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은 한 가지의 목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더 많은 먹이’와 ‘더 좋은 서식환경’을 얻어 다른 생물보다 ‘더 많은 자손을 퍼뜨리는 것’, 바로 경쟁입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수단이 바뀌었을 뿐 생존과 번식에 남들보다 유리한 고지에 올라서려는 의지는 동물과 같습니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끝 없는 아귀다툼을 벌이는 도중에 인간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왜 사니?’ 40대가 되어 다시 사춘기를 맞는 가장들처럼,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인간의 삶은 표류하기 시작합니다. 단순히 먹고, 싸고, 자는 일 외에도 의미 있는 일이 있지 않을까?
우리 선조들은 삶의 의미를 찾는 과정에서 풍류라는 개념을 만들어냈습니다. 빡빡한 생활 속에서도 마음의 여유를 잃지 않고 즐겁게 살아가기 위해 경치 좋은 곳을 유람하고 가무를 즐기는 것을 통해 삶의 멋을 즐겨온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황혼에 들어 볼륨댄스를 배우는 사람들을 연상케 합니다. 영화 <쉘 위 댄스>의 중년 남자 주인공도 삶의 의미를 찾는 과정에서 비슷한 길을 택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이 같은 일들이 결코 속되지는 않았습니다. 나름의 고상한 멋이 있어 그것을 바라봄에도 거부감이 없습니다. 물론 처음 본 누군가를 옆에 끼고 희희낙락하며 ‘부비부비’ 음주가무를 즐기는 것은 풍류가 아니라 풍속이라고 해야겠지요.
█ 게임에도 풍류가 있을까?
그렇다면 우리가 온라인 게임을 즐기는 것도 ‘풍류’라고 해야 할까요? 참 난해한 질문입니다. 온라인 게임을 통해 현실에서는 만나보지 못할 수백, 수천, 혹은 수만 명의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 그것도 나름의 의미 있는 일입니다. 게임에서의 풍류가 있다면 그 과정에서 삶의 의미를 반추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 풍류를 게임으로 만들어보겠다고 도전한 게임이 있습니다. 얼마 전 두 번째 클로즈 베타테스트를 마친 <풍류공작소>라는 게임인데요, <풍류공작소>라는 이름부터 궁금증을 불러일으킵니다. 게임 속에서 어떻게 풍류를 즐길 수 있지? 높은 산에 올라가서 춤이라도 출 수 있을까?
<풍류공작소>, 과연 어떤 게임일까요?
대부분의 게임들이 현실에서의 경쟁을 그대로 도입합니다. 특히 많은 게임들이 PvP(Player vs Player)를 목적으로 제시하며 게이머들을 경쟁을 유도합니다. PvP는 매우 인기가 높아서 오래된 게임의 추억을 이야기할 때 ‘내가 PvP 할 때는~’이라는 구절로 과거를 회상하게끔 만들 정도입니다.
예를 들어 <울티마 온라인>을 즐긴 많은 게이머들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도 당시 PvP를 잘했던 사람들의 아이디를 떠올립니다. 누가 커다란 집과 으리으리한 가구들을 얼마나 많이 갖고 있었는지는 별로 기억에 남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활형 MMORPG를 표방하는 <풍류공작소>에서 우리 선조들이 그랬던 것처럼 ‘생활 속에서 운치 있고 의미 있는 무엇인가를 발견할 수 있을까?’라는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많은 게임들이 그랬던 것처럼 게임의 모든 즐길 거리들의 뒤에는 ‘빡빡한 경쟁’이라는 것이 도사리고 있지 않을까 염려되기도 했습니다.
█ 쏠쏠한 재미
게임을 즐기는 동안 어디선가 본 듯한 요소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어드벤처 게임 <인디고 프로페시>나 리듬액션 게임 <BM 98> 등에서 손가락을 바쁘게 움직였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더군요. 이 게임 속에는 이른바 ‘약점공격’이라는 것이 있는데 채집이나 사냥 모두에서 사용됩니다.
