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회원가입 | ID/PW 찾기

연재

[덕후론_02] 일본에 '철덕'이 많고 한국에 '소총 밀덕'이 많은 이유는?

덕후는 맨땅에서 나오지 않는다

에 유통된 기사입니다.
스카알렛 오하라(scarletOhara) 2022-06-13 10:59:38

오타쿠라는 호칭의 배경을 모르는 이들에게는 서로를 ‘오타쿠’라고 부르는 이 청년들이 특이해 보였을 거예요. 사람들은 서로를 오타쿠로 칭하는 이들 전체를 ‘오타쿠’로 인식하기 시작했어요. 

 

[덕후론_01] '오타쿠'는 상대를 존중하기 위한 호칭었다

 

‘오타쿠’라는 호칭, 유행하기 시작하다

 

SF와 로봇에 열중하는 사람들을 부르던 오타쿠라는 호칭은 점차 다른 영역에도 확장됐죠. 취향이 어린아이 같다는 인식과 함께 1989년 ‘미야자키 츠토무의 유아납치 살해사건’ 때문에 주류 문화에서 오타쿠에 대해 극히 부정적인 인식이 퍼지고는 있었지만, 남들이 크게 관심 가지지 않는 분야에 열중하는 이들을 지칭하기에 이보다 좋은 용어는 없었을 거예요.

<마크로스> 외에 다른 만화에서도 열중하는 사람은 있었죠. 특정 게임에 열광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괴수나 특촬물에 열광하는 사람도, 전함이나 열차에 열광하는 사람도 있었고요.

 

철덕(철도 오타쿠) 주인공의 우정을 다룬 영화 <우린 급행 A열차로 가자>(2011)

이들의 공통점은 자신이 열광하는 것에 어마어마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죠. 오타쿠라는 용어는 그 취향에 덧붙여 특정 분야에 매우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인식이 더해졌어요.

이 특정 분야는 매우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었어요. 차량, 역사, 철도, 군함, 애니, 총기, 삼국지, 우주, 스타트렉, 아이돌, 히어로, 엔카, 침대, 여행, 로봇…

이런 여러 분야 중에 ‘관심 가진 사람의 수가 매체나 주변인 눈에 띌 만큼의 규모를 가질 수 있는 것’은 한정돼 있기 때문에, 사람들 인식 속에서 오타쿠들의 취향은 몇몇 주제로 압축이 되죠.

대표적인 것이 ‘애니덕’, ‘밀덕’, ‘겜덕’ 등이에요. 애니덕도 사실 일본애니, 히어로물, 로봇물 등으로 나뉘고 또 그것들도 세부적으로는 미소녀, 지브리, DC, 마블, 소년물, 열혈물, 슈퍼로봇, 리얼로봇 혹은 건담류 등으로 나뉘기도 해요.

국가에 따라서도 달라지죠. 군대에 다녀와야 하니 누구나 접하게 되는 소총 덕에 총덕 중심이 되는 한국 밀덕, 함선류 밀덕이 발달하고 철덕이 많은 일본, SF, 특히 스페이스 오페라류 덕후가 많은 북미 등 그 나라 인문, 사회적 환경에 따라 대세가 달라지기도 해요. 아무래도 일단 내 눈에 띄어야 호기심도 생기고 이후 취미로 발전할 수 있을 테니까요.

 

유치원 때부터 밀덕이던 사내가 만든 밀덕들의 성지

 

그런데, 이러한 것들에 관심을 가지는 오타쿠들의 직업이 딱히 이 관심사와 크게 관계되는 것은 아니었어요. 연구직이나 전문직인 오타쿠도 많았는데, 정작 이 관심사를 연구하거나 그 분야 전문직이 아니었던 거예요. 생계와 아무 관련이 없는데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 이상으로 연구하고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오타쿠들이었어요.

기본적으로 오타쿠라는 용어가 널리 퍼진 후 일본에서 오타쿠는 ‘생계가 아닌 이유로 대중문화가 아닌 특정 분야에 심취하며 상당한 지식을 갖춘 사람’이란 것에서 벗어나지 않았어요. 종종 해당 분야 지식이 쌓여 취미에서 직업으로 발전하기도 하죠. 

 

 

‘오타쿠’라는 호칭, 의미가 달라지다

 

그런데, 이 의미가 점차 달라지게 되죠.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누구나 알고 있듯이, 원래 단어의 의미는 시간이 지나며 종종 달라지곤 해요. 특히, 그중에서도 ‘급’, ‘정도’를 표현하는 단어는 본래 빠르게 그 의미가 바뀌기 마련이에요. 대표적으로 누구나 체감할 수 있는 예가 ‘A, S, R석’, ‘인생샷’, ‘레전드’, ‘초품아, ‘맨션’ 등이겠네요.

