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봤더니’는?] ‘해봤더니’는 다양한 게임을 즐긴 다음, 그 느낌을 형식과 분량에 구애받지 않고 ‘가볍게’ 전달하는 게임 소개글입니다.
게임을 철저하게 해 보고 분석하는 정식 리뷰나 체험기와 다르게, 코너명 그대로 “해 본 다음의 느낌”을 솔직·담백하게(주관적으로) 담아내는 글입니다. 독자 여러분들도 가볍게 읽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 요약: /애도 베어 그릴스
■ <맨 vs. 와일드>란?
<맨 vs. 와일드 with 베어 그릴스>는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방영 중인 TV 프로그램 <맨 vs. 와일드>를 원작으로 개발된 게임입니다. 전직 영국 SAS 특수부대요원인 베어 그릴스는 <맨 vs. 와일드>에서 전 세계의 험난한 장소를 찾아다니며 다양한 생존법을 직접 보여 주죠.
생각만 해도 끔찍한 장소에서 상상도 못했던 방법으로 살아남는 베어 그릴스의 생존력은 감탄을 자아냅니다. 그만큼 프로그램의 인기도 높죠. 국내에서는 베어 그릴스의 뛰어난 생존력에 경의를 표하며 ‘생존왕’이라는 별명을 붙여 줬을 정도입니다.
다만 생존(혹은 방송의 재미)를 위해 거미, 애벌레, 생고기 등 자연 그대로의 먹거리를 즐기는(?) 장면들과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으면 안 되는 것을 구분하며 입맛을 다시는 베어 그릴스의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주면서 최근에는 ‘생존’보다는 ‘자연 속 맛집 프로그램’으로 변질된 듯 묘한 인기를 구가하고 있습니다.
■ 그러니까 이게 PS3 게임이라고?
<맨 vs. 와일드>의 첫인상은 ‘아찔’합니다. 첫 화면부터 상당히 ‘엉성한 모습’의 베어 그릴스가 플레이어를 맞이하죠. 과장 하나 안 보태고 이걸 왜 PSP가 아닌 PS3로 만들었는지 의문이 들 정도의 그래픽입니다. 앉았다 일어서는 포즈도 엉성하고 프레임은… 그냥 기대를 맙시다. 다행히 베어 그릴스가 직접 녹음한 음성은 꽤 들을 만합니다.
게임 속에서도 당황스러운 그래픽은 계속 이어집니다. <맨 vs. 와일드>가 그나마 PS3 게임처럼 보이는 건 달릴 때 주변이 일그러지는 블러 효과와 디스커버리 채널의 <맨 vs. 와일드> 방송을 중간 중간 HD 영상으로 보여줄 때, 단 두 경우뿐입니다.
게임 개발을 공부하면서 만들었는지 뒤쪽 스테이지로 갈수록 퀄리티가 눈에 띄게 좋아지는 신기한 상황도 볼 수 있습니다만, 그래도 PS2 수준의 그래픽이 한계입니다. 참고로 <맨 vs. 와일드>는 외국에서 PS3와 Xbox360, Wii로 발매됐는데요, 아무리 봐도 Wii에 맞춰 개발한 게임을 그대로 이식한 걸로밖에 안 보입니다.
군데군데 허점도 너무 많습니다. 이 게임은 엄밀히 말하자면 ‘서바이벌 게임을 가장한 미니 게임 천국’입니다. <맨 vs. 와일드>에서 모든 상황은 미니 게임으로 해결하게 됩니다.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는 통나무를 건너거나 곰을 피하고 잠자리를 마련하는 것까지 모두요.
예를 들어 게임 도중 곰을 만나면 ‘회피 액션’이 시작됩니다. 정해진 버튼을 눌러서 곰의 공격을 피해야 하죠. 반대로 말하자면 미니 게임에 실패하지 않는 한은 몇 번이든 곰의 공격을 피하며 곰을 갖고 놀(?) 수 있습니다.
심지어 곰을 피하던 중에 주변의 뱀과 전투를 시작하면 전투가 끝날 때까지 곰은 기다려주는 매너를 발휘하죠(…). 다른 미니 게임도 마찬가지예요. 덫을 놓을 때도 우리의 곰은 간섭하지 않아요. 반복도 심해서 사막에서는 돌로 지뢰 맞추기만 20번을 넘게 진행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외에도 비행기에서 목표지점으로 낙하하면서 난데없이 묘기를 부리거나, 낙타 내장을 꺼내던 중 키 입력에 실수하면 꺼냈던 내장이 원상 복구되는 등 사실성은 가볍게 쌈을 싸서 먹은 시스템이 곳곳에 널려 있습니다. 미니 게임으로만 모든 걸 풀어내려고 한 한계입니다.
조작 방식도 안 좋습니다. 오른쪽 아날로그 스틱을 빠르게 돌리면서 왼쪽 아날로그 스틱으로 목표물을 조준하고 R2 버튼으로 로프를 던지는 건 기본(…)이고, 자신이 아날로그 스틱이라는 걸 잊고 ‘8방향만 일정한 속도로’ 인식하는 미니 게임도 있습니다.
