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트/그랜드 오더>의 한국 흥행은 TIG 기자들에게 미스테리였습니다. 게임 특성 상 마니아층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게임이 구글 매출 TOP 10 안에서 놀 줄은 몰랐거든요. 기자들은 매일 하는 일이 게임을 해보고 이 시스템이 어떤지 생각하는 것이 일이라 더더욱 놀랐죠. 기자들이 보기에 <페이트/그랜드 오더>의 시스템은 매출을 논하기 이전에, 게임 자체가 너무나 예스러웠거든요.
게임의 흥행 원인이 궁금했던 기자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평소 서브컬쳐 쪽에 관심 많은 기자부터 십수 년 간 게임만 분석한 기자, 서브컬쳐 쪽엔 별로 관심 없이 <페이트/그랜드 오더>란 게임에 관심 있는 기자까지.
기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얻은 결론은 다소 묘한 답이었습니다. <페이트/그랜드 오더>의 흥행을 설명하려면 게임 시스템이라는 '나무'가 아니라, 그 밖에 있는 IP, 미디어믹스 전략이라는 '숲'을 봐야 한다는 답이었죠. 기자들이 나눈 <페이트/그랜드 오더>의 흥행 요인과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정리했습니다.
<페이트/그랜드 오더>의 매출 순위 변화 (출처: 앱애니)
다미롱: 다들 모인 게 이것 때문이었죠. 왜 사람들은 이런(?) 게임에 돈을 쓸까. 사실 순수하게 시스템만 봤을 땐 돈을 별로 쓰고 싶지 않은 게임이잖아요.
전투는 요즘 모바일 RPG에 비해 단조롭고, 게임 구성도 캐릭터 하나의 강함보단 클래스 간 상성이 더 크게 영향 받는 스타일이고요. 더군다나 캐릭터마다 '비용'이 있어, 처음에 좋은 캐릭터를 여럿 얻었어도 이들을 제대로 쓰려면 계정 레벨을 상당히 올려야 하고요. 좋은 캐릭터를 뽑아도 그 캐릭터로 '캐리'하기도 힘들고 그 캐릭터들을 다 쓰기도 힘든 게임, 좋은 캐릭터가 없어도 1~3성 캐릭터만으로 스토리 깰 수 있는 게임이죠.
그런데 게임은 출시 초기, 구글 매출 순위 3위까지 올라갔고 지금도 TOP 10 안에 있죠. 시스템만 보면 이해하기 힘들죠.
홀리스: 일본 게임을 시스템 변경 없이 그대로 가져왔으니까. 그쪽은 이런 방식이 더 자연스러운 동네인데다, <페이트/그랜드오더>는 그 어느 나라에서도 번역과 이벤트 스케줄 조정 이상의 현지화를 허가한 적 없거든.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그쪽 사정이지만. 확실히 요즘 한국 유저들이 느끼기엔 너무 옛날 방식이지.
세이야: 한국은 수집형 RPG가 아니라 모바일 RPG가 주류라, 게임의 UI와 UX가 유저들이 스트레스 덜 받는 방향으로 바뀌어서 더 그렇게 느끼는 것이 아닐까요? 사실 <페이트/그랜드 오더>가 <리니지2: 레볼루션> 같은 게임 유저들을 노린 작품은 아니잖아요.
실제로 제 주변에 타입문 작품 좋아하고 <페이트/그랜드 오더>를 재미있게 하는 친구 있는데, 이 게임하며 뽑기 하고 싶은 욕망을 정말 힘들게 참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팬 입장에선 스토리도, 게임도 재미있다고 하고요. 애초에 목표 자체가 일반적인 모바일 RPG 유저들은 아닌 것 같아요.
