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팀에서는 5월 4일부터 8일까지 '루도내러콘'(LudoNarraCon)이라는 내러티브 게임을 기념하는 디지털 축제가 열리고 있다. 이미 출시한 작품과 곧 출시를 앞둔 작품들이 다수 소개된 목록에서 <고스트피아>는 특유의 그림체로 시선을 끌었다.
"게임 안에는 퀵타임 이벤트나 시나리오 분기가 없다. 우리는 모든 노력을 최고의 스토리를 만드는 것에 쏟아부었다."
도대체 어떤 스토리를 담아냈길래 게임의 장점인 다양한 상호작용을 모두 덜어내고도 이렇게 자신감이 있는 걸까? 비주얼노벨, 읽는 영화, 스토리 게임 어떤 단어로 이 게임을 규정해야 할까? <고스트피아>의 데모 버전을 플레이해 봤다.
게임명: <고스트피아>
장르: 비주얼노벨
출시일 및 플랫폼: 닌텐도 스위치(2023년 3월 23일, 일본/5월 23일, 북미)/ 스팀(2023년 2분기)
정가: 19.99달러(약 26400원, 닌텐도 스위치 기준)
개발사/배급사: Chosuido/ room6, yokaze
한국어 지원: X (영어, 일본어)
*현재 국내에서는 스팀 데모 버전만 플레이할 수 있어, 데모 버전 플레이를 기준으로 기사를 작성했습니다. 정식 출시 이후 게임의 세부 사항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주인공의 이름은 '사요코'. 게슴츠레한 눈에 트렌치코트, 흑갈색 머리가 특징인 소녀다. 사요코는 기억이 희미하다. 분절된 기억만을 가지고 자신과 이 도시의 과거를 따라가며 눈이 쌓인 길을 천천히 걷는다. 그리고 길 한복판에 있는 미사일을 마주한다. 이 도시가 처음 생겼을 때부터 있었다는 미사일에는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마치 남산타워에 가서 자물쇠라는 추억을 남기고 오는 사람들처럼 이 도시의 풍습인 듯하다.
사요코는 미사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자신의 이름이 적힌 자리를 정확히 겨냥해 강하게 걷어찼다. 그리고 그 순간 들려오는 다른 인물의 목소리. "미사일이 터지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라고 외친 '아냐'다. 아냐는 (화면에서는 주황색이지만) 빨간 머리와 쾌활한 성격이 특징인 사요코의 친구다. 사요코는 자신이 마을의 금기를 건드렸다는 생각에 집으로 황급히 돌아간다.
코트를 벗고 신발을 벗는다. 처음에는 옷부터, 나중에는 사요코 본인까지 세상이 거품처럼 녹아내리기 시작한다. 어디까지가 비유고 어디까지가 꿈인 걸까. 어디서부터가 진지한 현실일까. <고스트피아>는 특유의 "아무렴 어때" 방식의 스토리 진행을 처음부터 끝까지 꾸준하게 밀어붙인다. 처음엔 얼핏 무책임한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 스토리라인은 잘 쓰여진 소설이라고 해도 믿을 꼼꼼한 문장력과 흥미로운 설정의 유기적인 연결로 촘촘하게 연결된다.
깊은 잠에서 깨어난 사요코가 두 번째로 만나는 인물은 금발의 소녀 '퍼시피카'다. 그리고 "새로운 유령이 곧 올 것"이라는 소식을 전해준다. 미사일에 이어 이제는 유령이라니!
<고스트피아>라는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겠지만, 게임의 배경은 유령도시다. 처음에는 우리가 흔히 '사람이 없는 도시'라는 의미로 비유적인 표현으로 쓰는 그 유령도시라고 생각했으나, 진짜 말 그대로 유령들이 사는 도시다. 당연하게도 사요코, 아냐, 퍼시피카 3인방도 모두 유령이다.
퍼시피카를 통해 마을의 비밀을 조금씩 듣게 된다. '교회'라는 집단에 의해 마을이 통제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마을에 있는 유령의 수는 지금까지 1,024명에서 단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 마을에 1,025번째 유령이 새로 온다는 소식에 3인방은 간소한 맞이를 준비하려 한다.
이야기를 관통하는 핵심 소재가 있다면 '외로움'과 '낯섦'이다. 직접적으로 이 단어들이 언급되는 사례는 적지만, 사요코가 파편적인 기억과 악몽 때문에 고통받을 때 유일하게 희망을 주는 존재들은 아냐와 퍼시피카다. 세 사람은 여러 형태로 각자의 유대감을 보여준다.
