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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뷰/리뷰

'뉴 사이클' 리뷰…장르가 '핑계'가 되었을 때

포스트 아포칼립스 시티빌더 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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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승언(톤톤) 2024-01-30 19:08:22
국내에서는 조금 생소한 장르명인 ‘사변물’(speculative fiction·사변 소설)은 현실적 제약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또 다른 세상을 가정하는 모든 창작 갈래를 아우른다.

여기서 ‘사변’이라는 말을 조금 더 생활적 표현인 ‘짐작’(speculation)으로 옮겨 보면 용어의 의미가 더 쉽게 와닿는다. 나치 독일이 2차대전에서 승리한 세상을 ‘짐작’해 본 <높은 성의 사나이>나, ‘영국사회주의’라는 가상의 사상 아래 지배되는 민중의 삶을 ‘짐작’해 본 <1984> 등이 사변물의 예시가 될 수 있다.

용어를 처음 보편화한 것은 미국의 과학 소설 거장 로버트 A. 하인라인으로, 원래 자신의 작품들을 다른 과학 소설과 구분 짓고자 사용했던 말이다. 1947년 에세이 ‘사변물 저술에 관하여’에서 하인라인은 사변물이란 “과학 혹은 기술 자체가 아닌 그로 인해 촉발된 새로운 상황에 대응하는 인간의 행동을 다루는 내러티브로서, 과학적 문제보다 인간에 더욱 집중한다”고 설명했다.

당대 동일 장르의 여타 소설들이 과학 기술적 상상에 주로 집중되어 있던 것에 비해, 자신은 작품에서 그러한 기술에 영향받은 인간과 사회에 집중했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 등 그의 대표작을 살펴보면, 과학적 상상력보다는 정치·외교·사회적 사변이 더 밀도 높게 작동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로버트 A. 하인라인의 작품 <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은 슈퍼컴퓨터 마이크와 함께 달 식민지 독립을 이끄는 주인공 일행의 이야기다. (출처: Berkley)


# 변화한 사변물의 정의

‘사변물’의 정의는 이후 점차 변화하면서 쓰임이 확장되어 갔다. 특히 캐나다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가 자신의 작품들을 설명하는 맥락에서 용어를 재정의한 것이 계기가 됐다.

그는 사변물을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았지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상상하여 다루는 장르로 정의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시녀 이야기>는 극우 기독교 집단이 쿠데타로 미국을 차지한 뒤, 여성들을 ‘아이 낳는 도구’로 전락시킨 디스토피아 사회를 다룬다.

엄밀하게 따지면 두 사람이 내린 정의는 서로 다르지만, 가상의 사건이 인류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을 개연성 있게 묘사하는 외삽적 작법을 말한다는 점에서는 상통한다.

그런데 2000년대에 들어 사변물의 정의가 다시금 확장되면서 이러한 특징 또한 필수적인 것은 아니게 됐다. 현재의 ‘사변물’은 이른바 ‘슈퍼 장르’(super genre)로 통한다. 현실 이외의 세계를 다루는 모든 작품을 아우르는 광의의 개념으로 굳어진 것이다. 대체역사, 디스토피아는 물론 판타지, 슈퍼히어로물 등 무수한 창작 갈래가 포함될 수 있다.

<시녀 이야기>는 hulu 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했다. (출처: hulu)


#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개연성이 가지는 의의

세계 멸망 이후를 소재로 삼는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흔히 과학물의 하위 장르로 취급된다. 하지만 멸망의 이유가 불명확하거나 그다지 과학적이지 못한(‘더 로드’, ‘눈먼 자들의 도시’ 등) 사례를 생각해 보면, 넓게는 사변물로 구분할 만하다.

이 중에서 다시 어떤 작품은 하인라인이나 애트우드가 내놓은 더욱 까다로운 정의에 근접하며, 다른 어떤 작품들은 2000년대 이후의 조금 더 유연한 정의에 가깝다. 둘 사이에 객관적인 가치 차이가 있지는 않다. 하지만 멸망한 세계를 비교적 느슨하게 상상하는 후자의 작품들에서는, 종종 장르를 ‘핑곗거리’로 삼는 경향이 발견된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물은 인류가 누적한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 맥락이 단절된 상황을 가정한다. 그래서 ‘개연성 있는 묘사’에 필요한 지식수준이 상대적으로 낮다는 인식이 있다. 실제 한반도 정세를 반영한 군사 소설과, 멸망 후 서울의 무력 집단 간 충돌을 묘사한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 중 전문지식의 필요성이 적어 보이는 것은 아무래도 후자 쪽이다.