# RPG가 아니라 비주얼 노벨? 페그오는 왜 이렇게 만들어졌을까?
다미롱: <페이트/그랜드 오더>를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평이 갈릴 것 같아요. 평범한 수집형 모바일 RPG로 볼 땐 부족한 점이 확실히 많죠. 그런데 저는 이 게임 하며 수집형 모바일 RPG 보단, 비주얼 노벨의 느낌을 더 강하게 받았거든요. 시리즈 특성 상, 게임 구조 상 이쪽 관점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요?
테이: 나도 처음엔 게임하며 불만이 많았는데, 성적 보고 생각을 뒤집어 봤어. 이미 하는 사람이, 돈 쓰는 사람도 충분히 있으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단점이라고 한 것을 장점으로 바꾸는, 혹은 그것이 단점으로 느껴지지 않도록 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얘기거든.
예를 들어 코스트 제한. 이걸 뒤집어 생각하면 유저가 캐릭터 하나에 집중할 수 있게 만들어. 당장 전투에 내보낼 수 있는 캐릭터가 적으니까. 또 <페이트/그랜드 오더>를 해 본 사람이면 알겠지만, 이 게임은 구조 상 캐릭터 하나를 집중적으로 키우는 것이 유리하거든. 경험치나 영기 재림(≒ 최고 레벨 상승) 재료 얻기도 편하고, 또 초반엔 상성이 크게 체감되지 않으니 캐릭터 하나 빨리 성장시켜 레벨로 깔아 뭉갤 수도 있고.
더군다나 처음에 주는 동료 캐릭터도 마침 0코스트네? 그 캐릭터는 성능이 기본은 하는데다 상성에서도 자유롭고. 이러면 처음에 부담 없이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 하나에 집중할 수 있지. 파티는 0코스트 동료 캐릭터와 친구 캐릭터로 최소 전투원은 챙길 수 있고. 이렇게 게임 하다가 캐릭터 하나 육성이 어느 정도 끝나면 계정 레벨이 올라 다른 캐릭터에 눈 돌릴 수 있고.
다미롱: 일본 게임이니까 가능한 접근법 같아요. 그쪽은 애초에 수집형 게임을 주로 만든데다가, 게임 구조도 마치 '리세마라'를 염두에 두는 것처럼 만들잖아요. <페이트/그랜드 오더>는 여기에 10년 넘게 유지된 <페이트> IP를 더했고. 자연히 유저들은 좋아하는 캐릭터를 얻기 위해 리세마라를 할 것이고, 그 이후엔 이렇게 얻은 캐릭터를 먼저 강하게 하는데 집중하겠죠.
실제로 <페이트/그랜드 오더> 초반 뽑기 구조를 보면, 유저들에게 많이 알려진 알트리아, 에미야, 헤라클레스스, 잔 다르크 등이 배정돼 있고요.
<페이트/그랜드 오더> 홍보 이미지. 알트리아, 에미야 등 시리즈 인기 캐릭터들을 확인할 수 있다.
세이야: 또 저는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게 캐릭터 연출이었어요. 모션도 좋고, 화풍도 애니메이션 느낌을 잘 살렸더라고요. 이거 카툰 랜더링일까요?
홀리스: 2D 애니메이션 같아요. 근데 모션 공들은 건 일부만 인정. 마르타나 카밀라 같은 인지도 낮은 친구들은 모션이 똑같더라고. (웃음) 그래도 알트리아 같이 인기 많은 캐릭터들은 확실히 괜찮더군요. 일부 캐릭터들은 일본서 개선된 모션을 가져 오기도 했고. 인기 캐릭터들은 확실히 볼 맛 나게 만들었더라고요.
생각해보면 시리즈 첫 작품인 <페이트/스테이 나이트>도 비주얼 노벨치곤 '보는 맛'이 있는 게임이었죠. '비주얼 노벨'이란 표현도 이해는 되네요. 모바일 RPG치론 스토리 분량이 이례적일 정도로 많고, 인기 캐릭터들의 보는 맛도 살렸으니까. 이런 것 보면 장르만 모바일 RPG지, 구조는 <페이트/스테이 나이트>와 흡사하잖아요.
