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즐겨 쓰는 '영화 같다'는 말은 다양한 뜻을 담고 있습니다. 현실에서 접하기 힘든 사건, 압도적인 스케일의 광경, 자연의 정취 따위를 '영화 같다'고 부르곤 합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영화는 대단히 큰 범주를 아우르고 있습니다. 'A24 영화 같다'고 하면 기괴한 장면이 떠오르고, '마블 영화 같다'고 하면 슈퍼히어로가 연상되며, '데스티네이션 같다'면 블랙박스 사고 영상이 나올 것만 같습니다.
'영화 같은 게임'은 어떤가요? 우리는 컷씬 등을 통해서 잘 짜인 미장센을 보여주거나 서사에 중점을 둔 게임을 '영화 같은 게임'이라고 부릅니다. <저니>의 마지막 시퀀스와 <갓 오브 워>의 롱테이크는 충분히 '영화적'이라 부를 만큼 구도와 연출이 훌륭하죠. 히데오 코지마의 <데스 스트랜딩>, 퀀틱 드림의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 너티독의 <라스트 오브 어스>도 영화 같은 게임의 대명사로 꼽힙니다.
이 중에는 유명 배우들이 출연했거나, 아예 드라마로 재탄생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영화 같은 게임이 모두 같은 의미를 뜻하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영화 같은 게임은 꼭 훌륭한 것일까요? <세누아의 전설: 헬블레이드 2>(이하 헬블레이드 2)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헬블레이드>는 <헤븐리 소드>, <인슬레이브드>, <DmC: 데빌 메이 크라이>를 만든 닌자 씨어리의 게임 프랜차이즈로 북유럽 신화 속 전사 세누아의 여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조현병을 시각적 효과와 스토리텔링을 통해 액션 어드벤처에 녹여낸 다음, 게임플레이 중 추체험할 수 있도록 개발된 독특한 게임입니다.
1편은 죽은 연인 딜리온을 되찾기 위해 그의 머리를 들고 저승으로 떠난다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 줄거리는 대략 이렇습니다. 어머니로부터 저주(조현병 현상)를 물려받은 세누아는 어린 시절부터 마음의 문을 닫았는데, 딜리온의 존재로 그 문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세누아가 잠시 광야를 떠돌던 중 바이킹이 마을을 습격하며 딜리온은 목숨을 잃게 됩니다. 그 목숨을 되찾기 위해 세누아는 지옥으로 모험을 떠나고, 여러 사건을 통해서 결국 자신과 자신이 겪은 사건을 인정하며 막을 내립니다.
<헬블레이드 2>의 오프닝
<헬블레이드>는 조현병이 동반하는 정신질환을 구현하는 데 상당한 공을 들였습니다. 닌자 씨어리가 이 게임을 만들면서 조현병 당사자와 전문의료진의 이해와 자문을 구하는 과정은 두루 호평을 받았죠. 그렇게 닌자 씨어리는 환청, 환시, 망상을 게임 곳곳에 배치해 단순히 그 증상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게임플레이와 연결했습니다. 자연에서 룬 문자를 읽어서 퍼즐에 사용하고, 길을 찾을 때 환청이 등장하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헬블레이드 2> 또한 그렇게 만들어진 게임입니다. 플레이타임이 6~7시간으로 전편보다 짧아진 대신, 컷씬 등 감상하는 부분의 분량을 끌어올렸습니다. 전편과 마찬가지로 헤드폰으로 전해지는 입체 사운드와 신화적인 북유럽의 배경 그래픽은 최고 수준으로 뽑아냈습니다. 컷씬과 게임플레이가 구분되지 않는 랜더링 기술을 선보이는데, 이 또한 놀라운 기술적 성과라 부를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헬블레이드 2>는 영화 같은 게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표현은 찬사가 아닙니다.
배경과 맞는 문양을 조합해 룬 문자를 만드는 퍼즐이 이번 작에도 들어있습니다.
전반적으로 어두운 배경 속에서 진행됩니다.
세누아는 여행 중 거인을 마주치게 되면서, 이야기의 양상이 바뀝니다.
