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의 '인생게임'은 무엇인가? 기자의 경우 캡콤의 <록맨> 시리즈와 스퀘어에닉스의 <킹덤하츠> 시리즈다. 누군가에겐 <마리오>나 <동숲>일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겐 <다크소울>이나 <세키로>, 또 다른 누군가에겐 <원신> 같은 모바일게임일지도 모르겠다. 예시로 언급한 게임들은 모두 각자의 세계관이 뚜렷하고, 게임 안에서의 상호작용과 진행 방식에 개성이 있어 소위 '갓겜' 소리를 들어온 작품들이다.
화제를 조금 바꿔보자. 리니지라이크로 대표되는 MMORPG가 모바일게임 매출 상위권을 차지한 지난 몇 년에 이어, 다음 대세로 떠오른 건 <세븐나이츠 키우기>, <버섯커 키우기>로 대표되는 방치형 게임들이었다. 미니게임을 본게임인 것처럼 포장하거나, 실제 게임과는 무관한 허위·과장 광고를 앞세운 게임들도 있었다. (그나마 최근 몇 주 사이 <나혼렙>, <명조>와 같은 액션 게임이 차트에 진입했지만 말이다.)
게임을 만들고, 유통하는 입장에선 '돈 잘 벌어다 주는 게임'이 효자 게임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쯤에서 질문해보자. '키우기', '방치형' 게임들이 누군가의 인생게임, 갓겜으로 꼽히는 사례가 흔한가? 잘 해봐야 '할 만한 게임', '나쁘지 않은 게임' 정도의 취급을 받아오지 않았는가. 더 나아가 혹자는 "게임에서 상호작용을 덜어내면 그게 게임이냐?"와 같은 날선 비판을 하기도 한다.
매출 상위권에 있는데 갓겜은 아니다? 좋은 게임, 잘 만들어진 게임에 재미를 느끼고 돈을 쓴다는 게, 지갑을 여는 입장에서의 상식 아니었던가? 맹독성 과금으로 게임 안팎의 경제에 악영향을 끼친 선례들도 있지만, '키우기', '방치형'이 매워봤자 그 정도 맵기는 아니지 않았는가. 그렇기 때문인지 이런 논의도 나온다. 이 장르가 기형적이거나, 시장이 왜곡됐거나, 아니면 둘 다일 수도 있겠다는 의견들 말이다.
쑤저대학교 커뮤니케이션 대학원 부교수 '덩 젠'은 '문예연구'지 2023년 10호에 <방치형 RPG 비판-동시대 게임의 사회적 상상력의 문제>라는 글을 올렸다. "비관적인 자기착취 사회, 권태사회의 상상력, 부성의 절대권력, 모성적 디스토피아" 등의 어려운 현학적 단어를 줄줄이 나열했는데, 핵심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게임은 게이머의 진로를 가로막는 대립자, 장애물을 넘어서는 과정의 연속인 "실패의 예술"이다. 그런데 '방치형 RPG'는 이의 반명제다. 플레이어는 실질적 실패를 겪지 않고, 기껏해야 욕구 충족의 지연을 직면할 뿐이다. 또한, 캐릭터를 조작하는 플레이어로서의 정체성이 아닌 '게임 관리자'(매니저)라는 수동적 정체성을 부여한다. 이조차도 정해진 경로 위의 진행이다.
부정적 감각을 거둬낸(숨긴) 대신, 성장과 증식만 남겼는데, 이에 몰입하기 위해선 (시간은 물론이고) '돈'을 지불해야 한다. 이는 은밀하지만 강력한 폭력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성공할 수 없는 사회"와 달리, 방치형 게임은 자애로운 어머니의 모습을 띄고 있다. 게이머가 (성장이라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폐쇄적 방어 속에 들어가게 만든다.
원문에는 더욱 독한 표현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겉으론 무한히 부드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비디오게임 세대가 은거할 만한 가치가 있는 무릉도원이 아니"라거나, "게이머들이 편안한 '퇴화'의 상태에서 게임에 참여하게 된다"는 등의 비판이 이어졌다. 한 마디로 "유토피아처럼 보이는 디스토피아"라는 것이다.
