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회원가입 | ID/PW 찾기

시몬의 불량일기

80년 5월 광주의 풍경-13

임상훈(시몬) 2013-05-25 01:42:47
시몬 (임상훈 기자) [쪽지]
/webzine/community/nboard/36/?n=43903 주소복사

80년 5월 광주의 풍경-13

“시민들은 집에 있을 것.”

“공무원들은 일찍 출근할 것.”

“폭도들은 자수할 것.”


하늘에서 들리는 소리였습니다.

헬리콥터들의 고성능 확성기에서 모든 것이 끝났음을 알려줬습니다.


계엄군은 전염병이 창궐했던 도시처럼 광주 시내를 소독했습니다.


그날 광주는 죽음의 도시였습니다.  

시내에 나온 사람들은 모두 무표정한 얼굴이었습니다.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 더 깊은 절망, 말 못할 회한.


5월 29일, 129구의 시신이 망월동에 묻혔습니다.

 

 

 

 

 

 

 

 

 

 

 


계엄군은 31일 철수했습니다.

 

그날 밤과 이튿날 새벽, 시내 곳곳의 전신주에 붉은 색으로 저주가 붙었습니다.


‘살인마 전두환’.


6월 2일 전남매일신문은 김준태 시인의 <아 아, 광주여! 우리 민족의 십자가여>를 1면에 실었습니다.

많은 부분이 삭제됐지만, 많은 시민들이 울었습니다.

이 신문은 곧 폐간당했습니다.

 

 


6월 4일 광주일보는 ‘무등산은 알고 있다’는 큰 글씨를 1면에 실었습니다.

 

시민들은 또 울었습니다.

 


광주는 여전히 외로운 섬이었습니다.

계엄군과 싸울 때도 그랬고, 그 후로도 그랬습니다.

외부에서 광주는 ‘폭도’와 ‘간첩’의 도시로 낙인이 찍혔습니다.


80년 5월30일 경북 영주 출신의 서강대생 김의기는 서울 종로 기독교회관에서 투신했습니다.

광주를 직접 봤던 그는 ‘광주학살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6월 9일에는 노동자 김종태가 광주학살을 규탄하는 전단을 뿌리고 분신했습니다.


이듬해 5월 27일 광주 출신의 서울대생 김태훈(경제학, 4학년)이 도서관 4층에서 투신했습니다.

운동권과 거리가 멀던, 조용한 성격의 모범생은 광주항쟁 책임과 처벌을 요구하며 몸을 던졌습니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광주는 외로운 섬이었습니다.

광주 바깥에서는 여전히 '폭도'와 '폭동'의 각인이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simon
최신목록 1 | 2 | 3 | 4 | 5 | 6 | 7 |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