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뇌는 급격한 스트레스 상황에 노출됐을 때 투쟁과 도피의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한다고 하죠. 이때 자율신경계가 작동해 심장 박동을 높이고 근육을 팽창시키는 등 신체를 도망/싸움에 대비시키는데, 이를 ‘투쟁-도피 반응’이라 부릅니다.
싸움은 도망만큼이나 원초적인 공포 저항 수단이란 얘깁니다. 그래서인지 적과 싸울 수 없는 호러 게임은 조금 더 무서운 듯합니다. <암네시아> 시리즈 역시 전투 메카닉이 없는 공포 시리즈로 잘 알려져 있지만, 최근 출시한 신작에서는 오랜 전통을 깨고 주인공에게 무기를 쥐여 줬다는 소식입니다. 6월 6일 출시한 <암네시아: 더 벙커>를 플레이해 봤습니다.
전쟁을 무대로 한 호러물은 적지 않습니다. 국내에서도 일찌감치 베트남전 배경 호러 영화 <알포인트>가 흥행했고, 서구권에서는 1, 2차 세계대전의 상흔을 소재로 삼은 공포물이 다양하게 제작되어 왔습니다.
<암네시아: 더 벙커>는 지리한 참호전이 이어졌던 제1차세계대전 당시 유럽의 지하 벙커를 배경으로 합니다. 프랑스군인 주인공이 포탄 구덩이에 낙오된 동료 병사를 이끌고 전선을 빠져나오던 중, 독일군에 습격당해 쓰러지는 장면으로 게임은 시작됩니다.
이윽고 눈을 뜬 곳은 어떤 벙커 내부의 야전 병상. 주인공의 기억은 얼마간 끊겨 있는데, 이는 앞서의 피습이 아닌 벙커에서 벌어진 모종의 상황 때문으로 보입니다. (두 사건의 전후관계 역시 분명치 않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니 부서진 시설과 시체들만 눈에 띕니다. 군의관 책장에서 발견한 진단 기록에 따르면, 주인공은 스스로 저지른 ‘어떤 일’의 여파로 해리성 기억상실을 겪고 있으며,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습니다. 한편 벙커는 알 수 없는 존재의 공격으로 만신창이가 되었고 유일한 입구마저 무너졌습니다. 이제부터 주인공은 입구를 뚫고 나갈 방법을 찾아 벙커를 누벼야 합니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듯 곳곳에 놓인 쪽지, 사진을 통해서만 조금씩 드러나고, 컷씬이나 스크립트가 동원된 직접적인 스토리텔링은 볼 수는 없습니다. 시리즈 기존 작품들에선 스토리 연출이 게임의 큰 축을 차지했던 것에 비해 우회적이고 간접적인 방식인 셈인데, 이는 후술할 게임의 비선형적 디자인과 관련이 깊습니다.
비선형적 게임 디자인은 시리즈 기존 게임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암네시아: 더 벙커>만의 또 다른 파격입니다.
이번 작품에서 유저는 복잡한 벙커를 원하는 순서와 방식으로 탐험하게 됩니다. 정해진 순간에 준비된 연출을 맞닥뜨리게 되는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자율적 생존의 와중 자연스레 무서운 상황에 놓이는 호러 서바이벌 장르의 문법을 따랐습니다.
인벤토리 제약, 희귀한 탄약, 아이템 합성 시스템, 안전하게 숨어 진행상황을 저장할 수 있는 ‘세이프 룸’ 등 요소에서도 장르적 전형을 고루 참고했습니다. 맵 곳곳이 특정 유형의 장애물(쇠사슬, 육각너트 등)로 가로막혀 있고, 각각에 맞는 도구(절단기, 렌치 등)를 통해 이를 극복한 뒤 나아갈 수 있는 계단식 콘텐츠 구조도 동일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채로운 시도를 했는데, 장르 내 대부분 게임과 다르게 <암네시아: 더 벙커>의 도구 획득순서는 회차마다 무작위로 결정됩니다. 따라서 각 유저의 맵 탐방 순서와 게임 경험 또한 조금씩 다른 양상을 띠게 됩니다.
