 <리터널>도 출시를 앞두고 있다.
일반적으로 종의 수명을 결정하는 것은 유전적 다양성이다. 환경이 변했을 때 다양한 돌연변이를 지닌 개체가 많아야 이들 중 일부가 생존해 후손을 남길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런 면에서 '대작' 몇 개를 제외하고는 주목받는 작품이 거의 없는 배틀로얄의 장르적 생존은 장래가 어두워 보인다.
다만, 드물게는 단일한 종이 오래 살아남기도 한다. 투구벌레는 실루리아기, 은행나무는 페름기부터 존재했다. 현재 세계적으로 흥행하는 MOBA 게임은 <도타 2>, <리그 오브 레전드> 정도지만 아무도 진지하게 ‘MOBA의 위기’를 논하지는 않는다.
배틀로얄 장르의 발달과 성숙은 공교롭게도 ‘이름값’을 했다. 거친 환경 속에서 강력한 소수가 살아남았고 이들의 생존조차 아직 보장할 수 없다. 각 기업도 이를 자각한 듯, 시즌제와 대형 이벤트 등을 운영하며 끊임없이 신규 콘텐츠 추가와 시스템 개선을 이어나가고 있다. 추후 중소 개발사들이 ‘판’에 재진입하는 모종의 혁신적 계기가 없는 한, 대기업들간의 이러한 노력과 상호 경쟁이 장르의 존속을 좌우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