덕분에 사냥에서는 꽤 높은 순발력과 눈썰미를 요구했습니다. 예를 들어 몹이 공격을 하기 위해 상체를 숙인다면 옆으로 살짝 몸을 굴려 피한 뒤에 약점을 잡아 반격하는 방식입니다.
약점잡기, 힘들지만 재미있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약점공격을 반복하면 사용한 스킬에 따라 더 좋은 아이템을 준다든가 하는 보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몹의 정보가 적혀있는 ‘도감’을 펼쳐놓고 ‘아 이 놈이 뒤돌아 서 있구나’하고 피했는데 엉뚱한 키를 눌러 한대 더 맞는 불상사가 자주 생기더군요. 연습이 좀 필요한 모양이었습니다.
광물을 캘 때에도 약점잡기를 사용하는데, 이건 좀 느긋합니다.
하지만 채집은 꽤 재미있었습니다. 그다지 순발력을 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스킬을 하나 선택해서 눌러주고 화면에 뜨는 버튼들을 따라서 시간 안에 스킬들을 입력하면 되었으니까요. 느긋하게 레벨도 올릴 수 있으니 쏠쏠한 재미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사냥이나 채집을 통해서 얻은 아이템은 생산을 통해 소비되는데 <풍류공작소>에서 생산은 꽤 높은 비중을 차지합니다. 거의 대부분의 아이템을 게이머들이 직접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원료를 채집하고, 이를 누군가가 사들여 아이템을 만든 후 파는 행위를 통해서 마치 현실 속 경제활동처럼 게이머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되었습니다.
이렇듯 <풍류공작소>는 거창하지는 않지만 쏠쏠한 재미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무엇인가 부족하다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풍류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 풍류를 찾아서
위에서 말한 쏠쏠한 재미가 ‘풍류’일까요? 아니,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무엇인가 특별한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여행을 떠났습니다. 풍류를 찾아서.
야자나무 열매 속에 풍류가 있을까요?
하지만 무엇이 풍류일까요? 게임에서 어떻게 풍류라는 것을 표현할 수 있을까요? 속되지 않고 운치 있는 일이 풍류라면 몹을 칼로 토막 내고, 드릴을 들고 ‘드드드드’ 땅을 파거나, 도끼를 들고 가지치기 하는 일은 결코 풍류라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닭들은 풍류를 좀 아는 멋스러운 닭일까요?
흠흠. 이것도 풍류라고 할 수…… 흠흠.
깊은 바다 속에도, 마을에도, 강가에도, 해변에도, 들판에도 제가 찾는 풍류는 없더군요. 그렇게 돌아다니던 중 저는 중요한 사실을 떠올렸습니다. 바로 두 개의 나라가 <풍류공작소>의 세계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사란과 브레헨은 서로 영토를 놓고 분쟁을 벌이며 그 와중에 누군가는 죽고 다칠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풍류공작소>는 다른 게임과 무엇이 다를까요? 그리고 제가 찾는 풍류는 도대체 어디에 있길래 꼭꼭 숨어서 꾀꼬리 소리가 들릴 때까지 기다리는 것일까요?
채집과 생산, 사냥, 그리고 두 세력간의 집단 PvP.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입니다. 요즘 나오는 게임들과 과연 어떤 점에서 차별성을 띌 수 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세세하고 쏠쏠한 재미는 있을지언정, 게임을 관통하는 거창한 무엇은 없었습니다.
█ 풍류의 공작
자, 이 게임의 이름을 다른 것으로 붙여보죠. 한때 유행했던 한 글자로 이름 만들기를 따라 <풍 온라인>으로 해봅시다. 어라, 풍류라는 녀석이 확 달아나버렸습니다.
‘젠장, 아이템 진짜 안주네.’ ‘약점잡기는 왜 이렇게 힘든 거야?!’ ‘님아 저쪽으로 가셈~’ ‘여기 제 자리임.’ ‘이거 얼마에요?’ ‘제시.’ ‘아니 파는 사람이 가격도 안 가르쳐 주는 게 어디 있어요?’ ‘즐.’