다미롱: 사실 팬 입장에서 <페이트/그랜드 오더>는 굉장히 매력적인 작품이에요. 일단 그간 다양한 작품에서 나온 서번트들이 총출동한다는 콘셉트도 매력적이죠. 여기에 기존 작품들은 주인공들의 사상이 굉장히 특이해 '내 이야기'라는 느낌보단 '시로의 이야기'처럼 남의 것이란 느낌이 강했는데, <페이트/그랜드 오더>는 주인공의 색을 거의 죽인 대신, 유저가 선택지 등으로 이 색을 직접 칠할 수 있게 했거든요.
테이: 아니, 거기서 무슨 주인공 성격이 드러나. 다 똑같은 말인데. (웃음)
다미롱: 아니죠. 물론 어떤 선택지를 골라도 결과가 다 똑같지만, 선택지 자체가 주는 느낌이 다르잖아요. 예를 들어 전투에 나서는 동료에게 '다 쓸어버려'라고 얘기하는 것과 '방심하지 마'라고 얘기하는 것은 다르잖아요. '나라면 이렇게 말했을 거야, 나라면 이걸 더 중요시 했을 거야'를 나름대로 선택할 수 있게 한거죠. 그런 식으로 유저가 캐릭터들과 함께 한다는 '느낌'을 주는 거고. 물론 게임 내 모든 선택지가 이렇진 않지만.
세이야: 너무 이입하신 것 같은데. (웃음) 일정 부분은 이해해요. 선택지로 변하는 것은 없지만, 그걸로 유저가 자신의 성향과 스타일을 표할 순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건 정말 팬심 가진 사람들에게만 어필할 수 있는 아주 미묘한 영역이 아닐까요?
다미롱: <페이트/그랜드 오더>는 애초에 타입문, <페이트> 시리즈 팬들을 위한 게임이니까요. 당장 초반 스토리만 하더라도 서장은 <페이트/스테이 나이트> 배경이고 1장은 <페이트/아포크리파> 인물들 나오고 2장에선 <페이트/엑스트라>의 주역 캐릭터가 핵심이잖아요. 이 이야기 구조부터 팬들이 시리즈 주역 캐릭터들을 만나 함께 뭔가를 하는 구조잖아요. 애초에 게임 진행 자체가 팬들에게 어필하기 위해 만들어졌죠.
테이: 그렇지. 그런데 나는 이걸 인정하면서도 긍정적으로 평가하긴 힘들더군. 게임 자체가 좋아서가 아니라, IP 파워로 뜬 거니까. 이건 어지간한 IP로는 흉내낼 수도 없는 영역이지. <페이트>니까 가능한 매우 희귀한 경우란 말이야. 일반적인 게임 분석으론 뜬 이유를 설명할 수도 없는.
비판적인 관점에서 보면 수익을 내기 위해 <페이트>나 <원피스> 수준의 IP에 게임이라는 틀만 씌운 거지. 게임 기자 입장에서 보면 게임이 얄팍하고 정성도 부족해 보여. 게임의 형태를 띄고 있긴 하지만, 게임으로서의 고민보단 IP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활용해 수익을 얻을까란 고민만 더 보이니까. 솔직히 기분이 좋진 않아.
다미롱: 시스템에 대해선 동의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렇다고 이 게임의 모든 면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실제로 시스템과 별개로, 스토리 같은 것은 호평이 대부분이고요.
저는 <페이트> 시리즈 중 <페이트/스테이 나이트>하고 <페이트/제로>만 본 케이스에요. 그런데 이 게임은 이야기로 제가 보지 않은 시리즈의 캐릭터들을 굉장히 매력적으로 연출하거든요. '얘가 이런 캐릭터구나. 빨리 스토리 깨고 (뽑기로) 얻어야지'라는 생각이 들게요. 물론 게임성에서 스토리가 차지하는 부분은 어느 정도인가, 비주얼 노벨이나 키네틱 노벨을 게임으로 볼 수 있느냐 등은 여러 의견이 있겠지만요.