사요코가 퍼시피카와 차를 마시는 장면에서는 '닌자'의 예법으로 인사를 나누며, "교회는 똥, 똥은 교회"라고 함께 외치는 것으로 공감대를 형성한다. 이때 퍼시피카가 사요코를 안아주는 과정에서 사요코에게 100년 묵은 우유 냄새가 난다며 도대체 언제 씻은 거냐고 타박하기도 한다. 다소 유치할 수도 있는 장면들은 외로운 도시 안에서 살아가는 소녀들에게 남아있는 마지막 순수함을 보여주는 장치라서, 무거운 분위기를 적재적소에 전환해준 장치가 되어주었다.
3인방이 도시 외곽의 쓰레기장을 뒤지러 갔을 때는 발을 헛디뎌 목숨을 잃을 뻔한 사요코를 아냐가 극적으로 구출해 준다. 앞서 미사일 킥 사건 때도 아냐가 영웅처럼 등장했듯이, 사요코가 위기에 빠질 때 아냐는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준다. 아냐가 만든 비밀병기(?)인 개조 차량을 타고 유령도시를 탈출하는 것은 3인방의 장기 목표로 자연스럽게 자리 잡게 된다.
세 사람은 긴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온 사요코는 다시 깊은 잠에 든다. 지지직거리는 화면 사이로 세 사람의 행복한 추억이 스쳐 지나간다.
"탕!"
갑자기 들리는 총성. 방금 전까지 행복한 표정을 보여주던 흑갈색머리의 주인공은 무슨 영문에선지 시체가 되어 있는 빨간머리 소녀와 금발의 소녀를 끌고 나타난다. 어디까지가 꿈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일까.
<고스트피아>의 데모 버전의 플레이타임은 짧지 않다. 이어지는 에피소드 2에서는 주인공 사요코의 활약이 도드라진다. 앞선 에피소드 1에서는 유령도시 안의 다른 인물들이 거의 등장하지 않았으나, 길가에서 자신의 가족에게 받은 스트레스를 사요코에게 푸는 할아버지를 만나며 새로운 갈등 국면이 펼쳐진다.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인 '외로움'을 언급하는 할아버지. "내 딸이 되어다오"라는 부탁과 달리 태도는 저자세와 고압적인 분위기를 넘나든다. 잃어버린 기억 속에 유도 검은띠를 딴 경험이라도 있었는지 위기의 순간에 할아버지를 한 번에 날려버리는 사요코는 그 상황과 스스로의 행동에 놀라며 자리를 피한다.
이 때, 노인을 폭행한 '닌자'를 발견했다는 신고를 받고 경찰이 출동한다. 한 명의 수사관과 3명의 경찰관에게 순식간에 포위 당하고, 경찰들은 사요코에게 총을 겨눈다.
"탕!!!"
총성이 울렸지만, 경찰의 총알은 사요코의 머리카락을 스쳐 지나갔을 뿐이다. 사요코는 <존 윅>을 뛰어넘는 액션을 보여주며 경찰들을 제압하고, 수사관에게도 똑같은 유도 기술을 활용해 매운맛을 보여준다. 닌자 취급을 하는 사람들에겐 닌자의 예법으로 대해주는 것이 맞다는 게 사요코의 설명이다.
게임의 본질은 재미라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고스트피아>는 그런 측면에서 흥미로운 스토리와 긴장감을 놓을 수 없는 연출로 구성된 좋은 내러티브 게임이다. 멀티 엔딩이나 선택지를 고르는 분기가 없어도, 액션 장면에서 나올 법한 미니게임 등이 없어도 충분히 플레이어를 만족시킬 수 있었다.
한국어 지원을 하지 않는 게임인 동시에, 텍스트에 사용되는 어휘 또한 어려운 단어들이 섞여 있어 언어의 장벽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매력적인 캐릭터와 설정 그리고 어떻게 진행될지 예측할 수 없는 스토리는 언어를 잊고 게임에 몰입하게 만들어 준다. <고스트피아>의 정식 버전은 스팀에서 2023년 2분기에 출시 예정이다. 한 편의 애니메이션 장편 영화를 보는 것 같았던 게임 <고스트피아>의 세계에 여러분도 발을 들여보시길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