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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허접칼럼] 알파고가 한국 게임 생태계에 주는 훈수

임상훈(시몬) 2016-03-16 09:51:05

3월 9일,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첫 대국이 있었다. 전 세계적인 관심을 모았다. 알파고가 이겼다. 한국발 뜨거운 뉴스는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하루 전, 3월 8일 해외에서 미지근한 뉴스가 하나 들어왔다. 영국의 게임 개발사 라이온헤드 스튜디오가 폐쇄될 것이라는 소식이었다.

 

이세돌을 이긴 알파고를 만든 사나이, 데미스 하사비스.

 

한 사람이 겹쳐 보았다. 알파고를 개발한 구글 딥마인드의 대표 데미스 하사비스(Demis Hassabis)였다. 라이온헤드는 그의 두 번째 직장이었다. 하사비스는 이세돌을 만나기 위해 한국에 와있다. 고향의 전 직장 소식을 들었을지 궁금했다. 어떤 기분일까?

 

나는 묘했다. 공교롭게도 연달아 발생한 두 뉴스가 '미생'인 한국 게임, 벤처 생태계에 훈수를 두는 것 같았다.



천재 게임개발자 데미스 하사비스

 

이세돌은 12살에 프로가 된 바둑 천재다. 조훈현(9세), 이창호(11세)에 이어 역대 최연소 입단 3위다. 

 

하사비스는 체스 천재였다. 13살에 체스 마스터가 됐다. 당시 Elo 레이팅(체스 실력을 나타내는 수치)은 2,300이었다. 14세 이하에서 세계 2등. 역대 최강 여자 체스 선수인 유디트 폴(헝가리, 2,335) 다음이었다.

 

하사비스는 게임을 좋아했다. 고등학교를 2년 일찍 졸업하고 '불프로그'(Bullfrog)에 입사했다. 세계 3대 게임 개발자로 불리던 피터 몰리뉴가 만든 게임 개발사였다.

 

팜류와 카페 경영류 게임의 조상, <테마 파크>. 

 

16살의 하사비스는 <신디케이트>(Syndicate)의 레벨 디자인을 했다. 다음 해에 <테마 파크>(Theme Park)의 공동 기획과 리드 프로그래밍을 맡았다. <테마 파크>는 빅 히트를 쳤다. 출시 후 5년이 지나서도 유럽 판매순위 10위 안에 머물렀다. <테마 파크>는 경영 시뮬레이션 장르의 시초로도 유명하다. 페이스북이나 모바일의 팜류, 카페 경영류 게임의 원류를 따져보면 <테마 파크>가 나온다.

 

하사비스는 게임을 더 잘 만들고 싶었다. 캠브리지대학 컴퓨터공학과에 진학했다. 졸업 후 다시 피터 몰리뉴가 창업한 '라이온헤드'(Lionhead)로 컴백했다. 시뮬레이션 게임 <블랙 앤 화이트>(Black & White)에서 핵심적인 파트인 인공지능 프로그래밍을 맡았다.

 

이후 독립한 그는 게임 개발사 엘릭서 스튜디오를 설립했다. <리퍼블릭: 더 레볼루션>(Republic: The Revolution)과 <이블 지니어스>(Evil Genius)의 개발을 주도했다. 2009년에는 게임 업계에 공헌한 것을 기념해 영국왕립예술협회 회원으로 뽑혔다.

 

 

알파고의 아픈 응수 타진

 

'쎈돌' 이세돌 9단이 4번째 판을 이겼다. 기뻤다. 슬펐다.

 

바둑의 낭만, 인간의 정신력이 이겼다는 기사가 쏟아졌다. 마냥 즐거워할 일은 아니었다. 바둑판을 뚫어지게 보는 것만큼이나 이 역사적인 대결의 국면을 냉정하게 읽어야 한다. 내가 슬픈 이유는 단순했다.

 

 

한국은 프로 9단이 나왔지만, 영국은 인공지능이 나왔다.

