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식 RPG의 특징은 높은 자유도과 치밀한 세계관입니다. 주사위와 입담만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쳤던 TRPG에 익숙한 서양의 플레이어들은 게임에서도 ‘플레이어의 선택 하나하나에 따라 달라지는 진짜 같은 세계’를 맛보기를 원했습니다.
그 결과 <울티마>나 <발더스게이트>처럼 끝을 알 수 없는 스토리와 마음먹은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도를 가진 게임들이 등장했죠. 서양식 RPG가 적과 아군이 뚜렷하게 나뉘어 있고 하나의 대표적인 이야기를 따라가는 일본식 RPG와 구분되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기술과 그래픽이 발전하고 게임 하나를 만드는 데 드는 노력이 늘어나면서 서양식 RPG는 큰 난관을 겪습니다. 높은 자유도를 위해서는 다양한 상황에 대한 콘텐츠를 많이 만들어야 하는데, 투입되는 시간과 인력, 자금이 천문학적인 수준으로 치솟은 것입니다.
게다가 몇 십 년을 이어져 내려 온 TRPG에 기반해 지나치게 치밀한 세계관을 만들다 보니 각종 마법이나 설정, 시스템 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책 한 권 분량의 매뉴얼로도 부족한 상황까지 찾아왔습니다. 오죽하면 “서양식 RPG는 시스템을 이해할 때쯤 엔딩을 본다”는 말까지 있을까요?
바이오웨어는 <드래곤에이지>를 통해서 이에 대한 해법을 제시했습니다. 지나치게 복잡한 D&D의 설정에서 벗어나 ‘간소하지만 짜임새 있는 독자적인 세계관’을 도입하고, 메인 스토리를 하나로 묶어 둠으로써 세계관은 살리면서 접근성과 개발에 드는 노력을 줄이는 데 성공한 것이죠.
또한 게임 곳곳에 다양한 부가 선택지를 둠으로써 자유도를 확보하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서양식 RPG의 새로운 장을 연 <드래곤에이지>의 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디스이즈게임 안정빈 기자
■ <발더스게이트>의 정신적인 후속작
리뷰에 앞서 <드래곤에이지>에 대한 간단한 설명부터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드래곤에이지>의 기본 구성은 <발더스게이트>나 <네버윈터나이츠> 등과 비슷합니다. 간단히 말해 전형적인 서양식 RPG를 떠올리면 됩니다.
게임은 철저히 대화와 선택중심으로 진행됩니다. 나중에 다시 설명하겠지만 <드래곤에이지>의 대화는 어지간한 책 몇 권쯤은 우습게 쓰고도 남을 분량입니다. 이 방대한 대화 속에서 플레이어는 진행에 도움이 될 힌트를 찾고 자신이 원하는 길로 사건을 이끌어 나가야 하죠.
대화는 정말 많습니다. 끝도 없이 많아요.
조작방식도 비슷합니다. 캐릭터는 기존의 <발더스게이트> 시리즈처럼 시점을 멀리 둔 채 마우스로 조작할 수 있고, 스페이스 바를 눌러서 게임 도중 언제나 게임을 정지 시킬 수도 있습니다. 물론 화면이 정지된 상태에서도 다양한 명령을 미리 입력해 둘 수도 있죠.
게임의 난이도가 상당히 높고 세세한 명령이 필요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실제 플레이 도중에도 몇 번씩 화면을 멈추게 되죠.
다만 <드래곤에이지>에서는 화면을 당겨서 캐릭터를 W, A, S, D버튼으로 움직일 수 있는데요, 움직임이 자연스럽고 단축키도 있기 때문에 3인칭 액션에 가까운 기분으로 플레이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다른 캐릭터는 미리 설정된 전략에 따라 움직이게 되고요.
물론 이 경우에도 플레이하는 캐릭터를 수시로 바꿔가면서 다양한 명령을 내려줄 수 있습니다. 참고로 콘솔 버전에서는 콘트롤러의 한계상 원거리 시점이 빠지고 근거리 시점에서의 조작만 가능합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액션수준의 빠른 공방전은 무리입니다. 일단은 RPG이니까요.
서양식 RPG의 특성상 다양한 스킬과 용도불명의 잡다한 아이템이 마련돼 있다는 점과 메인 시나리오 이외에도 수백 개의 부가 퀘스트가 등장한다는 점도 비슷합니다.
여기까지는 기존의 서양식 RPG와 <드래곤에이지>의 비슷한 부분입니다. 그럼 이제 <드래곤에이지>만의 특징에 대해 짚어 보도록 하죠.