# 수집형 RPG에 특화된 IP, 그리고 수집형 RPG가 만나서 만든 폭발력
테이: 그런데 이걸 조금 나쁜 시선으로 보면, 얘들은 <페이트/그랜드 오더>라는 게임이 아니었어도 어차피 그 스토리를 가지고 다른 콘텐츠를 만들었을 거란 얘기지. 나는 스토리가 게임성에 기여하는 것을 부정하지 않아.
하지만 나는 이들이 이 캐릭터와 스토리를 이 게임만을 위해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아. 이 시리즈는 대대로 원 소스 멀티 유즈에 적극적이었어. 이는 곧 스토리와 캐릭터는 게임 성적이 좋지 않아도 언젠가 재활용이 가능하다는 얘기고. 스토리를 가지고 게임을 평가하기엔, 이 스토리가 게임 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꺼려진다는 얘기지.
애초에 <페이트/그랜드 오더> 자체가 이것에 최적화 된 설정을 보여주잖아. 개발자가 마음껏 원하는 시대와 원하는 캐릭터를 끌어다 쓸 수 있는 세계. 그러면서도 기존의 이야기와 설정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 평행세계. 필요한 건 마음대로 쓰고 시도할 수 있고 리스크는 없는 구조지. 이 모델 자체가 캐릭터와 이야기만 잘 뽑으면, 게임이 별로여도 다른 콘텐츠로 써먹을 수 있는 구조야. 반대로 게임이 실패해도 기존 IP에는 영향 없고.
다미롱: 너무 결과론적인 이야기 아닐까요? 게임이 실패하면 다른 콘텐츠도 없는 거잖아요. 물론 <페이트> 시리즈는 특성 상 이 부분에서 비교적 자유롭긴 하지만.
테이: 극단적으로 말해 <페이트/그랜드 오더>가 못 떠도 상관 없어. 물론 손해는 보겠지. 하지만 캐릭터·이야기의 매력은 그대로야. 게임이 실패하더라도 이야기와 캐릭터는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는 작품이지. 여기에 추가로 <페이트/그랜드 오더>는 설정 상 이런 이야기와 캐릭터를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 작품이지. 즉, 제작사 입장에선 <페이트/그랜드 오더> 하나로 수많은 애니메이션과 소설, 만화를 만들 수 있는 구조야.
내가 봤을 때 <페이트/그랜드 오더>는 자신들의 IP 파워를 잘 아는 이들이 만든 '상품'이야. 애니메이션 같은 것 만들어봐야 돈을 얼마나 벌 수 있겠어? 하지만 수집형 RPG는 다르지. 이런 게임이 만들어지면 팬들에게서 수익을 더 직접적으로 끌어들일 수 있잖아. 실패해도 애니메이션 등으로 다른 활용처를 만들 수 있고.
<페이트>는 게임 외에도 만화,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플랫폼으로 콘텐츠를 만들었다. 이미지는 <페이트/제로> 애니메이션 중 한 장면.
다미롱: 그걸 타이틀에 대한 고민이 적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런 의도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이 게임성으로 그만한 수익을 거뒀잖아요. 이걸 마냥 IP 파워로 치부하기엔, <페이트> 이상의 인지도를 가진 <원피스> <나루토> <블리츠> IP 활용한 게임 중 이런 성과를 거둔 작품이 없고요. 이건 그만큼 얘들이 IP와 게임을 잘 매치시켰단 얘기죠. 그렇다면 이렇게 IP 효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는 게임을 만든 것은 조명해야 하지 않을까요?
세이야: 저는 <페이트>라는 시리즈가 '원나블'로 대표되는 소년만화 IP와 성격이 다르다고 생각해요. 모바일 시장에서 돈을 가장 벌기 쉬운 모델이 '뽑기'인데, 제가 보기에 <페이트>란 IP는 여기에 최적화 돼 있거든요.
