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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의 불량일기

80년 5월 광주의 풍경-9

임상훈(시몬) 2013-05-19 22:45:45
시몬 (임상훈 기자) [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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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5월 광주의 풍경-9

당신은 학생회 활동을 하던 복학생입니다.

5월 17일 전국계엄령이 떨어지기 전, 피신하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곧장 광주를 벗어나 친척 집에 숨었습니다.


동료들은 예비검속으로 잡히거나 도피했습니다. 조직은 와해됐습니다.

당신은 시민들이 계엄군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상각했습니다.

하지만, 며칠 뒤 들려온 소식은 전혀 예상 밖이었습니다.

시민군이 공수부대를 축출하고, 일시적으로나마 광주를 해방시키다니.


피신했던 동료들과 선배 운동가들이 다시 모였습니다.

당신과 멤버들은 반성했습니다. 시민들의 역량을 간과했음을.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당신이 도망친 사이 목숨을 잃은 시민들에 대해.


22일 도청 앞에 모인 10만 명의 함성은 당신의 관념성과 소심함을 질타했습니다.

무기반납을 주장하는 시민수습대책위의 투항적 태도는 한심해 보였습니다.

시민군은 해방광주를 이끌 전략과 조직, 정치적 역량이 부족해 보였습니다.


당신과 멤버들은 홍보와 집회를 통해 전두환 일당과 야욕과 맞서기로 했습니다.

이런 활동의 가장 선두에 선 이는 윤상원 형이었습니다.

상원 형은 그동안 흩어져 나오던 유인물을 하나로 묶어 ‘투사회보’팀을 만들었습니다.

16절 갱지의 ‘투사회보’는 차량운행, 궐기대회, 피해상황 등의 소식을 전했습니다.

가두방송조와 대자보조도 비슷한 활동을 했습니다.


궐기대회팀은 도청 앞 광장에서 매일 ‘범시민궐기대회’를 갖기로 했습니다.

투사회보와 가두방송, 대자보 등을 통해 궐기대회에 대해 알렸습니다.

23일 오후 3시의 궐기대회에는 10만 명이 넘는 시민이 모였습니다.

신군부의 야욕과 만행을 규탄했고, 끝까지 싸워 민주주의를 수호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당신들의 이런 활동은 계엄군과의 협상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노력이었습니다.

시민들이 똘똘 뭉쳐 의지를 보여야 계엄군이 함부로 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시민수습위와 학생수습위 대다수는 총기반납을 주장했습니다.

조건없는 무기반납은 결국 투항이라고 비판받았지만, 그들은 태도를 바꾸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시민들을 자극한다며 시민궐기대회 개최를 방해하려고 했습니다.

 


24일 시 외곽의 양민학살 소식이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협상 추이를 지켜보던 시민들이 계엄군의 행각에 격분했습니다.

수습위에 대한 노골적인 불만이 터져나왔습니다. 시민군은 무기 회수에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당신과 멤버들은 다시 회의를 가졌습니다.

투항주의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수습위로는 안 된다는 데 뜻을 모았습니다.

이를 위해 더욱 강력한 투쟁지도부를 설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당신은 25일 오전 상원 형 등과 함께 재야 민주인사들을 찾아갔습니다.

궐기대회 성명 발표와 새로운 수습위에 참여를 요청했습니다.

재야 인사들은 궐기대회에는 나서지 않고, 도청 수습위에는 참여하기로 했습니다.


상원 형은 시민군 리더인 박남선 상황실장을 만나, 우리의 뜻을 전했습니다.

박남선 실장도 현재 수습위의 행태에 분개하며 뜻을 함께 하기로 했습니다.


당신은 25일 오후 7시 30명의 무장 대학생들과 함께 도청으로 들어갔습니다.

3층에서 학생수습위원 중 일부와 회의를 열고 새 집행부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오후 9시 조건 없는 무기반납을 주장했던 학생수습위원장이 사임을 선언하고 도청을 떠났습니다.

투항을 주장했던 일부 수습위원들도 도청을 떠났습니다.

오후 10시 도청 내무국장 부속실에 새로운 항쟁지도부가 탄생했습니다.


1980년 5월 25일 밤, 한 운동권 학생은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며칠 내로 자신의 운명이 결정날 것 같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si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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