이는 자칫 꼬여버리기 쉬운 시스템이지만 제작진은 기발한 방법을 썼습니다. 게임의 ‘세이프룸’ 근처 작전 창고(mission storage)에는 병사들 이름이 적힌 개인 관물대가 모여 있습니다. 관물대들은 4자리 비밀번호로 잠겨 있고, 그 안에 필수 도구가 한 종류씩 들어 있습니다.
관물대를 열기 위해서는 병사들의 인식표(군번줄)를 찾아 그 뒤에 적힌 비밀번호를 확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제작진은 인식표의 위치와 비밀번호, 관물대 속 도구의 종류를 회차마다 뒤섞는 방법으로 ‘랜덤’을 구현해 놓았습니다.
이렇듯 유저별 여정이 달라질 수밖에 없는 시스템을 고려, 다소 파편적 스토리텔링을 선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결과 유저들은 사건의 타임라인을 뒤죽박죽 접하게 되는데, 대신 대부분 메모에서 사건 서술과 지시 대상을 명확히 함으로써 전후 맥락에 큰 상관 없이 내용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신경 쓴 점이 인상 깊습니다.
한편, 도구들은 저마다 활용도(범용성)가 다르기 때문에, 획득 순서에 따라 체감 난이도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유저별 클리어 속도 편차도 상당히 큰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전반적 게임 경험의 퀄리티가 오로지 도구 획득의 순서만으로 결정되지는 않는데, 이는 게임의 자유도 덕분으로 보입니다.
<암네시아: 더 벙커>의 로딩화면에는 몇 가지 팁이 하나씩 소개됩니다. 그중 가장 많이 눈에 띄는 문구는 다음과 같습니다. “난관은 여러 방법으로 극복할 수 있다. 당신의 재치와 지능을 이용해 실험하라. 가능해 보이는 방법이 있다면, 실제로 가능할 확률이 높다.”
이 자신만만한 문장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처럼, <암네시아: 더 벙커>는 창의적 문제 해결이 가능한 ‘몰입 시뮬’적 특징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비선형적 게임플레이, 그리고 주인공을 쫓는 괴물의 AI와 맞물려 알찬 공포 경험을 선사합니다.
주적인 ‘괴물’은 벙커의 벽 곳곳에 뚫어 놓은 구멍을 통해 등장하고, 사라집니다. 괴물은 빛을 싫어하고 소음에 민감하기 때문에, 유저는 그 사이에서 미묘한 줄타기를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세이프룸 지하에 있는 발전기에 주기적으로 기름을 공급하면 전기 조명을 켤 수 있는데, 조명이 밝혀진 구간에서는 괴물의 등장 빈도와 가능성, 그리고 출현 지속 시간이 줄어듭니다.
그 외 어둠을 쫓는 수단으로 기본 지급되는 휴대용 ‘수동 발전’ 조명이 있지만 이는 양날의 검입니다. 작동시 엄청난 소음을 내는 주제에 지속시간이 매우 짧아 여기에만 의존했다간 괴물을 스스로 불러들이는 꼴이 됩니다. 그뿐만 유저가 벌이는 상당수 활동에 이와 같이 소음이 뒤따르기 때문에 항상 모든 행동에서 위험을 감수하게 됩니다.
다행히 괴물은 주인공에 가까워지면서 스스로도 큰 소리를 낼 뿐만 아니라, 구멍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을 땐 정해진 효과음이 흘러나옴과 함께 화면이 약간 흐려지는 시각 효과도 나타납니다. 따라서 대처할 시간을 조금 벌 수 있습니다.
