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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의 불량일기

80년 5월 광주의 풍경-11

임상훈(시몬) 2013-05-23 13:09:12
시몬 (임상훈 기자) [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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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5월 광주의 풍경-11

‘죽음의 행진’ 뒤 계엄군과 협상을 벌이던 재야 인사들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이미 모든 협상이 끝났다. 오늘 밤에 계엄군이 공격해올 것이다.”


도청에 있던 사람들의 바람은 단 하나였습니다.

‘잔혹한 행위에 대해서 사과를 하면 무기를 반납하고 도청에서 물러나겠다.‘


하지만 계엄군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신군부의 정통성이 깨지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는 곳은 민주주의 후원자 미국이었습니다.

미 항공모함 코럴시호가 한국 해역으로 온다는 소식에 들뜨기도 했습니다.


수습위원들은 미국 기자들과 사제들에게 계속 부탁했습니다.

‘부디 미국 대사에게 계엄군과 중재에 나서 달라고 요청해주세요.’


그러나 어렵게 전화가 닿은 미국 대사는 거절했습니다.

‘그러한 역할이 적당치 않으며, 한국 정부가 받아들일 가능성이 없다.’


저녁 7시 10분, 항쟁지도부는 ‘계엄군의 공격 임박’을 시민들에게 공식으로 알렸습니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도청 앞 광장에는 200~300명의 시민들만 남았습니다.

YMCA에 모여있던 대학생 100여 명도 결사항전을 결의했습니다.


한 청년이 외쳤습니다.


“여러분!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기꺼이 죽을 수 있는 사람만 남고 나머지는 돌아가십시오. 오늘 밤 계엄군이 쳐들어오면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그리고 모두 다 죽을 것입니다.”


항쟁지도부는 어린 학생들과 여자들은 돌려보냈습니다.


밤 늦은 시간 당신의 교회에서 도청을 사수하기로 한 한 청년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는 마지막 고백성사를 하기 위해 당신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나지막이 이야기했습니다.

 

“두렵습니다. 그러나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우리가 모두 도망치면, 우리가 잘못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셈입니다. 그 동안 죽어간 사람들의 희생이 헛되이 되는 것입니다.”


당신은 삶의 가치, 생명의 소중함을 이야기하며 말렸습니다.


그는 희생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지금 광주는 완전히 공간적으로 봉쇄됐습니다. 하지만, 시간은 결코 봉쇄할 수 없을 거예요. 저희 죽음은 역사 속에서 살아있을 겁니다. 역사와의 소통 속에서 민주주의를 이뤄낼 겁니다.”


당신은 더 이상 그를 붙잡을 수 없음을 느꼈습니다.

‘교회’를 위해 죽은 신앙인들의 역사를 생각했습니다.


청년은 집에 붙여 달라며 편지 한  통을 건넸습니다.

미소 짓는 얼굴로 꾸벅 인사를 하며 떠났습니다..


당신은 앞으로 평생 그 얼굴을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1980년 5월 26일 밤, 한 성당의 사제는 그 어느 때보다 간절히 신의 구원을 갈구했습니다.


si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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