■ 이야기는 하나, 하지만 모든 선택은 유저의 몫
<드래곤에이지>의 메인 스토리는 단 한 가지입니다. 어떤 이유로든 배신을 당한 주인공이 강력한 군대를 모아 악의 축인 다크스폰과 맞서 싸우게 됩니다. 이게 끝입니다. 플레이어가 게임 도중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이 진행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플레이어의 행동도 제약돼 있습니다. 때릴 수 있는 NPC가 정해져 있고 갈 수 있는 장소와 아직은(혹은 다시는) 갈 수 없는 장소도 정해져 있죠. 게임 도중 갈 수 있는 장소도 대부분 각 세력의 주요 거점 뿐입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 모든 장소를 돌아야 이야기가 이어지죠.
심지어 몇몇 종족과 직업의 경우에는 캐릭터의 설정도 준비돼 있습니다. 가문의 후계자나 쫓겨난 거렁뱅이 드워프 같은 식으로 말이죠. 덕분에 <드래곤에이지>는 기존의 서양식 RPG에 익숙하지 않은 유저들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습니다. 앞으로 뭘 해야 하는지를 계속해서 알려주니까요.
반면 ‘게임을 시작하자마자 치트를 쓰고 옆에 보이는 탑을 쓸었더니 엔딩이 나오더라’라는 <템플 오브 엘리멘탈 이블>이나 ‘퀘스트하기 귀찮아서 NPC를 죽이니 보상아이템을 주던’ <발더스게이트> 정도의 자유도를 바란 유저들은 실망할 수도 있는 부분입니다.
참고로 이 게임에서 배신은 밥 먹듯이 일어나는 일상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드래곤에이지>의 자유도가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드래곤에이지>는 이런 꽉 막힌 메인 스토리 속에서도 끝없이 이어지는 ‘다양한 부가적인 선택’을 통해 유저에게 자유도를 선사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이야기의 진행 순서와 세력의 선택입니다. <드래곤에이지>에서는 다양한 지역을 오가며 동료들을 모으는 것이 게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데요, 플레이어의 레벨에 따라 적의 레벨과 보상 등이 자동으로 맞춰지기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순서대로 대륙을 돌아다닐 수 있습니다. 어떤 순서로 지역을 탐험하느냐에 따라 세부적인 내용이 바뀌기도 하죠.
또 <드래곤에이지>의 세계에는 다양한 경쟁 집단이 존재합니다. 크게는 엘프와 늑대인간 등의 종족 간 대립부터 차기 왕의 선출을 앞둔 드워프의 양대 세력, 작게는 미치광이 할아버지와 나무정령 등의 분쟁이 있죠. 당연한 말이지만 플레이어가 어느 쪽 편에 서는가에 따라 진행방식과 결과는 확 달라집니다.
대화의 선택에 따른 변화도 있습니다. <드래곤에이지>의 대화는 NPC의 대화에 플레이어가 일일이 선택지를 고르는 방식입니다. 모든 대화가 실제 이야기처럼 구현돼 있기 때문에 플레이어가 고르는 선택지도 그만큼 많습니다. 사소한 NPC와의 대화 한 번에 10번 정도 선택지가 나오는 건 기본이죠.
과장 하나 안 보태고 선택지가 수 천 개는 훌쩍 넘습니다.
재미난 점은 대화의 흐름 하나하나에 따라 지속적으로 상황이 달라진다는 점입니다. 심지어는 같은 대화를 반복하다 보면 새롭게 열리는 선택지도 있을 정도죠. 한 집단을 궤멸 시켜야 하는 전투가 대회에 따라 1:1의 싸움으로, 혹은 돈 몇 푼을 쥐어 주고 끝나는 시시한 사건이나 모두가 협력하는 행복한 결말로 바뀔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드래곤에이지>에서는 유저의 선택에 따라 ‘수 천, 수 만 가지’ 상황이 달라집니다. 이야기의 시작과 끝은 정해져 있지만 그 중간과정은 유저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식이랄까요? 엔딩을 본 이후에도 고르지 못했던 선택지를 골라보기 위해 2회차 플레이를 진행하게 되죠.
결과적으로 <드래곤에이지>는 하나의 굵직한 메인스토리를 정해둠으로써 서양식 RPG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진입장벽을 낮추는 데 성공했습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처럼 어떤 선택지를 골라도 됩니다.
