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하셨습니다.” 이 한마디가 이번 리뷰의 모든 것을 함축한 말이 될 수 있다. 바로 <시드 마이어의 문명 5>(이하 문명5)다.
사실 <문명> 시리즈의 기본 룰은 언제나 동일했다. <문명 5>도 여기서 벗어나지는 않는다. 고대에서 시작해 미래까지 자신이 선택한 문명을 키워 나가면서 정해진 목표를 이루면 된다. 목표도 세계 통일, 유토피아 완성, 우주시대 개막 등으로 변함없다.
이렇게 큰 틀은 유지하되 세부적인 시스템의 변화와 확장을 추구했던 것이 <문명> 시리즈였다. 그리고 최신작 <문명 5>는 줄일 것은 줄이고 키울 것은 키운 모습이다. 그렇다면 <문명 5>는 어떤 게임으로 우리에게 돌아왔을까? 지금부터 하나씩 살펴보자. /디스이즈게임 정우철 기자
이것은 게임이 아니라 미래로 가는 타임머신이다.
■ 헥사의 적용으로 모든 것을 바꾸다
<문명 5>의 첫인상은 전작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일단 게임을 진행하면 많은 부분이 달라진 것을 체감하게 된다. 그 변화의 기준이 된 것은 바로 헥사의 적용이다.
지금까지 <문명> 시리즈는 4각 타일을 사용했다. 그러나 <문명 5>는 6각형, 이른바 헥사 타일을 적용하고 있다. 전작까지 시뮬레이션 게임의 느낌이 강했다면 전략 게임의 느낌이 물씬 풍긴다. 한마디로 <문명>의 스타일에 <삼국지> 느낌의 전투가 벌어진다고 말할 수도 있다.
6각형 타일을 채택하면서 많은 것이 바뀌었다.
헥사 타일을 사용하면서 전선과 유닛의 개념이 새로 만들어졌다. 전작의 유닛 겹치기가 사라지면서 1개의 헥사에 1개의 유닛을 배정해야 한다. 덕분에 상대 국가와 자신의 국가 사이의 국경이 전선으로 이어진다.
유닛 겹치기가 사라짐과 동시에 원거리 공격 유닛이 등장한 것도 전략성 강화에 일조했다. 원거리 유닛이 2헥사 앞을 공격할 수 있게 되면서 유닛 조합에 따른 전투가 중요해진 것이다.
즉 전투의 룰이 개편되면서 전략성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이 됐다. 도시 점령도 도시 자체의 체력을 0으로 만들면 된다. 하지만 수비하는 입장에서는 아무리 수비 병력이 많다고 해도 도시가 점령되기 쉽기 때문에 상대의 유닛 이동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갈 수 없는 산악지형이라도 원거리 유닛만 있으면 문제없다.
즉 자연스럽게 지역방어에서 개인방어로 전략을 세우게 되면서 동맹국 관리 등 외교관계에 따라 상황을 판단하게 만든다. 전체적으로 본다면 단지 타일 하나 바꾸었을 뿐인데 전투부터 외교까지 거의 모든 게임의 방식이 달라진 것을 알 수 있다.
■ <문명 5>에서 간단해지고 복잡해진 것들
전작을 즐겼던 유저라면 <문명 5>에서는 조금 당혹감을 느꼈을 수도 있다. 예전에 하던 방식대로 했는데 결과가 달라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솔직히 <문명 5>는 전작보다 조작이 간단해졌다. 그런데 간단해졌다는 것이 편해졌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일꾼의 예를 들어도 잘 알 수 있다.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가장 많이 생산하는 유닛이 바로 일꾼이다. 보통 중반 이후의 일꾼은 보통 도시 한개에 5~6 유닛 정도. 도시가 많아지면 한 턴에 일꾼 20~30 유닛에 일일이 명령을 내려줘야 한다. 물론 자동으로 명령을 수행하게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자동으로 일꾼에게 일을 시킬 경우 애써 키운 도시를 몰락시키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 전작에서 있었던 특정 업무 강제수행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인공지능이 뛰어난 것도 아니다. 식량생산을 위해 애써 지은 농장 위에 시장을 만드는 등 자신의 생각과 다른 건물이 올라가는 것을 보면 속이 타 들어갈 정도다.
