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말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등장했느냐 마느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이 말이 누군가의 방어 수단으로 오남용된다는 게 문제다.
게임 업계에도 (굳이 게임 타이틀과 게임사를 명시하지 않아도) 다들 알 만한 사례들이 많았다. 오픈월드 RPG, MMORPG, 던전 익스트랙션 게임 등 이들이 도의적, 법적 논란에 휩싸일 때마다 거론된 것은 "장르 공통의 문법, 장르적 유사성"이었다. 최근 MMORPG의 쇠락이나 카니발리제이션을 논할 때, 자주 언급되는 지점 또한 "거의 똑같은" 경험을 제공하는 게임이 너무 많다는 점 아니었는가.
그렇다면 모바일게임 시장에서 대세가 된 '키우기' 장르는 어떨까. 기자는 취재를 진행하며 '키우기' 게임 개발사들을 다수 만났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큰 틀을 지키려 한다", "기존 '키우기'들과 너무 다르면 유저들이 낯설어 한다"는 등의 대답을 연이어 들었다. 사실상 왜 달라야 하느냐고 반문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심지어 한 개발사는 '출시 이후에 차별화 요소를 도입해도 늦지 않는다'는 취지의 답변을 했다.
단순히 일부 장점을 취한다는 수준이었다면 이렇게 기사를 작성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개발사 A는 "저희 (키우기) 게임은 기획부터 하면 만드는 데 한 달 반이 걸렸다. 개발로 보면 한 달이 안 걸린 셈이다. 1등을 하는 게 목표가 아니다. 2~3등 하는 게임을 만들고, 또 다른 (자사) 게임이 나왔을 때 주목 받게 하려 한다"고 말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누군가는 더 나은 게임플레이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있다. 이는 '키우기' 장르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스마트폰 출시 초기부터 이 장르의 초석을 만든 1세대 '키우기' 개발사들, N년째 서비스를 이어가며 꾸준히 콘텐츠를 제공한 개발사들의 노력은 무엇이 되는가. 신규 '키우기' 게임을 만듦에 있어서도, 경쟁이 치열해진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치열한 고민을 하는 개발사들도 있다.
그런데, 돈 되는 트렌드를 따라간다는 명목 하에, 게으른 개발 행태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개발사들 또한 적잖게 있었다. 이들이 분명히 인지했으면 한다. 유사한 '키우기' 게임들이 범람하는 상황에서, 게을리 만든 게임에 박수를 쳐줄 게이머는 없다.
"키우기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방치형 RPG잖아요. 요즘 많은 개발사들이 방치형을 만들고 있고. 그래서 유저들이 진입·접근하기 쉽고, 플레이하기도 쉬운 게임인 것 같아요." -개발사 B
현실의 삶도 피곤한 사회에서, 게임에서라도 스트레스를 덜 받자는 차원에서, 캐주얼, 방치형, 키우기 게임이 부상하고 있는 상황은,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계실 것이다. 모바일게임 매출 1위 자리에 오래 머무른 <세븐나이츠 키우기>, <버섯커 키우기>의 성공을 뒤따르기 위해, 많은 중소, 인디 개발사들이 '키우기' 게임 출시를 준비하고 있다.
개중에는 눈에 띄는 차별점을 갖지 못한 게임도 다수 있다. 그래픽이 조금 다르거나, 미니게임을 추가하는 등의 작은 차이를 준 경우가 많았으며, '키우기' 게임의 핵심인 '쉽고 빠른 성장 경험'을 제공하는 RPG 요소는, 기존 게임들의 문법을 그대로 답습한 사례가 많았다. '키우기'라는 단어를 보고 들어오는 유저들이 기대하는 바(공통 문법)가 있고, 여기서 너무 벗어나도 외면 받는다는 반응도 많았다.
"방치형 게임은 너무 틀을 벗어나 버리면 주목 받기 어렵다고 생각하거든요. 평소 하던 플레이에서 달라지면 거부감을 갖는 유저분들도 계시고요. 그래서 게임 방식에서는 최대한 (기존의) 틀을 지키고자 합니다. 너무 특이한 걸 하기에는 모험이 있다고 생각해요." -개발사 C
그렇게 이들이 선택한 생존법은 키우기, 방치형이라는 단어를 타이틀에 넣어 검색을 용이하게 만들고, 익숙한 초기 진행을 차용해 "낯선 게임이 아니"라고 역설하는 것이었다.