심지어 가능한 모든 동료와 NPC를 죽이더라도 메인 스토리가 진행되고 엔딩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전의 서양식 RPG와 비교해봐도 ‘확실히’ 쉽습니다.
반면 끝없이 늘어진 선택을 통해서 플레이어의 자유도도 확보했죠. 정해진 지역 내에서 선택지와 상황만 달라지는 모습이므로 (모르긴 몰라도) 개발비도 꽤나 절감됐을 겁니다. 자유도와 접근성을 사이에 둔 바이오웨어의 ‘고심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야기에 영향을 주는 선택지에만 세이브를 다 하려면 데이터가 100개는 필요할 겁니다.
■ 서양식 RPG의 난해함을 벗겨낸 접근성
시나리오 이외의 접근성도 좋습니다. 우선 난이도 선택이 친절해(?)졌습니다.
<드래곤에이지>에서는 이지, 노멀, 하드, 나이트메어의 네 가지 난이도를 지원합니다. 각 난이도에 따라 적과 아군의 피해 공식과 적의 패턴, 같은 편 마법의 피해 강도가 정해지죠.
난이도 이지는 일반공격만 갖고도 게임을 쉽게 클리어할 수 있을 만큼 쉬운 반면 나이트메어에서는 ‘지나가는 적 A’에게도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합니다. 물론 그만큼 다양한 패턴을 보여주기 때문에 승리했을 때의 성취감도 높죠.
그런데 <드래곤에이지>에서는 언제 어디서나 난이도를 바꿀 수 있습니다. 성취감을 위해 나이트메어 모드로 게임을 진행하다가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적 앞에서만 노멀모드로 게임을 바꾸는 것도 가능합니다. 초반에 어떤 난이도를 골라야 할 지 고민하거나 자신에게 맞지 않는 난이도 선택으로 플레이 내내 고민할 필요가 없는 뜻이죠.
초심자와 숙련자 모두 원하는 게임을 즐길 수 있습니다.
시스템도 친절합니다. 저널을 통해 퀘스트의 다양한 정보를 지역 단위로 보여주는 것은 물론이고, 온라인게임에서 주로 사용하는 ‘퀘스트 수락 NPC’나 ‘퀘스트 완료마크’ 등도 미니맵에 표시됩니다. 퀘스트 아이템을 따로 분류하기 때문에 헷갈릴 일도 없고 저널에서는 퀘스트의 완료순서와 달성과정을 일일이 체크해 줍니다.
아이템이나 퀘스트와 관련된 오브젝트는 반짝이는 불빛으로 표시되고 버튼을 눌러 일괄적으로 확인할 수도 있습니다. 과장 좀 보태서 영어를 모른 채 마크와 고유명사만 따라가도 어지간한 퀘스트는 모두 완료할 수 있을 정도에요.
앞에서도 말했지만 모든 적의 레벨이 플레이어의 현재 능력치에 따라 자동으로 맞춰지기 때문에 소위 말하는 ‘레벨 노가다’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것도 장점입니다.
■ 바이오웨어의 독자적인 세계관과 설정
탁월한 접근성에는 바이오웨어에서 직접 만든 세계관과 설정도 한 몫을 거듭니다. 기존의 서양식 RPG는 대부분 TRPG인 <던전앤드래곤(D&D)>의 세계관과 설정을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던전앤드래곤>의 설정이 그만큼 뛰어났고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초보자의 시점에서 바라보면 <던전앤드래곤>의 설정은 매우 복잡합니다. 30년이라는 세월 동안 쌓인 각종 내성굴림부터 특성과 전문화기술, 다양한 종족과 직업, 마법에 따른 조건, 재료, 각종 아이템 제작 등을 모두 익히려면 게임을 하는지 공부를 하는지 모를 정도입니다.
만약 게임을 즐기면서 배운다고 해도 이 모든 시스템을 이해할 때쯤이면 엔딩이 눈앞에 다가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앞에서 ‘서양식 RPG는 시스템을 이해할 때쯤 엔딩을 본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죠.
환영과 마법, 그리고 피와 살육이 뒤섞인 새로운 세계관을 만든 <드래곤에이지>.
바이오웨어는 이런 단점을 해결하기 위해 <던전앤드래곤>를 간소화한 독자적인 세계관을 <드래곤에이지>에 불어 넣었습니다. <드래곤에이지>에는 인간과 엘프, 드워프의 3개 종족과 로그, 메이지, 워리어의 3개 직업만이 등장합니다.
