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RPG에서 소지품창(인벤토리) 정리는 귀찮고 짜증 나는 일입니다. 유저 편의성이 부족한 옛날 게임에서는 아이템 정리가 더 어려웠습니다. 크기가 제각각인 아이템들을 제한된 공간에 차곡차곡 정리해 넣는 이른바 ‘테트리스’가 필수 소양처럼 여겨 지기도 했죠. 지금도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일부 게임에 남아 있는 디자인입니다.
그런데 이 ‘아이템 테트리스’는 종종 예상치 못한 쾌감을 안겨줍니다. 아이템들을 어렵사리 꽉꽉 채워 넣어 귀환할 때면, 어려운 퍼즐을 풀어낸 듯한 뿌듯함마저 느껴집니다. 한 번에 더 많은 아이템을 확보하는 만큼, 캐릭터도 빨리 성장합니다.
8월 16일 출시한 로그라이크 RPG <백팩 히어로>는 이러한 아이템 정리의 쾌감을 아예 핵심 메카닉으로 심화해 만든 게임입니다. 소지품창 정리라는 지루한 작업을 어떻게 흥미롭게 풀어낼 수 있는지 언뜻 상상이 잘 안 되지만, 직접 플레이해보면 깊이 있고 기발한 여러 아이디어에 푹 빠지게 됩니다. 어떤 게임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소지품창 정리’라는 핵심 메카닉을 잠깐 뒤로 미뤄두고 보면, <백팩 히어로>는 근본적으로 로그라이크·던전탐사 스타일의 턴제 RPG입니다. 회차마다 새롭게 형성되는 던전을 탐사하며 점점 더 강력한 아이템을 습득해 성장하는 방식은 동일 장르의 여느 게임과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이때 보유 아이템의 성능보다 더 중요한 것이 아이템의 구성과 배치입니다. 각 아이템의 위치, 그리고 이를 통해 발생하는 시너지에 따라 같은 아이템들을 가지고도 전반적 성능은 전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대다수 아이템에 인벤토리 ‘위치’와 관련된 복잡한 옵션이 따라붙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머리 보호구 유형의 아이템들은 대부분 배치된 위치를 기준으로 아래 방향에 칸이 많을수록 더 많은 방어력 보너스를 제공합니다. 화살 아이템들은 오른쪽에 빈칸이 많을수록 더 많은 대미지를 줍니다.
위치 선정에 제약을 가하는 옵션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가벼움’ 속성이 있는 아이템은 인벤토리의 최상단에만 둘 수 있고, 반대로 ‘무거움’ 속성이 있으면 무조건 가장 아래에 깔립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아이템의 상호관계도 생각해야 합니다. 인접한 방어구에 보너스를 주는 갑옷이 있는가 하면, 다른 무기와 이웃하면 약해지는 창도 있습니다. 대각선상에 위치한 다른 아이템의 능력을 끌어다 쓰는 칼도 있고, 턴이 지날 때마다 빈칸을 따라 이동하다가 어딘가 가로막혔을 때 비로소 능력이 발동하는 괴팍한 물건도 있습니다.
간추린 설명만 봐도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백팩 히어로>의 아이템들은 배치에 따른 보너스와 페널티, 타 아이템과의 상호작용 방식, 구체적인 성능 등에서 매우 다채로우며, 그만큼 무궁무진한 ‘빌드’를 가능케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배치만 새로 했을 뿐인데 캐릭터의 성능이 확연히 개선되는 마법 같은 상황을 자주 맞닥뜨릴 수 있습니다. 반대로, 뻔히 보이는 ‘더 좋은 배치’를 놓치는 바람에 이길 수 있는 적에게 당하고 마는 상황도 충분히 발생할 수 있습니다.
만약 골머리를 앓아가며 나만의 배치를 완성했는데, 정작 전투 시스템이 너무 단조로워 빌드의 완성도를 만끽할 수 없다면 재미는 크게 줄어들 것입니다. 다행히도 <백팩 히어로>는 간결한 룰을 차용하면서도 다양한 시나리오가 전개될 수 있는 전투 시스템을 가지고 있습니다.
<백팩 히어로>의 전투는 흔히 말하는 ‘코스트 계산’을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기본적으로 적과 아군은 매라운드 자기 방어력을 올리거나 적을 공격하는 두 가지 행동 중 하나를 취할 수 있습니다.
공격당하면 공격력 수치만큼의 방어력이 감소하며, 따라서 방어력 수치 이상의 공격을 가했을 때만 실제 대미지를 입힐 수 있습니다. 방어력은 누적되지 않고 매라운드 갱신됩니다.
적 유닛의 머리 위에는 다음 라운드 행동을 미리 알려주는 아이콘까지 친절하게 출력됩니다. 따라서 유저는 매라운드 철저한 ‘딜 계산’을 통해 3회의 행동포인트(에너지) 안에서 적에게 최대 피해를 강요하고 자신의 피해를 최소화할 방안을 강구하면 됩니다.
이때 각종 상태이상과 특수능력이 변수로 작용합니다. 상대의 공격력을 깎거나, 적 공격을 무효로 하거나, 맞는 횟수만큼 추가 대미지를 주거나, 막대한 피해를 주고 자멸하는 등의 다양한 전투 기믹이 존재하며, 이 덕분에 전투 상황이 다채로워지고, 전략의 심도 또한 깊어집니다.
그러나 ‘안 될 싸움’을 전략으로 이겨내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결국에는 아이템을 잘 선정해 효율적으로 배치하는 캐릭터 빌드가 성패를 가르는 데 훨씬 큰 영향을 줍니다.