<헬블레이드 2>는 전작과 마찬가지로 플레이어의 개입이 최소화되었습니다. 전술한 게임의 핵심 기믹은 대부분 전작에서 완성된 요소를 차용한 수준의 것입니다. 때문에 이번 게임에서 특별히 새로운 것이라 부를 만한 것은 서사뿐입니다. (<헬블레이드 2>의 서사구조에 관해서는 뒤에 설명하기로 하겠습니다.)
게임은 컷씬 - 길찾기+퍼즐 - 전투의 흐름을 가져갑니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HUD나 튜토리얼은 없습니다. HUD 대신 영화에서 보는 레터박스가 있습니다. '영화적 몰입감'을 위한 장치로 판단됩니다. 그러나 이 때문에 게임 진행을 위한 최소한의 장치마저 제거해 버린 듯합니다. 재미가 있고 없음을 떠나서, 게임이라는 미디어는 결국 플레이어의 개입(플레이)으로 상호작용하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완성되어야 합니다.
기자가 플레이했을 때, <헬블레이드 2>의 상호작용은 정돈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세누아는 게임 중반부 숲속에 갇히게 됩니다. 망상으로 이루어진 이 구역은 게임 내내 이어지는 서라운드 환청이 계속되면서, 특정 구역은 붉은 유리벽으로 막혀있습니다. 붉은 유리벽을 깨고 앞으로 나가려면 횃불과 상호작용을 해서 횃불을 들고 게임에 나서야 하는데, 게임은 '횃불이 있다'는 것을 제외한 어떠한 힌트도 주지 않습니다.
이 게임을 <젤다의 전설>과 비교하지 않더라도 여타의 RPG처럼 기물과의 상호작용이 많은 게임이라면, 이러한 횃불 퍼즐의 의도를 단박에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헬블레이드 2>의 상호작용이라는 것은 문을 열고 룬 문자를 해독하는 데 그칩니다. 열쇠로 문을 연다는 것은 언뜻 보면 기본적인 설정이지만, 열쇠가 열쇠라는 것을 게임에서 알려주지 않으면 플레이어는 헷갈립니다. '횃불을 든다'는 기믹이 추가된다면, 당연히 그에 대한 기본적인 안내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헬블레이드 2>는 횃불이 상호작용 가능한 오브젝트인지 정확히 알려주지 않습니다. 세누아 속의 세누아가 대사로 힌트를 주었을 지도 모르지만, 그 힌트가 힌트인지 판별하는 것부터가 어렵습니다. 게임 중 세누아 속의 여러 세누아들이 '여기로 가야 한다'는 힌트를 주곤 하죠. 그런데 게임 상에서 '여기'가 어딘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음성정보를 통해서 '여기'를 추측해야 하는데 그 '여기'를 따라가 보면 막힌 곳이 나오는 경우도 더러 있습니다. 세누아는 조현병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세누아 속 세누아의 말이 모두 맞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병증과 그 병증을 게임이라는 미디어를 통해 재현한 개발사의 의도를 폄훼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게임은 '영화적 몰입감'에 소프트웨어의 모든 것을 맞춘 나머지, 제시해야 할 기본적인 가이드와 상호작용마저 최소화한 듯합니다. 퍼즐은 반복적이고, 길 찾기는 불편합니다. 그런데 <헬블레이드 2>가 어려운 게임이 아니기 때문에 극복의 희열은 없습니다. 1:1 전투는 좋은 장면일 수는 있겠지만, 좋은 플레이는 아니었습니다. 타이밍에 맞춰서 구르고, 막고, 찌르고, 특수능력을 사용해서 마무리하는 것의 반복입니다.
문제의 횃불
마지막 챕터까지 전투 양상은 변화하지 않습니다.
이 퍼즐을 '집중하기'를 통해 해제한 다음, 특별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을 게임은 따로 알려주지 않습니다.
<헬블레이드 2>는 이전에 비해 성장한 세누아가 거인에게 공물로 바쳐지는 동족들을 구하기 위해 모험을 떠나는 '사가'(Saga)를 담고 있습니다.