 

 

인공지능(AI)의 천재 하사비스

 

하사비스는 2005년 게임 업계를 떠나 인공지능 개발에 뛰어들었다.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 들어가 인지신경과학(뇌과학)을 공부했다. 뇌로부터 인공지능의 새로운 알고리즘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서였다.

 

재학 시절 그는 기억과 상상이 뇌의 같은 부분에서 생겨난다는 것을 발견했다. 대대적으로 언론에 보도됐다. 세계적인 과학권위지 사이언스는 이 발견을 2007년 세계 10대 과학 성과 중 하나(9위)로 꼽았다. 

 

2009년 뇌과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하사비스는 2010년 인공지능 스타트업 딥마인드를 설립했다. MS와 페이스북의 인수 제안을 거절했다. 2014년 1월 구글에 4억 파운드(약 6,700억 원)에 팔았다.

 

스스로 게임을 배워서 하는 인공지능, DQN.

  

하사비스는 게임업계를 떠났지만, 게임을 떠나지는 않았다. 알파고가 나오기 전인 2015년 2월 공개된 DQN(deep Q-network)​은 고전 비디오게임 '아타리 2600'의 46가지 게임을 사람처럼 플레이할 수 있는 인공지능​이었다. 게임을 즐길 수 있는 인공지능이 세상에 나왔다. 

 

게임에 대한 하사비스의 관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을 전망이다. 립서비스인지 모르겠지만, 제프 딘 구글 머신러닝 총괄은 "데미스 하사비스 대표는 알파고와 DQN의 다음 도전 종목으로 <스타크래프트>를 고민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세돌을 이긴 딥마인드는 다음 번엔 임요환을 노릴 지 모른다.

 

 

피터 몰리뉴와 데미스 하사비스, 게임과 인공지능

 

<테마 파크> 등 하사비스가 개발한 5개 게임은 공통점이 있다. 모두 NPC(플레이어 이외의 캐릭터​) 간의 상호작용이 중요한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이를테면 <블랙 앤 화이트>의 경우, 신(god)인 플레이어가 지구의 환경을 바꾸면 게임 속 NPC들이 이에 맞춰 사람처럼 반응해야 한다. 하사비스는 이런 NPC들의 반응과 상호작용을 설계한 인공지능 프로그래머였다.

 

​하사비스는 <테마 파크>를 만들며 인공지능(AI)이 확대되면 얼마나 강력한 영향력을 보여줄 수 있는지 실감했다. 사람들은 그 게임을 즐겼고, 수 백만 장이 팔렸다. 플레이어의 플레이 방식에 따라 대응하는 인공지능 덕분이었다.

 

맨 가운데의 피터 몰리뉴와 그 왼쪽의 데미스 하사비스. 작은 팀으로 게임을 만들던 라이온헤드 시절.

몰리뉴와 하사비스는 이후 인공지능을 계속 밀고 나갔다. 아직 학계에서 인공신경망이나 딥러닝, 강화학습 같은 AI가 보급되기 전이었다. 그는 최근 해외 매체와 인터뷰에서 "제한된 형태였지만, 게임이 AI의 최첨단이었다. <블랙 앤 화이트>에서는 강화학습까지 적용됐다"고 말했다.

 

AI에 관심이 많았던 몰리뉴는 하사비스가 독립한 후에도 그의 게임 개발을 지원했다. 하사비스는 본격적인 AI 연구로 들어갔지만, 몰리뉴는 게임계에 남아 AI 활용을 주창했다. 2012년 런던 임페리얼 대학교에서 열린 게임12(Game12) 이벤트에 강연자로 나서 “인공지능이 스토리를 바꾸는 게임을 만들어보자”고 제안했다.