대신 일정 레벨마다 특성화 직업이라는 일종의 상위직업을 고를 수 있도록 했죠. 또 무기에 따라 전혀 다른 스킬을 제공해서 같은 직업이라도 어떤 무기 특성을 올렸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능력을 발휘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스킬과 능력치 부분도 간소화됐습니다. 스킬을 직업과 무기별로 나누고 모든 스킬을 4단계의 스킬트리 형식으로 정리했습니다. 스킬을 익히기 위해 필요한 것도 능력치와 기본특성 딱 두 가지뿐입니다. 레벨 당 1개씩의 스킬을 배울 수 있기 때문에 자기가 언제 어떤 스킬을 배울 지 한 눈에 파악할 수 있습니다. 스킬의 개수도 직업당 30여 개로 적당한 수준입니다.
초반에 한 번 설정하면 더 이상 바꿀 수 없었던 능력치도 레벨이 오를 때마다 3포인트씩 원하는 능력치를 찍는 ‘친숙한 방식’으로 변경됐습니다. 일반적인 패키지/온라인게임에서 자주 접하던 모습이랄까요?
덕분에 스킬과 아이템, 직업 등을 두고 골머리를 썩힐 필요도 없어졌습니다. 계산을 잘못해서 배우는 시기가 늦어질 수는 있어도 계산 착오로 아예 못 배우는 스킬이나 직업은 없으니까요.
<드래곤에이지>의 스킬트리. 기존의 서양식 RPG보다 훨씬 보기 편하고 쉽습니다.
세계관과 설정을 뜯어 고치면서도 게임의 분위기를 살리는 것은 잊지 않았습니다. <드래곤에이지>의 엘프는 인간의 노예로 지내다가 탈출했다는 설정이고, 드워프는 지극히 폐쇄적이라 타 종족의 개입을 전혀 원하지 않죠.
아군으로 인정받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 그레이워든의 시험이나 게임 내내 끊이기 않는 배신과 우울한 진실, 자신의 잇속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행사는 사람 등은 바이오웨어가 만들고 싶었던 ‘다크판타지’가 무엇인지 여실히 보여줍니다.
■ 다양한 설정을 통해 한 단계 높아진 전략성
<드래곤에이지>는 기존 서양식 RPG의 많은 부분을 바꾸면서도 바이오웨어 특유의 전략성을 살리는 것은 잊지 않았습니다. 게임에는 각양각색의 함정과 장치들이 등장하죠. 배경인줄 알았던 발리스타가 실제로 발사되는가 하면 즉석에서 함정을 설치하고 플레이어를 유인하는 적도 있습니다.
반대로 모습을 숨긴 로그로 시야를 확보하고 메이지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광역마법을 사용하는 등 플레이어가 취할 수 있는 전략도 무궁무진합니다. 오히려 독약과 트랩 등의 제작아이템 활용이 쉬워진 탓에 적을 유인해서 함정에 빠트리는 등 ‘더욱 사실적인 전투’를 펼칠 수 있습니다.
솔직히 ‘멋’은 없습니다. 대신 처절하죠.
한층 강화된 인공지능 설정도 만족스럽습니다. <드래곤에이지>에서 플레이어는 대부분 여러 캐릭터를 번갈아 가며 조작하게 됩니다. 모든 캐릭터에게 일일이 모든 명령을 내려줄 수도 있지만 전투의 난이도가 높고 위치, 트랩, 독약, 마법, 스킬 등에 따른 변수가 워낙 많아서 그때마다 일일이 게임을 정지했다가는 진행이 엄청나게 느려집니다.
특히 콘솔 버전에서는 전체 명령을 아예 내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인공지능 설정입니다. <드래곤에이지>에서는 모든 캐릭터가 4개의 전략설정용 슬롯을 갖고 있습니다. 여기에 레벨이 오르거나 특정 스킬을 찍어줄 때마다 1개씩 추가 슬롯이 열리는 방식이죠.
이 전략설정은 매우 구체적입니다. 예를 들어 체력이 20% 이하일 때 가장 가까이에 있는 적에게 마나드레인을 사용한다거나 플레이어가 조작 중인 캐릭터를 공격하는 적이 둘 이상의 엘리트 몬스터면 광역 스턴기술을 쓴다거나 하는 식입니다.
덕분에 플레이어는 ‘어지간한 경우’ 마음에 드는 캐릭터만을 조작하면서 보다 전략적인 전투를 편하게 이끌어 나갈 수 있습니다.
팀워크도 잘 맞습니다. 인공지능 맞나 싶을 정도.