그런데 이처럼 높은 접근성 때문인지 허술하게 직조된 세계관으로 청중의 몰입을 해치는 작품이 장르 안에 적지 않다. 이 경우 포스트 아포칼립스 특유의 임팩트도 퇴색하기 쉽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현대 사회를 이루는 제도·기술·문화적 장치들을 걷어냈을 때 비로소 드러나는 인류의 민낯에 등불을 들이미는 장르다.

이런 극단적 가정의 효과가 극대화되려면 ('트롤리 딜레마' 문제가 그러한 것처럼) 우선 청중을 옴짝달싹할 수 없는 궁지에 몰아넣는 것이 우선이다. 답변 회피의 가능성이나 제3의 온화한 선택지가 없는 상황 속에서 청중은 비로소 충돌하는 가치들에 스스로 순위를 매겨보게 된다. 이것은 작품의 몰입감이 충분치 않다면 좀처럼 유도하기 힘든 현상이다.

'트롤리 딜레마'에는 회피할 구멍을 막는 단서들이 붙어 있다. 이때 비로소 의도된 효과가 발휘된다. (출처: 디악시옴)


# '포스트 아포칼립스 시티 빌더' <뉴 사이클>

이런 자극적 문법은 ‘몰입’과 ‘선택’에 특화된 게임 미디어와 특히 궁합이 좋다. 실제로 이 지점에 포커스를 맞춘 게임이 많이 출시했고, 유저들에게 임팩트를 줬다. 공동체의 이름으로 병약자를 희생시킬지 묻는 <프로스트펑크>를 플레이하면서 우리는 현대 국가들이 약자 보호를 명문화하게 된 과정을 한 번쯤 돌아보게 된다. 약자 보호는 어째서 중요할까? 공멸의 위기를 감수할 만큼일까?

한편 지난 19일 출시한 포스트 아포칼립스 시티빌더 <뉴 사이클>은 이런 장르적 활용의 고민이 크게 부족해 아쉬움이 남는다. 이 게임에서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오락적 역할조차 충실히 수행하지 못한다. 상상력을 자극하거나 독창성을 확보하는 수단이 아닌, 허술한 게임 메카닉과 내러티브 설정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더 많이 기능하는 듯하다.

<뉴 사이클>은 미상의 전쟁으로 사회가 모두 멸망한 뒤의 이야기다. 주인공은 소규모 정착민 그룹의 리더가 되어 새로운 삶의 터전을 가꿔 나가야 한다. 이때 게임은 ‘신 구석기’라고 불리는 새로운 기술 단계로부터 시작해 석기-청동기-철기로 이어지는 고대 인류의 기술 발달 과정을 유사하게 따라가는데, 여기서부터 게임의 허술함이 드러난다.


해당 메카닉 자체는 숱한 포스트 아포칼립스 게임(혹은 생존 게임)에서 답습되는 것이지만, 바로 그렇기에 차별화가 필요한 영역이다. 실제로 많은 게임이 새 기술을 해금하는 과정, 혹은 기술 자체에 독특한 메카닉이나 설정을 가미해 인기를 끌었다. 한편 <뉴 사이클>은 정해진 기술 트리를 선형적으로 따라가는 구조로 되어 있는데, 그 과정과 개별 기술의 설정 모두에서 독자적 측면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 게임에서 기술 티어를 해금하는 조건은 정해진 인구수 도달 등으로 비교적 단조로우며 그 구체적 실행 방안에서도 능동적 고민의 영역이 매우 좁다. 이것은 시티 빌더로서의 기본기 부족이라는 관점에서도 바라볼 만하다.

시티 빌더는 치밀한 도시계획과 거시적·미시적 최적화를 통해 집단적 문제(교통, 자원, 복지, 교육, 환경)를 다각적으로 관리하고 대응해 나가는 장르다. 그러나 <뉴 사이클>에서 유저가 계획하고 관리할 부분은 많지 않다. 새 자원 유형을 찾아 관련 시설을 짓고, 자원별 증감을 확인하며 노동력을 배치하는 것이 사실상 활동의 전부다. 각급 노동 인구별 배급량 조절 시스템이 있지만 그 영향력이 대단하지 않다.