또 주변의 헥사와 유닛, 심지어 건물도 턴을 소비하지 않고 돈으로 살 수 있다. 영토 확장을 돈으로 할 수 있게 되면서 또 고민에 빠지는 것이다.
타일을 돈으로 살 수 있게 돼 시간을 벌 수 있다.
주변 타일을 구입해 영토와 영토를 연결하는 것도 비교적 간단하다.
물론 국력이 커지면 자동으로 일부 영역이 확장되기는 한다. 하지만 눈앞의 자원을 보고 시간을 기다리는 것도 일종의 고문이다. 즉 시간을 돈으로 살 수 있게 되면서 유저의 고민거리는 점점 많아질 수밖에 없다.
<문명 5>는 전체적으로 시스템 자체는 캐주얼해졌지만, 이를 운영하는 플레이어의 생각은 더 복잡해졌다. 자원의 유무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문명의 테크트리가 달라지고, 또 발전 속도 역시 달라진다.
■ 발전과 영토확장 그리고 유닛 업그레이드
<문명 5>에서는 몇 가지 법칙이 생겼다. 같은 유닛이라도 한 단계 발전한 문명의 유닛은 이길 수 없다. 그리고 유닛의 경험치가 쌓여 레벨이 오른 유닛은 강력하다는 것이다. 이는 전투 유닛이 쓰고 버리는 장기말이 아닌, 가능한 살려야 하는 중요한 존재가 됐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가능한 빨리 상대방보다 자신의 문명을 발전시키고, 유닛을 업그레이드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유닛이 겹쳐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전멸될 위기의 유닛은 회복시켜 주는 센스도 필요하다. 또 상대보다 앞선 문명에 있다면 새로운 유닛을 생산하는 과감성을 보여야 할 때도 있다.
영토의 개념도 중요하다. 헥사를 적용하면서 6방향을 모두 신경 써야 한다. 상대 국가와 국경이 형성될 경우 주요 이동 통로를 막아서 지리적 이점을 챙길 수도 있다. 게임 초반에는 국경의 개념이 희미하다. 영토가 작다 보니 국경이 없고 빈 땅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이동에도 제약이 따른다. 상대 국가의 영토에 발을 딛기 위해서는 동맹을 맺거나 뇌물을 주고 허락을 받아야 한다. 이마저도 싫다면 전쟁이다. 자신의 영토가 넓어질수록 상대국과 외교 및 국경관리가 복잡 해질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만약에 간디의 인도 문명이 자신의 국가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면 두통약을 옆에 두고 플레이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국경이 생기면서 유닛의 대치와 전선의 개념이 발생한다.
■ 문명은 역사 시뮬레이션이 아니다
간혹 <문명> 시리즈가 세계사를 따르는 역사 게임인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대항해시대>를 통해 세계지리를, <삼국지>를 통해 삼국지연의를 알 수는 있어도 <문명>를 통해 세계사를 알 수는 없다.
그것이 <문명 5>라면 더욱 달라진다. <문명 4>에서는 최소한 해당 국가의 위인은 역사를 따르긴 했다. 비폭력주의의 간디는 평화주의자였고, 알렉산더나 나폴레옹은 정복자였다. 하지만 <문명 5>에서는 단순히 해당 문명을 대표하는 인물일 뿐, 철저하게 자국이익을 위해 움직인다.
“옥수수를 줄 테니 다이아몬드를 달라!”는 간디의 요구를 거절했더니 선전포고를 날렸다는 이야기는 결코 우스갯소리가 아니다(물론 이 말은 유머는 아니지만 사실도 아니다. <문명 5>에 옥수수라는 자원은 없다).
간디가 비폭력 평화주의자라는 말은 아니다. 정확히 말해서 <문명 5>의 간디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폭력을 실천하는 지도자로 등장한다. 인도 문명을 통해 간디를 선택하면 특유의 보너스 능력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그 능력부터 말이 안 된다.
이미 아마추어 한글화 버전에서 간디의 말투는 거의 건달급이다.