 

몰리뉴는 게임업계가 진보된 입력 기기와 데이터 모음, 클라우드 컴퓨팅 기술과 결합한 진보된 인공지능을 이용해 자신만의 이야기를 즐길 수 있는 게임을 만든다면 엄청나게 성공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사비스는 지금이라도 발전된 AI 기술을 게임에 접목하면 놀라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꼭 해야 한다. 정말 하고 싶다. 하지만 당장은 헬스케어나 추천 시스템 같은 것에 더 집중해야 한다. 하지만, 어느 시점에서는 할 것이다. 시장도 크지만, 개인적으로도 미완된 것(게임)을 마치는 일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똑똑한 AI가 생기면, 게임 개발자들이 게임마다 새 AI를 만드는 대신 AI를 교육시켜 쓸 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 정부의 응수, '덜컥수'가 아니길

 

정부는 알파고와 이세돌 9단간의 대국에 놀란 모양이다. 민간기업과 힘을 합쳐 '인공지능(AI) 개발 콘트롤 타워'(가칭)를 만들기로 했다. AI 산업을 주력 연구개발(R&D)분야로 결정하고 투자예산도 대폭 확대하기로 했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정부 고위관계자는 13일 "AI 개발 콘트롤타워 설립을 위해 지난 11일 산업통상자원부, 미래창조과학부 등 관련 부처 간부들이 실무회의를 진행했다"고 말했다.

 

'AI 개발콘트롤타워'는 산업부와 미래부가 공동으로 주관하고 관련 부처와 민간기업이 모두 참여하게 된다. 그동안 산발적으로 진행돼 온 AI관련 연구과제와 예산집행체계를 일원화하고 집중적으로 육성할 것으로 알려졌다. 

 


 

응원한다. 하지만, 불안하다. 이명박 정권 때의 '명텐도'가 생각나기 때문이다. '닌텐도 같은 게임기' 발언 이후 각 정부부처에서 부산히 움직였다. 결론은 우리 모두 안다. 포석도 없이 바로 집부터 지으려는 행마는 성공하기 어렵다. 부디 그때 일을 복기해보면 좋겠다.

 

바둑 격언에 '동수상응'(動須相應)이라는 말이 있다. '행마를 할 때는 모름지기 이쪽저쪽의 돌이 이어지고 호응하게 하라'는 뜻이다.

 

한국에서 알파고가 나올 수 없었던 이유는 콘트롤타워가 없어서가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몇 가지 이유는 다음과 같다.

 

 

게임이 '마약'으로 취급되는 나라

 

한국에서 게임은 지속적으로 두들겨 맞았다. 국회에서도 때렸고, 행정부에서도 때렸다. 뉴라이트도 때렸고, 개신교 근본주의 그룹도 때렸다. 게으르고 바빠서 못 썼지만, 일부 정신의학계에서도 때렸다.

 

[게임과 권력] ① 게임규제 법안의 역사 (과거형)

[게임과 권력] ② 게임규제 법안의 역사 (현재진행형)

[게임과 권력] ③ 뉴라이트와 게임규제 (1/2)

[게임과 권력] ④ 뉴라이트와 게임규제 (2/2)

[게임과 권력] ⑤ 개신교 근본주의와 게임규제 (1/2)

[게임과 권력] ⑥ 개신교 근본주의와 게임규제 (2/2)

  

최근 한국 게임의 글로벌 위상이 주춤하면서, 국회는 돌변했다. 진흥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하지만, 보건복지부는 여전했다. 지난달 25일 ‘정신건강 종합대책’에서 게임 중독을 '질병'으로 분류했다.​ 지난해 게임이 중독을 유발할 수 있다는 뉘앙스를 담은 2편의 공익광고를 제작, 배포해 논란을 빚은 후속 움직임이었다.

 

 

[새 창에서 영상보기]


이렇게 게임이 끈임없이 두들겨 맞는 나라에서 하사비스 같은 인재가 나올 수 있을까? 게임인의 자존감과 별도로, 게임 생태계에 좋은 인재가 들어올 확률은 갈수록 줄어든다.

 

하사비스는 게임을 통해 인공지능의 가능성을 배웠다. 게임을 통해 여러 가지 인공지능을 시도했다. <테마 파크>가 없었다면, 알파고는 없었다.