‘대처’에는-서두에 말한 것처럼-크게 도망과 싸움이 있습니다. 도망에 성공하려면 괴물의 위치 파악이 급선무입니다. 괴물은 인식 범위가 넓고 이동속도가 빠르며, 소리뿐 아니라 시각으로도 주인공을 감지합니다. 따라서 괴물의 위치를 이쪽에서 먼저 알고 인식 범위에서 벗어나 사물의 뒤, 방 안, 혹은 옷장 등에 숨어야 생존할 수 있습니다. 한 번 발각당했다면 방해되는 물건들을 사정없이 부수며 접근하기 때문에 살아남기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싸움 측면에서는 시스템적 자유도가 좀 더 부각됩니다. 게임에는 충격을 줘서 폭발시킬 수 있는 화약통, 부수면 독성 기체가 흘러나오는 가스통, 던져서 나무 문을 부술 수 있는 벽돌, 발에 걸려 작동하는 ‘부비트랩’ 등, 다양한 상호작용 요소가 있습니다. 여기에 화염병, 수류탄, 리볼버, 석유, 방독면 등 소지하고 있는 도구를 조합하면 괴물의 위협을 다양한 방식으로 떨쳐낼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예상 가능한 접근로에 미리 가스통을 배치해 놓은 뒤 방독면과 권총을 들고 기다리거나, 벽에 난 구멍을 화약통으로 틀어막아 괴물이 스스로 폭파시켜 대미지를 입게끔 유도할 수도 있습니다. 괴물은 일정량의 대미지를 입으면 구멍으로 도망쳐 한동안 등장하지 않습니다.
사물과 도구를 이용한 높은 자유도는 진로 개척에서도 여러 옵션을 열어 줍니다. 좁은 골목을 막아선 쥐 떼(다가서면 단체로 물어뜯습니다)를 예로 들면, ▲고기를 던져 다른 곳으로 유인하거나 ▲횃불, 조명탄으로 물러나게 하거나 ▲화염병, 화약통으로 죽이는 등의 방법을 취사선택할 수 있습니다.
모든 행동에는 장단점이 따르므로 상황적 유불리를 잘 고려해 작전을 짜야 합니다. 다시 쥐 쫓기의 예를 들면, 횃불을 사용할 경우 쥐들이 소리를 질러대는 데다가 금방 원위치로 돌아오지만, 자원 소모가 상대적으로 적은 게 장점입니다. 화염병을 던진다면 쥐가 모여드는 근본 원인인 사체를 불태우는 효과가 있지만, 역시나 소음이 날 뿐더러 귀중한 자원인 석유가 소모됩니다.
언제든 등장할 준비를 갖춘 강력한 괴물에 더불어, <암네시아: 더 벙커>의 공포를 완성하는 또 하나의 숨은(?) 공신은 벙커라는 공간의 특수성입니다. 전쟁을 위한 임시 시설이 주는 불안한 분위기는 앙상하고 투박한 구조와 조악한 조명을 통해 잘 전달됩니다.
그 외에도 벙커 속 환경은 유저 신경을 곤두세우는 온갖 장치로 가득합니다. 육안으로는 주변 파악조차 힘든 어둠 속 비좁은 공간을 누비며 함정, 소음, 목표를 동시에 신경 써야 합니다. 어기에 사물을 클릭한 뒤 손의 움직임을 재현해 움직여야 하는 특이한 조작방식, 아예 존재하지 않는 HUD, 굼뜨고 느린 캐릭터 동작 등 의도된 불편 요소까지 더해져 답답함을 증폭시킵니다.
이렇듯 조여드는 기분을 마련해둔 덕에 비선형적 시스템과 괴물의 AI가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한껏 고조된 긴장 속에서는 사소한 의외성과 긴박감도 당황과 공포를 손쉽게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반대로, 높은 자유도를 기반으로 대응 수단 역시 충분히 주어지기 때문에, 능동적으로 상황을 극복하고 탈출하는 재미도 함께 느낄 수 있습니다. 공포와 생존의 밸런스가 중요한 장르 특성을 잘 이해한 것으로 느껴집니다.
다만 로딩 화면에서 자랑한 수준의 고도화된 몰입 경험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아이템 및 환경요소의 활용 방안은 분명 다양하지만, 도구 획득을 통해 다음 콘텐츠에 접근해야 하는 근본 시스템 특성상, 상당수의 난관들은 직관적 풀이법이 아닌 정해진 방법(도구)으로만 해결할 수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결론적으로, <암네시아: 더 벙커>를 100% 즐기기 위한 핵심은 기대감 조절입니다. 시리즈 전통의 계승, 혹은 '몰입 시뮬레이션'과 '호러 서바이벌' 두 장르의 완벽한 조합을 기대하지 않는다면, <암네시아: 더 벙커>만의 독자적인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