인도 문명의 능력은 도시 수로 인한 불행 두 배, 총 인구로 인한 불행 절반이다. 언뜻 보면 상대 도시를 점령해서 수를 늘릴수록 불행해지는 듯하지만, 이 도시에서 나오는 엄청난 인구 덕분에 결국은 행복해진다는 뜻이다.
만약 인도가 원더 건축물인 자금성을 지으면 아무리 전쟁을 벌여도 국민은 행복한 나라가 만들어진다. 결국 인도라는 국가는 전쟁을 통해 타국을 점령해서 행복을 추구하는 특성을 가진다고 이해하면 된다.
<문명 5>에서 간디의 인도 문명은 언제나 상위 성적을 차지하며 호시탐탐 정복을 위한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 만약 <문명 5>를 최고 난이도로 즐기고 싶다면 상대 문명 전부를 인도로 지정할 것을 권한다. 뒷일은 책임질 수 없지만….
혹시 <문명 5>에서 간디가 비폭력 평화주의자라고 생각하고 플레이한다면 아마 간디에게 짓밟힌 자신의 영토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문명 5>에서 간디는 평화주의자가 아니라 세기말 패왕이다.
이렇듯 게임은 게임이다. 세계사와는 거의 관계가 없으니 오해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
<문명 5> 최고 난이도를 즐기고 싶다면 이런 설정을 추천한다.
■ 삼국지가 그냥 게임이라면 문명은 T.O.P
<문명> 시리즈의 특징(?)이라면 정신을 차리고 나면 어느새 미래에 와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문명 5>를 즐기고 있는 지인들의 경험담 대부분이 “주말의 기억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의 증세를 살펴보니 다들 ‘한 턴만 더’ 증후군에 빠져 있었다.
‘한 턴 만 더’라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원인은 무엇일까? 그 이유는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맞아 떨어지는가에서 오는 짜릿한 쾌감이 <문명 5>에서는 더 크게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문명 5>에서는 자신의 판단 하나 하나가 다음 턴에서 고스란히 결과로 돌아온다. 식량 생산과 공업화 중 어떤 것을 먼저 선택할지, 어떤 유닛을 생산할지, 심지어 무역 요청을 받아들일지 거부할지에 따라 결과는 달라진다.
피라미드 완성 한 턴을 남기고 ‘람세스가 먼저 건설했습니다’는 메시지가 나온다면?
모든 선택의 결과는 다음 턴에서야 확인이 가능하다. 자신이 판단한 행동의 결과가 다음 턴에 나오는데 잠시라도 끊을 수 있을까? 또 상대의 움직임에 다음 턴에 할 일을 머릿속에 정리했는데 이를 잠시 멈출 수 있을까? 적어도 주변에 그런 결단력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더 큰 문제는 엔딩을 본 다음이다. <문명 5>의 엔딩은 썰렁하다. “당신은 승리했습니다” 메시지가 나오는 것이 전부다. 이겼다는 성취감을 느끼는 것 자체가 무리. 그런데 이를 문제라고 지적하는 유저는 거의 없다. 대부분 엔딩 후 ‘처음부터 다시 하기’를 클릭해서 게임을 계속할 뿐이다.
<문명 5>는 엔딩을 보기 위한 게임이 아니다. 단지 엔딩을 위해 무한반복하는 과정을 즐기기 위한 게임이다. 그 과정의 중독성이 대단할 뿐이다. 심지어 엔딩 직후에도 ‘One more turn’ 메뉴가 등장해 계속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도 가능하다.
어떤 엔딩을 보더라고 결국 마지막 세계정복을 마무리할 때까지 진행하고야 만다.
사실 <문명 5>는 게임 도중 윈도우로 튕기는 오류가 잦은 편이다. 다른 게임이라면 아마 엄청난 불만과 악성 댓글이 달렸을 것이다. 그러나 <문명 5>를 즐기는 사람들은 이를 “구원받았다”고 표현한다.
턴 방식 게임의 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문명 5>. 좋은 게임이지만 남에게 추천하기는 망설여진다. 나 자신이 남의 인생을 책임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