이때 색깔 뚜렷한 빌드를 다양하게 시도해볼 수 있다는 점이 게임의 최대 매력입니다. ‘방어력 괴물’을 만들어 볼 수도 있고, 상태이상으로 적을 제압하는 캐릭터로 만들어볼 수도 있습니다. 특수하고 강력한 ‘전설적’ 아이템을 찾았다면 그 아이템을 중심으로 빌드를 구상해보는 일도 가능합니다.
다만, 첫 번째 보스를 제압한 뒤 급격히 상승하는 게임의 난도로 인해 이러한 다양한 가능성을 미처 만끽해보기도 전에 ‘처음’으로 돌아가야 하는 일이 빈번히 발생하는 편입니다.
이는 이 게임의 독특한 레벨업 시스템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인벤토리가 가장 중요한 게임인만큼 레벨을 올릴 때마다 가방을 조금씩 확장할 수 있는데, 레벨을 충분히 올려보기 전 자꾸만 ‘벽’에 부딪히는 일이 빈번해 ‘후반부 빌드’를 경험해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게임이 마련한 풍부한 콘텐츠를 부분적으로만 소화하게 되는 셈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것은 의도된 게임 디자인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만큼 ‘더 고민할 여지’가 남아있다는 신호이기도 하니까요. 실제로 첫 지역을 반복 플레이하면서, 같은 아이템 풀 안에서도 점점 더 강력한 퍼포먼스가 나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흔히 ‘캐릭터가 아니라 유저가 강해지는’ 유형의 게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과정이 ‘지루하지 않다’는 것 또한 주목할 만한 장점입니다. 아이템이 다양하게 마련되어 있고, 조합과 배치의 경우의 수가 무궁무진하기 때문에 매 회차의 경험이 이전과 크게 달라질 수 있어서 입니다. 심지어 비슷한 아이템을 가지고도 ‘배치 전략’에 따라 게임 내용은 판이하게 바뀔 수 있습니다.
게임에 좀처럼 질리기 어려운 이유는 또 있습니다. 시작 캐릭터에 따라 판이하게 바뀌는 게임 시스템이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백팩 히어로>에는 퍼스, 토트, CR-8 등 3명의 시작 캐릭터가 있습니다. 이중 퍼스는 아이템을 배치, 사용하는 가장 기초적 메카닉을 가집니다. 그런데 토트와 CR-8은 다른 장르의 게임플레이 메카닉을 일부 빌려오면서, 같은 룰 안에서도 전혀 다른 플레이 감각을 선사합니다.
먼저 토트는 ‘덱 빌딩’ 요소를 차용했습니다. 퍼스와 기본 아이템은 공유되지만, 여기에 ‘인각’이라는 별도의 마법 아이템 체계가 추가됩니다. 인각은 ‘행동 포인트’를 소모하지 않고 소환할 수 있습니다. 일반 아이템처럼 인벤토리를 차지하지만, 다음 라운드가 되면 사라집니다. 일부 인각은 즉시 소모되기도 합니다.
이 때문에 인벤토리 관리 원칙이 퍼스 때와는 크게 달라집니다. 인각을 배치할 수 있는 여유 공간을 늘 염두에 둬야 하며, 인각과 일반 아이템과의 상호작용도 고려 대상입니다. 더 나아가 인각의 ‘덱’ 구성에 따라서도 빌드의 강약이 좌우됩니다. 이렇게 새로운 층위가 더해지면서, 새로운 성장과 전투의 재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로봇인 CR-8의 시스템은 더욱 독특합니다. ‘파이프 퍼즐’ 장르의 메카닉을 일부 빌려와, ‘기판 설계’를 콘셉트로 삼고 있습니다. 인벤토리 상에 ‘전하’를 흐르게 해, 그 경로상의 여러 아이템과 상호작용하도록 만드는 방식입니다.
토트의 ‘인각’처럼 CR-8로 플레이할 때만 나오는 별도의 아이템 풀이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전하를 여러 번 나눠 방출하거나 양쪽으로 가르는 등의 ‘기판 프로그래밍’에 필요한 아이템, 그리고 전하와 특수하게 상호작용하는 각종 공격, 방어, 소모품 등도 존재합니다.
CR-8의 인벤토리는 전투 돌입 후 ‘재 프로그래밍’이 가능하지만 여기에 별도의 아이템이 필요하고 그 횟수에도 제한이 따르기 때문에, 기판을 사전에 완벽히 디자인하는 데에서 재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대신 전투 돌입 이후 전략을 구사하는 재미는 다소 경감하는 느낌입니다.
<백팩 히어로>는 8월 18일 현재 스팀 리뷰어 89%로부터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밸런싱, 콘텐츠 확보 등이 완전하지 않은 얼리액세스 단계인 만큼 관련 문제를 지적하는 의견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가장 비판받는 지점은 난이도 조절 측면입니다. 특히 초반 이후 적들이 인벤토리를 강제 점유하거나 상당한 페널티를 안기는 ‘저주’ 공격을 남발한다는 사실이 여러 유저에게 불합리한 요소로 지적 받습니다.
또한 일부 아이템의 기능은 툴팁 설명만으로는 정확히 이해하기 힘들어 시행착오를 통해야 한다는 점 또한 불편한 점입니다. 아이템의 종류가 많기 때문에 이런 불편은 가중됩니다. 부분적으로는 번역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지만, 일부는 원문 설명을 참조해도 이해하기 버겁습니다.
그러나 혹평하는 유저들 또한 장기적인 잠재력에서는 높은 점수를 주고 있습니다. 밸런스와 콘텐츠 문제가 해결된다면 더 좋은 평가를 얻을 수 있을 듯합니다. 개발사가 직접 빠른 리밸런싱에 대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어 귀추가 주목됩니다. 혹 패치를 기다리기 힘든 유저라면 ‘맞춤(커스텀) 게임 플레이’를 통해 시스템을 일부 조율해 즐기는 방법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