더 좋은 아이템을 얻기 위해 악다구니를 하는 것이 풍류일까요?
게임은 저마다의 악다구니로 넘쳐날 것입니다. 누군가는 전체 채팅창에 ‘아이씨~ 게임 X같네! ㅋㅋㅋ’ 란 메시지를 남기고 누군가는 ‘사기친 놈 제보 받아요’를 떠들어 대고 또 다른 누군가는 이 게임에서 풍류 찾는 일을 포기할 것입니다.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풍류라는 것은 과연 공작할 수 있는 것일까요? 저는 그 질문에 ‘그럴 수 없다’라고 답하겠습니다.
롤플레잉 서버라는 것이 있습니다. MMORPG에 대한 낭만주의적 관점에서 그 서버에 접속한 게이머는 가장 풍류에 근접한 플레이를 즐긴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상에서 벗어나 자신이 가진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풍류공작소>도 마찬가지로 역할놀이를 지향합니다.
그렇다면 <풍류공작소>가 가진 세세한 시스템들이 과연 풍류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요? 네,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이 맞습니다. 풍류는 공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게이머들 스스로가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을 뿐입니다.
만약, 환경파괴로 재앙을 만난 지구의 완전히 달라진 모습을 살펴보려 사란과 브레헨을 헤메고 다닌다면 그 게이머는 풍류를 즐기는 것입니다. 사란과 브레헨이 만나 서로 과거는 잊고 살아남은 인류끼리 친하게 지내자고 하는 것도 나름대로 풍류를 즐기는 방식입니다. 중요한 것은 게이머가 게임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떠한 방식으로 플레이 하는가, 바로 그것 아닐까요?
이렇게 새로 시작된 문명의 모습을 살펴보는 것도 풍류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만약 <풍류공작소>의 게이머들이 풍류를 느낄 수 있게 하려면 그들에게 적절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에게 대격변의 세계관을 지속적으로 상기시킬 요소를 게임에 계속해서 주입하거나, 그들 스스로 모험을 떠날 무언가를 자극하는 방식도 괜찮습니다.
게이머들이 다른 게임에서의 플레이 방식을 탈피하여 그들 스스로 의미 있는 무엇인가를 즐겨보려고 하는 능동적인 태도. 그것을 유도해야 <풍류공작소>에 풍류가 나타날 것입니다.
█ 기대반 우려반, 하지만 이제 시작일뿐
역할놀이에 대한 이해가 척박한 한국에서 <풍류공작소>는 게이머들의 능동적인 참여를 얼마나 유도해낼 수 있을까요? 다른 게임에서처럼 아이템에 죽고 살고, 레벨 업에 목메며 악다구니에 익숙한 게이머들이 과연 풍류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까요?
누구도 대답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아직 게임은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역할놀이를 유도할 방대한 세계관도, 탐험할 만한 처녀지도 많지 않습니다. 게임에 접속해서 할 일은 다른 게임들처럼 몹 잡고, 아이템 먹고, 레벨 업하고 간간이 물건 만들어 파는 일이 전부입니다.
<풍류공작소>의 개발팀에게 위에서 말한 일들을 해낼 역량이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은 말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모습으로는 다른 게임들과 차별성을 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빡빡한 개발일정과 게이머들의 가공할만한 컨텐츠 소비속도에 쫓기다 보면 결국 배는 산으로 가는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하지만 이제 겨우 2차 클로즈 베타를 마쳤을 뿐이니 잠시 지켜보는 일도 괜찮겠군요. 그들이 최초 기획에서처럼 우리에게 풍류를 느낄 수 있도록 게임을 만들어나갈 수 있는 지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입니다. 일단은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이들에게는 박수와 격려가 아깝지 않을 것입니다. 잘 만들어 나가기를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