■ 그런데… 묘하게 매력 있다?
그런데 이 게임, 재미있습니다. 지금까지 실컷 욕만 해놓고 이게 무슨 자다가 봉창을 16비트 자진모리 장단으로 두드리는 소리냐고 하실 수 있겠습니다만, <맨 vs. 와일드>에는 허접함 속의 재미가 숨어 있습니다. 네, 전형적인 B급 수작입니다.
<맨 vs. 와일드>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부분을 엄청나게 구체적으로 만들었습니다. 모래바람이 불면 재빠르게 주변 동물의 사체를 갈라 숨어야 하고 나뭇가지로 함정을 만들 때는 아날로그 스틱을 아주 서서히 기울여야 합니다. 부싯돌로 불을 붙이다 보면 플레이어의 마음 속에도 화(火)가 넘칩니다. 이쯤 가면 어설픈 조작도 오히려 재미를 위해 만든 게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압권은 ‘시간과의 싸움’입니다. 베어 그릴스는 수분과 체력, 스태미너의 세 가지 능력치를 갖고 있습니다. 스태미너가 모두 소진되면 체력이 줄기 시작하고 체력이 바닥나면 베어 그릴스는 조난당합니다. 게임오버죠.
문제는 체력과 수분과 스태미너의 양이 ‘매우’ 적고 실시간으로 줄어든다는 점입니다. 물을 마시고, 뱀과 전투를 벌이고, 사막의 지뢰를 피하는 중에도 능력치는 계속 줄어듭니다. 살고 싶으면 빨리 길을 찾고 다음 동작에 들어가야 하죠.
플레이어가 갈 수 있는 길도 다양하다 보니 어떤 길을 고를지도 큰 영향을 미칩니다. 미니 게임도 조작은 매우 단순하지만 실수가 곧 죽음으로 이어지는 만큼 의외로 긴장감이 넘칩니다. 버튼 하나 잘못 누르면 곧바로 사망으로 이어지는 경우를 꽤 자주 볼 수 있죠.
덕분에 몰입감도 확실합니다. 행동 하나 하나는 어설프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긴장감이 넘치는 구조랄까요? 게임을 약간만 해 봐도 강추위에 체력이 눈에 보일락말락 남았는데 부싯돌에 불이 안 붙어 비명을 지르거나 굶어 죽기 직전에 벌레굴을 발견해서 환호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 원작 구현은 확실. 개그도 확실
(베어 그릴스의 얼굴을 빼면) 원작 구현도 확실합니다. ‘설마 이것까지 구현할 줄 몰랐던 부분’도 많습니다. 이게 또 재미입니다.
우리 ‘베어 형의 식성’은 여전합니다. 게임에서 그의 주식은 벌레입니다. 가끔 생선이나 고기를 먹는 일도 있지만, 매번 그런 걸 먹는 건 사치죠. 심지어 벌레를 잡을 수 있는 구덩이 위에는 친절하게 ‘포크와 스푼’ 아이콘이 표시됩니다. 네. 식당에서 자주 보던 그 표시요.
뱀 가죽은 자신의 소변을 받아 뒀다가 수분을 보충하는 데 쓸 수 있죠(…). 이 게임에서 베어 그릴스가 먹지 못하는 생물은 벌떼와 곰뿐입니다.
별 이상한 장면이 다 나오고 의외의 스릴까지 있다 보니 ‘함께 모여서 보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그래픽이 좋지 않아 주변을 감상할 일이 없다 보니 오히려 더 게임에 몰입하게 되는, 모순된 기분도 느낄 수 있습니다.
디스이즈게임 아지트에서도 휴게실 게임 플레이 사상 최다 관객(?)을 동원했을 정도입니다.
엉성한 설정과 더 엉성한 그래픽, 거기에 은근히 사실적인 시간제한이 어우러지면서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한 편의 개그를 만들어 냅니다. 정말 웃깁니다. 나쁜 뜻이 아니라 진짜로 웃겨요. 친구들과 함께 즐기는 걸 강력히 추천합니다.
여담으로 당연한 말이지만, 이 게임을 해도 생존에는 도움이 전혀 안 됩니다. 차라리 초등학교 앞 서점에 가서 ‘XX에서 살아남기 시리즈’를 읽는 편이 생존에 더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더 이상 말로는 설명이 어려운 이 게임을 위해 플레이 영상을 바칩니다.
※ 플레이 버튼(▶)을 누르면 시작합니다.
■ 한낮이 <맨 vs. 와일드>를 해봤더니…
첫 화면의 베어 그릴스 얼굴을 보자마자 당장 게임을 끄려고 했다. 진심이다. 그런데 엄청날 정도로 엉망인 그래픽을 보다 보니 왠지 모를 B급 수작의 ‘스멜’이 느껴졌다.
예감은 적중했고, 플레이 한 시간 만에 휴게실에 20명이 넘는 인원이 몰려 베어 그릴스의 행동 하나 하나에 탄성을 지르는 진풍경이 이어졌다.
심지어 타이틀을 빌려가겠다는 사람도 3명이나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