이렇듯 콘텐츠 사이클이 일률적인 게임이라 하더라도, 작품만의 특징적 메카닉이 있다면 매력을 발하기에 충분하다. 살아있는 거대 생물 ‘온부’의 등에서 살아가는 내용의 동일 장르 <원더링 빌리지>가 좋은 사례다. 이 게임에서 유저는 온부를 착취할 수도, 아껴줄 수도 있으며 선택에 따라 게임은 역동적으로 어려워지거나 쉬워진다.

반면 <뉴 사이클>에서 포스트 아포칼립스적 상상이나 ‘사변’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모든 설비는 채석장, 제련소, 발전기 등 익숙한 것들이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바로 그 역할만을 한다. 굳이 주제의식 전달과 같은 복잡한 차원의 문제까지 가지 않더라도, 지루함의 문제가 크다.

물론 장르적으로 어울리는 요소가 전무한 것은 아니다. 배급제 메카닉이나 얼기설기 만들어진 건물 외관 등이 대표적이다. 마을이 번성하면 여행자들이 찾아와 합류를 요청하기도 하고, 거꾸로 유저가 정찰대를 꾸려 근처의 다른 지형에 탐사를 보낼 수도 있다. 다만 이 요소들 모두 전형성이 지나쳐 흥미가 떨어진다는 문제가 있다.

유저의 결단을 요하는 이벤트가 발생하기는 한다. 하지만 여기서 결결국 '생산성'의 문제로만 수렴해 흥미가 떨어진다.

멸망한 세상의 혹독한 환경을 강조하는 ‘무작위 이벤트’도 종종 벌어지지만, 이것마저 싱겁다. 주기적으로 보좌관에 해당하는 인물들이 새 정책 도입을 제안해 오거나, 일부 시설을 무력화하는 자연현상이 발생하는 식이다. 하지만 모든 이벤트의 결과가 언제나 ‘투입 자원 대비 생산력 변화’라는 한 가지 변수로만 수렴하면서 매번 비슷한 인상을 안기고 만다.

멀쩡한 전함을 보유한 집단이 찾아와 노동을 강요하는 이벤트는 유일하게 호기심을 자극했던 경험이다. 하지만 이런 성격의 이벤트는 발생 빈도가 워낙 낮아 지루함을 막아주긴 역부족이다. 게다가 신선했던 연출에 비해 이 이벤트 역시 결국 ‘생산력 저하’라는 동어반복적 결과로 이어지면서 이후의 게임플레이에 유의미한 변수로 작용하지 못했다.

이처럼 장르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요소가 빈약한 한편, 타 게임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수준의 설정적 치밀함도 부족하다. 전력망을 연구한 이후 동물 가죽으로 의복을 지어 입게 되는 식의 전개는, 아무리 게임적 허용의 틀 안에서 바라보더라도 여전히 거슬리는 느낌을 준다.

전함의 등장은 놀라움을 안겨줬던 지점이다. 다만 이런 이벤트는 너무 빈도가 낮다.


# 변신할 수 있을까?

종합하면 <뉴 사이클>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팬이나 시티 빌더 팬 모두에게 어필할 매력이 다소 불분명한 게임이다. 두 분야는 서로 만났을 때 적잖은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으며, 실제로 그러한 게임이 시중에 몇몇 출시한 상태라는 점에서 제작진의 고민 부족은 더욱 아쉽다.

창작자마다 장르를 활용하는 방법은 천차만별이다. 하지만 작품의 단점을 감추는 수단으로 활용될 경우 최종 결과물이 만족을 안겨 주는 사례는 경험상 드물다. 한편 <뉴 사이클>이 아직 얼리엑세스라는 지점을 유념할 만하다. 일부 유저들의 부정적 반응에 대해 개발진은 인게임에서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했다.

"유저 여러분, 저희는 저희가 도전한 장르의 어려움과 잠재력을 인지하고 있으며, 소규모 팀으로서 견실한 첫걸음을 내디딘 이후 추가적 경험을 더해나가려는 의도를 전달하고자 했습니다. 그 안에서 저희는 장르의 전통을 고수하고 일정 수준의 품질 기준도 준수하고자 합니다. 게임의 핵심 기반 위에 단계적 개발을 통해 다양한 게임플레이 모드와 다양성을 제공해 나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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