'덩 젠'의 주장은 꽤 설득력이 있지만, 키우기, 방치형 게임을 많이 해본 입장에서는 비판을 위한 비판, 다소 격앙된 표현으로 보인다.
일단, 비슷한 게임들이 늘어나면서 개별 게임들은 차별성을 갖추기 위해, 나름대로 유의미한 선택의 과정을 게임에 포함시킨 사례가 많다. 스탯, 스킬, 직업 성장의 선택부터, 어떤 캐릭터를 성장시킬지 등 정해진 단일 경로를 따라가는 과정이 아니게 됐다. 더군다나 요즘 대세는 '완전 방치'가 아닌 '반(half) 방치'에 가까워, 미니게임 및 보스·경쟁전 등으로 조작·몰입의 과정을 섞어둔 게임이 늘어나는 추세다.
바쁜 현대 사회에서 '몰입한 시간'이 아닌 '방치된 시간'으로 게임을 진행하고, 캐릭터를 성장시킬 수 있다는 특징은 그 자체로 강점이다. 돈을 들이지 않더라도 '플레이어의 실제 시간'으로 타이쿤 시뮬레이션 게임처럼 진행하는 구조는 강력한 '매몰 비용'으로 작용한다. '장비 강화 실패'로 대표되는 기존 RPG 내부의 연이은 '좌절 경험'은 유쾌하기만 했던가? 해석 관점에 따라 같은 특징을 다르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최근 몇 년 사이, 국내에선 '애완돌'(펫스톤) 열풍이 불었다. 돌멩이에 눈과 입을 그려 넣고, 곁에 두고 키우는 젊은 세대가 늘어났다. '애완돌'을 판매하는 업체 직원이 돌을 씻는 인스타그램 영상은 934만 뷰를 넘겼고, 애완돌 150세트는 40초 만에 완판되기도 했다.
애완돌을 키우는 사람들은 학교,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돌에게 털어놓고, 여행도 같이 다닌다. 살아 있는 동물과 달리, 죽음에 의한 이별 부담도 없어 감정적으로 안정감을 느낀다고 한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한국의 애완돌 열풍을 '치열한 경쟁에 지친 젊은이들이 위안을 얻기 위한 수단'이라 분석하기도 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YTN 라디오의 한 방송에서 진행된 인터뷰다. '사람과 돌의 교감'에 대해 논문을 쓴 신정수 교수를 초대해 진행된 대화에서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는 오래 전부터 돌을 사랑해왔습니다. 어떻게 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는 답변이 나왔다. 그것이 수석(壽石)이든, 옥과 같은 귀중석을 수집하는 행위든, 어떤 대상에 마음을 의지하고, 자연을 곁에 두고자 하는 경향의 연장선이라는 것이다.
게이머의 시선에서 이 현상을 바라보자. '성장'의 재미가 강조된 키우기, 방치형 게임과 달리, 사람들은 '성장'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애완돌'에도 열광한다. 이쯤 되면 방치형 게임이 '빠른 성장감'을 줘야 한다는 것조차도 편견이 아닌가 싶다. 화려한 그래픽, 멋진 캐릭터, 도파민을 유도하는 진행 과정 등은 "편하게 곁에 둘 수 있는 대상"이라는 명제에 뒤따르는 부가적 요소에 불과할 수도 있다.
한편, 반다이는 펜들럼을 '<디지몬> 펜들럼 컬러'라는 이름으로 리메이크해 판매 중이다. 90년대생이라면 어린 시절 소위 '벽돌'이라 부르던 이 다마고치를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25년도 넘은 이 유물이 (고작) '컬러' 추가 및 일부 기능 개선을 거쳐 (무려) 7~9만 원 가격대로 판매된다. 한정된 수량도 한몫을 하고 있지만, 이런 상품들은 여전히 인기가 많아 금방 품절이 되곤 한다.