"트렌드를 빨리 따라가는 게 인디 개발사가 해야 할 일이에요. 트렌드와 동떨어진 게임을 만들면 주목도 안 되고, 애초에 다운로드조차 되지 않아요." -개발사 A
주목도가 높은 장르를 선택했다는 심리는 충분히 이해가 된다. 하지만, '키우기' 장르 안에도 (너무 과도하게) 유사한 게임이 많은 상황이다.
"비유를 하자면, 팔도비빔면이 비빔면 업계에서 원조잖아요? 그런데 진비빔면, 찰비빔면, 배홍동 비빔면도 나왔어요. 그런데 팔도가 이들을 고소하진 않아요. 비빔면 트렌드가 있으니까 다른 비빔면들이 나온 거잖아요. 저희가 하려는 건, 비빔면처럼 잘 나오고 있는 걸 똑같이 빨리 만들고, 그 안의 미니게임들을 바꾸는 거거든요." -개발사 A
개발사 A는 방치형을 중심에 둔 빠른 출시 이후 시즌제로 미니게임 플레이 방식을 여러 형태로 바꿔나갈 계획이었다. 똑같이 또는 대부분의 시스템이 유사하게-라는 말을, 유저 앞에서도 당당히 할 수 있을까? 이들이 이렇게까지 빠른 출시에 사활을 건 이유는, 키우기, 방치형 시장 트렌드가 언제까지 유지될지 모른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기자와 만난 '키우기' 게임 개발사들은 "최근 정부 제작 지원 사업 합격자 명단에도 '키우기'가 정말 많았다. 우리 게임이 출시될 시점에는 '키우기'가 더 많아지는 것 아닌가 걱정"이라 말하기도 했다. '키우기' 시장은 유저 유입의 힘을 가지고 있지만, 개별 게임이 주목 받긴 어려운 레드오션이 됐다. 천편일률적인 게임을 만나는 유저 피로도 또한 고려해야 한다. 그럴 때일수록 더 차별화된 게임을 선보여야 하는 것 아닐까?
"소규모 회사가 광고로 큰 회사와 싸우는 건, 소모전이라고 생각해요. (캐주얼, 방치형 게임은) 스트리머를 통한 홍보도 마찬가지예요. 저희도 예전에 (스트리머 광고 방송을) 해본 적이 있는데, 큰 도움이 안 되더라고요." -개발사 D
<세븐나이츠 키우기>, <버섯커 키우기>와 같은 게임들은 유튜브, SNS 광고를 적극 진행하며 유저 모수를 늘렸다. 그런데, 중소, 인디 개발사들은 이들과 광고 자본으로 맞대결을 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예전에는 북미 시장에서도 캐주얼, 퍼즐 좋아했지만, 이제는 '라이트코어' 게임들도 점차 많이 하시는 것 같아요. 국내 게임 중에선 <레전드 오브 슬라임>이 대표적인 예시고요. 성장이 있더라도, 쉬운 성장 요소면 글로벌에서도 통할 거라고 보는 개발사들이 많은 것 같아요. 한국은 좁은 시장인데, 중국 게임들의 광고 자본은 이기기 힘들죠. 차라리 넓은 시장에 가서 여러 유저를 보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요." -개발사 B
넓은 글로벌 시장에서 특정 국가 한 곳에서만 지표가 잘 나와도, 그곳에 마케팅을 더 집중하면 된다는 논리였다. 이런 계산이 반영된 것인지 최근 출시됐거나, 연내 출시 예정인 국산 키우기, 방치형 게임들은 대부분 글로벌 권역 서비스를 준비하고 있다.
이번 기사에선 '키우기' 게임 개발사들의 취재 내용을 중점적으로 소개했지만, 같은 장르 안에서 유사 게임이 범람하는 현상은 특정 장르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다. 같은 개발사의 자기 복제, 매출이 잘 나오는 타사 게임 시스템을 그대로 차용한 게임이 얼마나 많았던가.
'아이디어'는 저작권 보호 대상이 아니라거나, 업계 한파로 인해 먹고사니즘이 중요해졌다는 말이, 게임을 당당하게 만들어주진 않는다. 게임 업계에 자성의 목소리가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