공연장에서 예전에 A, B, C석으로 구분되어 A석이 가장 좋은 자리였다면, Special한 S석이 가장 좋은 자리가 되고, 자리의 왕!인 Royal한 R석이 가장 좋은 자리가 되고 Very Important한 People을 위한 VIP석이 최고 자리가 되더니 더욱 Very VIP한 VVIP석에게 자리를 내준 결과 이제 A석이 가장 나쁜 자리가 되었죠. 

 

최근 유명 공연의 좌석도. 이제는 아예 A석이 없는 경우도 있다.

본래 한 사람의 인생에서 최고의 한 순간을 찍었다는 의미의 인생샷을 어디 놀러갈 때마다 찍더니, 이젠 그냥 좀 잘 나온 사진은 다 인생샷이죠.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어 ‘이야 예전엔 정말 그런 위인도 있었다’고 전해지는 전설 아닌 레전드는 예전엔 서구의 비틀즈나 우리나라의 조용필, 야구라면 최동원, 선동렬 급을 지칭하던 것이 지금은 왕년에 좀 인기있어 본 모든 분들을 위한 칭호가 되었어요. 일상에서 놀랄만한 일이 있으면 사용하는 감탄사가 되기도 했어요.

 

본래 ‘아파트 단지 안에 초등학교가 세워진’ 잠실의 엘스나 리센츠 같은 대형 아파트 단지를 지칭하던 초품아를 초등학교가 인근에 있으면 붙이고 있고, 맨션은... 본래 귀족들이 살던, 만화나 미드에서나 보는 대저택을 의미했었죠. 그랬던 용어가 지금 우리나라에선...

 

이건,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에요. 사람들은 점점 더 강한 용어, 혹은 자극적인 용어를 찾아 자신이 느끼고 있는 생각을 강조하고 싶어 해요. 기업은 좀 더 좋게 포장하기 위해 ‘더 상위 느낌’의 용어를 사용하죠.

 

비슷한 이유로 ‘장애인’이나 ‘흑인’ 등의 단어에 대해 "아, 이거 너무 비하하는 느낌이니 단어를 순화해서 바꾸자"라는 주장을 들으면 다소 공허한 느낌이 들어요. 시간 좀 지나면 순화해서 바꾼 그 단어가 또 비하하는 단어가 되어 있을 것이거든요. 비하하는 사회 분위기가 바뀌지 않는 한 단어를 바꾸는 건 그냥 끝없이 돌아가는 수레바퀴가 되겠죠.

 

아무튼, ‘오타쿠’ 혹은 ‘덕후’는 유사한 원인으로 의미상 변화를 겪기 시작해요.

 

1988년 8월 22일부터 이듬해 6월 11일까지 도쿄 및 부근에서 미야자키 츠토무(26)가 어린 소녀 4명을 잇따라 납치하고 살해한 뒤 성폭행하고 유기한 사건이 벌어졌다. 범인이 오타쿠인 탓에 사건 이후 만화, 애니 등 서브컬처에 대한 인식이 극심히 나빠졌다. 경찰이 코믹마켓 행사장을 급습하여 진행을 방해할 정도였다. 이 사건 이전에는 일본에서 오타쿠는 세간에 알려진 존재는 아니었다. 이 사건을 통해 언론에 최초로 대대적으로 소개되었다. (이미지 출처 = NHK)

 

1차 변화는 멸칭으로의 변화예요.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을 좋아하는 (나쁜 의미로) 괴짜’ 뉘앙스로 바뀐 것이예요. 미야자키 츠토무 사건으로 오타쿠라는 단어가 매스미디어에 크게 오르내리며 일본 내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었어요. 그런데 하필, 미야자키 츠토무가 로리콘이자, 애니메이션 오타쿠이자 히키코모리였던 것이죠. 이 때문에 억울하게도 오타쿠가 안 좋은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고, 로리콘이나 광팬, 그리고 히키코모리라는 대중적 이미지가 덧칠해졌어요.

한편으로는, 만화와 애니메이션 작품성이 크게 발전하며 완성도 높은 대작이 터져나오고 있던 당시 시대상은 다른 분야가 아닌 ‘애니’ 분야로 인식을 고정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도 생각해요.

그리고, 이 의미인 상태로 오타쿠라는 용어가 우리나라에도 유입됩니다. 

 

최신목록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