이미 전작에서 세누아가 그렇게 된 이유, 연인을 잃은 과정과 지옥에서 만난 진실 등은 충분히 다루어졌습니다. 마찬가지로 호오를 떠나서, 이 사가는 신화적 알레고리와 병력(病歷)과 유전이라는 테마 안에서 마무리를 짓습니다. 전작에서 세누아는 (모든 영웅설화가 그렇듯) 이전보다 더 성장한 모습으로, 아직 더 들려줄 거리가 많다고 예고합니다. <헬블레이드 2>의 이야기는 바로 전편에서 세누아가 들려주려 했던 그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노예 상인으로부터 동족을 구하기 위해 칼을 들고, 이후 노예 상인들이 거인들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공물로 노예들을 바쳐온 것을 알고 거인을 상대하려 나서고, 거인의 상처를 치유해 주고, 은신족의 가이드를 받으며, 결말을 향해 달려갑니다. 이야기의 스케일이 명계(冥界)를 오갔던 전작보다 커진 셈입니다.
그런데 사변적인 내레이션, 세누아들의 내면과 큰 줄기의 이야기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잠깐의 집중을 놓치면, 왜 노예 상인이 아니라 거인을 잡아야 하는지, 거인을 잡는 것이 아니라 트라우마를 해소하기 위해 진짜 이름을 불러 잠재워야 하는 것인지, 새로운 등장인물이 어떻게 조력자가 되었는지 짚어내기 어려워집니다. 최종 보스 올리프의 등장 또한 세누아가 아버지와 겪었던 내면의 갈등을 물화한 것이겠지만, 다소 뜬금없습니다.
<헬블레이드 2>는 세누아의 내면과 '세계를 구한다'라는 이야기를 통일시키는 데 실패한 인상이었습니다. 주인공이 병증을 가지고 있고, 그 한계 속에서 타인을 구하는 데 전력을 다하고 있지만, 더 커진 이야기의 스케일은 세누아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고 평가합니다. 세누아를 조작하고, 세누아의 내면을 들여다보지만, 거대한 이야기에 함께 하고 있다는 감각은 좀처럼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동료와 함께 모험을 떠나는데
사변적인 게임의 성격 탓에
집중이 어렵습니다
<헬블레이드 2>는 전작처럼 실험적인 게임이며, 대단히 훌륭한 시청각적 결과물입니다. 그리하여 <헬블레이드 2>는 영화적인 게임이라고 부를 수 있겠지만, 매끄러운 상호작용과 흥미로운 레벨디자인을 제작했냐면 그렇다고 볼 수 없습니다. 다양한 분기와 결말이 마련된 인터랙티브 무비와도 다른 양상입니다.
바로 이 인터랙티브 무비의 대두와 함께 영화와 게임의 장벽이 무너지고 있다는 진단이 나온 지도 오래입니다. 게임은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 같은 이야기를 담을 수 있을 테지만, 게임이라는 매체의 본질은 게이머와 게임 사이의 상호작용입니다. e스포츠와 게임방송 등 '보는 게임'의 등장으로 그 영역이 확장됐지만, 게임이라는 물건 그 자체는 여전히 같은 기준에서 평가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헬블레이드 2>는 잘 보여주고 들려주지만, 잘 '하게' 만들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이런 수동적 게임은 얼핏 최근 대두된 모바일 방치형게임의 인기와 맞물려 보이기도 하는 듯합니다. Xbox 진영에서 밀어주는 닌자 씨어리의 신작을 켜놓은 채 방치하는(Idle) 게임들과 같은 열에 놓고 논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하면서도, 게임이라는 매체와 그 상호작용의 의미가 날로 변하고 있다는 것이 감지됩니다.
어쩌면 플레이어가 수백 시간 투자하는 게임은 구세대 미디어가 되고 <헬블레이드 2> 같은 게임이 '차세대 미디어'가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연말 시상식에서 그래픽/사운드 등 기술 분야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것으로 예상해봅니다.
닌자 씨어리만큼이나 언리얼 엔진 5의 에픽게임즈가 기뻐할 만한 수준입니다.
그러나 게임은 테크데모가 아니라는 것이 기자의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