다만 가끔씩 명령에 없는 행동을 하거나 적 앞에서 무기를 내내 갈아 끼우는 등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특정 명령을 반복하는 등의 문제점도 보였습니다. 패치를 통해서 수정되기를 바라는 부분이지만 아직까지는 고쳐지지 않았더군요.
■ 압도적인 풀 보이스 지원과 최고의 그래픽
바이오웨어 특유(?)의 거창한 스케일도 여전합니다. 특히 수 십 시간에 달하는 대화의 내용이 모두 음성으로 나온다는 점은 매우 놀랍습니다. 게임 중에는 수 천 개의 선택지에 따른 수 천 개의 대화를 모두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게임 중간중간에 난데없이 떠드는 파티원끼리의 잡담도 모두 음성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대화가 컷 신으로 진행되고 입 모양이나 동작도 모든 음성에 맞춰져 있기 때문에 표정만 봐도 상황을 알 수 있을 만큼 매우 자연스럽게 대화가 흘러갑니다.
워낙 당연한(?) 거라 설명을 빼놓았지만 그래픽도 할 말이 없는 수준입니다. 사실적인 캐릭터나 배경묘사는 물론 움직임도 상당히 자연스럽습니다. 적의 공격을 자신의 무기로 막거나 피하고, 쓰러진 적에게 마무리를 가하는 동작들도 꼼꼼하게 설정돼 있습니다.
특히 마무리 공격은 슬로우 모션과 함께 ‘이 게임이 왜 18금인지 느낄 수 있는 과감한 장면’들을 여과 없이 보여주죠. 드래곤을 쓰러트릴 때의 마무리 공격은 무슨 수를 써서라고 꼭 봐야 할 명장면 중 하나입니다.
뛰어난 그래픽과 세련된 연출, 거기에 모든 대사가 음성으로 지원되면서 <드래곤에이지>는 ‘정말로 영화와 같은 장면들’을 게임 내내 보여줍니다. 인터페이스만 빼고 선택지만 자연스럽게 넘기면 영화의 일부분이라고 거짓말을 해도 먹힐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일반적인’ 화면입니다. 시점도 게임에서 사용하던 것 그대로입니다.
■ 곳곳에 널린 소소한 잔재미들
소소한 즐길거리도 충분합니다. 바이오웨어에서는 발매 당시 <드래곤에이지>의 플레이시간을 80시간 정도라고 밝혔는데요, 보통 40시간 정도면 첫 번째 엔딩을 보게 됩니다. 물론 메인 스토리만 따라갔을 경우의 이야기입니다. 남은 40시간은 서브 퀘스트와 숨겨진 요소들의 몫이죠.
<드래곤에이지>에 숨겨진 요소들은 매우 많습니다. 대화 도중에 전혀 얘기치 않은 곳에서 퀘스트가 추가되기도 하고 용의 비늘을 가져가면 반색을 하는 대장장이나 뒷골목의 거래상인이 주는 수집 및 배달 퀘스트, 게임 곳곳에 놓인 서적(Codex)의 수집, 특정 캐릭터에게 선물을 주면 시작되는 소름 끼치는 추가 퀘스트 등이 곳곳에 마련돼 있습니다.
실제로 상급직업은 모두 숨겨진 조건을 달성해야 얻을 수 있는데요, 파티원과의 대화부터 특정한 조건을 만족시킨 채 퀘스트를 클리어해야 하는 등 직접 찾아내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각 파티원과 선물, 대화 등을 통해 호감도를 올리면 능력치가 올라가고, 대화 내용이 바뀌고, 새로운 스킬을 익힐 수 있는 것도 게임의 특징이죠. 추가로 이성 캐릭터와는 뜨거운 밤(…)을 보내는 것도 가능합니다만 기대(?)는 안 하는 게 좋습니다. 지상파 TV 드라마에서도 나올 법한 수준입니다.
특정 조건을 만족시키면 파티원 전부를 적으로 돌릴 수도 있습니다! 세상은 어차피 혼자 사는 거다!