 

 

획일화 되어가는 게임 생태계 

 

피터 몰리뉴는 '불프로그'를 떠나 '라이온헤드'를 창립한 핵심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난 게임을 개발하고 싶었다. EA의 중역회의에 참가해서 직원 화장실의 화장지를 무슨 색깔로 할까 토론하는 건 내가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피터 몰리뉴는 '라이온헤드'를 떠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어느 날, 저는 스튜디오에서 의자에 앉아서 눈을 감고, 헤드폰으로 큰 음량의 음악을 들으면서 신작 아이디어를 생각하고 잇었습니다. 갑자기, 제 의자가 움직이는 것을 느꼈습니다. 주위를 둘러 보니, 마이크로소프트의 의자 조절 담당 직원이 서 있더군요. 이 친절한 여성은 한 달에 한 번, 제 의자가 신체공학적으로 바르게 설정되어 있는지를 조절하러 오는 것입니다. '이건 말도 안되는 일이야'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의자 조절 담당 직원 이야기는 MS, 즉 창의성 대신 효율을 중시하는 대기업을 상징하는 의미로 읽혔다.

 

데미스 하사비스는 게임 업계를 떠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2004~2005년 무렵, 게임 업체가 90년대와 다른 길로 가고 있는 것이 확실해졌다. 90년대는 정말 재미있고, 창조적이었다. 어떤 아이디어건 생각할 수 있었고, 만들 수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그래픽과 프랜차이즈가 중시되고, <피파> 시리즈나 그런 종류 게임들의 시대가 됐다. 더 이상 흥미롭지 않았다." 

 

2000년대 중반 영국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버티는 게 중요해진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 인용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국 게임이 글로벌 경쟁력을 잃고 있는 주요 이유이기도 하다.

 

 

창업 생태계를 위협하는 사회

 

정부는 창조경제를 강조하고 있다. 콘트롤타워를 만들고, 각 지방에 창조산업을 지원할 진흥원들을 세웠다. 

 

카카오톡을 만든 다음카카오는 7년 동안 세 번의 세무조사를 받았다. 한 기업이 이렇게 세무조사를 받을 확률은 0.06%다. 포털 길들이기와 카카오톡 정보요청 이슈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았다. 

 

더불어민주당 홍종학 의원이 필리버스터 때 발표하고, 이후 공유했던 스케치북 파일 중.

이런 환경에서 ICT 산업의 성장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 

 

당장 유저들은 다른 나라 모바일 메신저로 옮겨간다. 여권 인사들까지 아이폰으로 바꾸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과거 게임계에서 비슷한 일이 있었다. 앱스토어 게임의 심의 이슈 때문에 일부 개발사는 해외 앱스토어에만 게임을 올릴 수 밖에 없었다.  

 

권위주의적인 환경은 창의적인 인재가 크기 어렵다.

 

스타트업이 붐이 일어난 곳들을 보자. 샌프란시스코, 시애틀, 뉴욕 모두 권위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런던, 베를린, 헬싱키도 마찬가지다. 이 이야기는 조만간 다시 하겠다.

 

한 마디 더. 구글은 딥마인드를 약 6,700억 원​에 인수했다. 하사비스는 MS와 페이스북 대신 구글을 택했다. 비전이 맞았기 때문이다. 한국의 큰 ICT 업체 중 '돈' 뿐만 아니라 '비전'으로 스타트업을 붙잡을 수 있는 곳이 얼마나 있을까?

 

구글은 스타트업을 인수하기 위해 큰 돈을 썼다. 하사비스는 구글의 새 회사 이름 '알파넷'과 바둑을 뜻하는 영어 '고'를 합쳐, '알파고'를 만들어냈다. 알파고는 세계 최강 바둑기사 이세돌 9단을 4:1로 이겼다. 역사에 남을 것이다.

 

바둑 격언 중 '사소취대'(捨小取大)라는 말이 있다. '작은 것은 버리고 큰 것을 취하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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