그것이 '돌'이든 '벽돌'이든, '키우기'와 맞닿아 있는 지점에서 수요가 꾸준한 셈이다. 지난 주, 플레이엑스포 B2B 특별관에서 예상보다 훨씬 많은 키우기, 방치형 개발사들을 만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하나의 열풍, 유행, 대세가 됐음을 부정할 수 없다.
'돌'과 '벽돌'에서도 '재미'와 '의미'를 느끼는 시대다. 키우기, 방치형 게임을 선호하는 유저들의 순수한 심리도 여기서 멀리 있지 않다. 다만, 이는 차트 상위권에 있는 게임들에도 모두 통용되는 논리는 아니다. 시장 접근 방식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미니게임을 미끼로 내세우거나, 인게임에 없는 콘텐츠를 내세워 허위·과장 광고를 하는 경우를 종종 봤을 것이다. 어색한 한국어 발음으로 연기하는 영상을 사용하고, 일부러 불쾌감을 유도하는 B급 광고를 보여주는 것으로 관심을 끄는 사례도 많다. 그런데, 동종 업계인들에게 광고 신뢰도보다 더 치명적인 건 '광고의 노출 빈도', 즉 '광고 자본의 차이'다.
<버섯커 키우기>와 같은 거대 자본을 등에 업은 중국 게임들은 유튜브, SNS를 금세 잠식한다. <세나 키우기>로 대표되는 국내 대기업 게임들의 광고 집행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때가 종종 있다. 매출 상위권에 있는 게임들 중 공격적인 광고 집행을 하지 않았던 방치형, SLG를 찾는 게 더 어려울 정도다.
키우기, 방치형이 인디, 중소기업들이 상대적으로 쉽게 도전, 진입할 수 있던 시장이라는 말도 광고 자본력의 차이 때문에 옛말이 돼버렸다. 타 장르에선 유튜버, 스트리머를 통한 홍보 효과가 굉장히 크지만, 키우기 게임 시장 쪽에선 (나름 영향력 있는 방송인들이 일부 있음에도) 그 효과가 미미하다.
그렇게 인디, 중소기업들이 선택한 생존법은 "장르 기대감에 충실하자"는 것이라고 한다. 키우기, 방치형이라는 단어를 타이틀에 넣어 검색을 용이하게 만들고, 익숙한 초기 진행을 차용해 "낯선 게임이 아님"을 강조했다. 차별화는 모객과 초기 리텐션 이후 중기 과제로 우선순위가 밀리는 경우도 있었다. 천편일률적인 게임을 많이 봤는가? 기획 과정이 게으른 것만의 문제가 아니다. 시장이 강요한 선택일 수 있다.
가만히 있는 돌도 각광 받는 시대에, 방치형 게임의 잠재력이 무시 받을 이유가 없다. 시장의 왜곡이 장르 전체의 획일화로 이어진 면도 있지만, 유사한 뱀서류, 로그라이크 게임이 범람했던 시기처럼, 장르 전체가 고도화되어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허들이 높아졌기 때문에 오히려 옥석 같은 뛰어난 게임을 만들어야만 잊혀지지 않고 살아남는 구조니까 말이다.
혹자는 <브롤스타즈>, <로블록스>보다 키우기, 방치형이 학교, 학원을 오가는 어린아이들에게 더 친숙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그들에게 추억의 게임은 방치형 게임이 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장르가 고도화되어가는 작금의 시간 끝에, 인생게임이라 당당하게 언급할 만한 수준 높은 방치형 게임이 등장하길 기대해본다.
관련기사
▶ [기획] 방치형 유목민: 게임과 게임을 넘나들며 '키우기'하는 사람들
▶ [기획] 100일 넘긴 '세나 키우기', 방치형 생태계는 변했나?
▶ MMORPG 잡아먹고 매출 1위, '버섯커 키우기' 왜 잘 나가나?
▶ [기자수첩] 낭만과 불만 사이, "XX라이크 게임도 흥행했으면"
▶ [창간기획] "방치형 붐은 진짜 왔습니까?"
▶ [GDC 2024] 글로벌 시장에서 '키우기'를 외쳐본다, '레전드 오브 슬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