특히 압권은 게임의 진정한 주인공이자 마스코트로 불러도 손색이 없는 모리건이라는 여자 메이지인데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친해지기를 권합니다. 정말 ‘츤데레의 극’을 보여주는 정신병 말기환자 수준의 감정변화를 감상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게임 곳곳에 바이오웨어의 ‘다크판타지’가 묻어나 있기 때문에 NPC들과의 대화를 통해 이를 느끼는 것도 잔재미 중 하나죠. 반전의 반전에 또 반전을 거듭하는 사소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 예상보다 낮은 언어장벽, 공략집은 금물
국내 유저들에게는 가장 민감할 부분일 텐데요, <드래곤에이지>에서 언어에 따른 진입장벽은 매우 낮은 편입니다. 워낙 많은 대사량 덕분에 기겁부터 할 유저들(…)이 많아 보이지만 캐릭터의 표정과 몸 동작을 함께 보여주기 때문에 실제 대화 내용을 이해하는 건 크게 어렵지 않습니다.
미니맵에 표시되는 지도나 툴팁 설명도 충실한 편이기 때문에 약간의 근성으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다만 패키지와 함께 들어있는 대사집이나 공략을 참고하며 진행하는 것은 추천하지 않습니다.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나간다고 해도 될 만큼 다양한 선택이 나오는 게임인지라 미리 해답을 알고 진행하면 게임의 재미가 반감되기 때문이죠.
차라리 도저히 대화를 모르겠다는 경우 일단 찍은 후에(…) 나중에 이게 이런 상황이었구나를 이해하는 편이 바람직합니다.
선택을 남의 손에 맡기는 순간 반쪽 짜리 게임이 됩니다.
■ 숱한 고민이 만들어낸 역작 중의 역작
<드래곤에이지>는 간단히 말해서 ‘기존 서양식 RPG의 단점을 뜯어 고치면서도 장점은 최대한 살린 수작’입니다.
무엇을 해야 할 지 모를 만큼 방대한 자유도와 논문 하나 써도 될 만큼 복잡한 시스템에 대한 부담을 줄여주면서 선택지를 통해 풍부한 자유도와 바이오웨어 특유의 어둡고 치밀한 세계관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죠. 접근성과 게임성 어느 면을 봐도 흠잡을 구석이 거의 없습니다.
선택지는 특히나 악랄(?)해서 모든 선택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무엇을 택하든 그에 따른 ‘다른’ 보상을 받을 뿐이죠. 양쪽이 대립할 경우 특별히 누가 나쁘다고 구분 짓기도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그저 서로의 주장이 충돌했을 뿐이죠. 일반적인 RPG처럼 선택지 중 가장 좋은 보상을 준다거나 가장 정의로운 구문이 나올 것이라 기대하는 건 큰 오산입니다.
좋은 말로 하면 ‘원하는 대로 부담 없이 이야기를 진행’하면 됩니다. 나쁘게 표현하자면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같은, 답 안 나오는 질문을 끝없이 강요 받는 기분이랄까요?
선택의 순간은 지겹게 찾아옵니다. 그러니까 마음을 비우세요.
덕분에 일반적인 RPG에 익숙한 유저라면 초반을 진행하면서 좀 큰 분기가 나왔다 싶을 때마다 따로 저장을 하다가 중반 이후에는 그냥 포기한 채 퀵세이브만 누르고 2회차 플레이를 기약하는 재미난(?) 경험도 맛볼 수 있습니다.
한글화가 아닌 것은 아쉽지만 게임을 진행하고 이해하는 데는 무리 없을 수준의 대사집을 주는 데다 게임 자체도 친절한 만큼 큰 불편은 없습니다.
다만 <드래곤에이지>에 대한 거의 유일한 불만이 있다면 갈 수 있는 곳이 제한돼 있고 맵이 매우 작다는 건데요, 게임을 플레이하는 내내 (심지어는 엔딩까지) <드래곤에이지>의 무대인 ‘페럴든’이 얼마나 작은 나라이고 다른 지역은 어떻고를 연발하는 걸로 봐서 확장팩 몇 개 분량의 이야기는 더 남아있을 듯합니다. 게임 이름도 달리 <드래곤에이지: 오리진>이 아니겠죠?
만약 서양식 RPG를 즐겨 본 적은 없지만 관심을 갖고 있는 유저라면 <드래곤에이지>는 친절하면서도 훌륭한 가이드가 되어 줄 것입니다. 만약 서양식 RPG의 마니아라면 이 리뷰를 읽고 있을 필요도 없습니다. 당장 가서 구입하세요. 바이오웨어는 당신을 실망 시키지 않습니다.
소니에서 과거 <에버퀘스트>를 홍보하며 사용했던 문구를 그대로 이 게임에 바칩니다.
“당신이 가장 싫어하는 친구에게 이 게임을 선물해라. 이것은 그 사람의 인생을 낭비하게 만드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