인지도 자체는 '원나블'이 더 높을 거에요. 하지만 이 작품들은 주역 캐릭터와 조연이 명확해요. 캐릭터의 비중 대부분이 주인공 파티에 몰려 있는 피라미드 구조죠. <나루토>는 나루토와 친구들의 이야기고, <원피스>는 루피와 친구들의 이야기죠.
하지만 <페이트> 시리즈는 캐릭터 하나하나의 무게감이 훨씬 더 커요. 시리즈 자체가 '배틀로얄'을 콘셉트로 했기 때문인지, 주인공 캐릭터 외에도 다른 적들에게도 그에 걸맞은 강함과 사연을 주니까요. 이야기 전개도 일종에 '군상극' 느낌이고. 이렇게 캐릭터 하나하나가 주인공에 준하는 비중을 가지고 있죠. 노골적으로 말하면 팔아먹기 좋은 캐릭터가 엄청 많다고 봐요. 다른 IP는 이게 주역 캐릭터들로 한정되는데 반해.
테이: 게임에 따라선 IP가 오히려 방해될 수도 있어. 게임 속 성능이나 비중은 캐릭터의 인기를 따라갈 수 밖에 없거든. 그럼 새 캐릭터를 만들어도 주역 캐릭터들보다 더 매력적이고 좋은 캐릭터를 만들기 힘들겠지.
하지만 <페이트> 시리즈는 다르지. 원작 자체가 애초에 주역 캐릭터에 필적하는 상대가 나와야 재미있는 구조니까. 이게 뽑기 위주의 요즘 모바일게임과 만나면 시너지가 어머어마할 수 밖에 없어. 더군다나 <페이트/그랜드 오더>는 유료 모델로 '한정 뽑기'가 있잖아. 이렇게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많은 작품에서 '한정 뽑기'가 가진 파괴력은 더 말할 필요가 없겠지.
또 이 시리즈가 영리한 게 '인물'은 하나여도 '클래스'는 여럿 가질 수 있다는 설정이야. 영령이란 해당 인물의 한 측면을 빌려 특정 역할에 맞게 구현한 존재니까. 예를 들어 초창기 캐릭터인 '쿠훌린'만 하더라도 처음엔 랜서 클래스로 나왔지만, 설정 상 캐스터도 될 수 있고 라이더, 버서커도 될 수 있지. 극단적으로 말하면 매력적인 캐릭터 하나만 만들면, 스토리 상 그 베리에이션을 6~7개 더 만드는 것도 가능하단 얘기지.
홀리스: 수집형 RPG로 쓰기엔 굉장히 매력적인 시리즈죠. 더군다나 <페이트/그랜드 오더>같은 클래스도 많고 클래스 간 상성도 명확한 게임은 더더욱요. 더군다나 <페이트/그랜드 오더>는 스토리 비중이 큰 게임이라 스토리로 (원작에 없는) 인기 캐릭터의 또 다른 측면을 만들기도 쉽고요. 만약 실패해도 '평행 세계'라 기존 작품에 영향은 안 주고.
다미롱: 얘기가 길어졌는데, 잠깐 정리 좀 해볼까요. 결국 <페이트/그랜드 오더>의 흥행은 게임성 자체보단, 시리즈가 가진 네러티브와 설정, 캐릭터성이 '수집형 RPG'라는 틀이 최적화 됐다는 얘기네요. 또한 시리즈 특성 상, 혹은 게임 구조 상 사람들이 캐릭터의 성능이나 매력에 반해 지갑을 여는 것도 자연스럽고.
세이야: 결국 <페이트> 시리즈의 수평적인 세계관이 모바일의 뽑기와 만났을 때 천문학적인 시너지를 만들 수 있단 얘기네요. 처음엔 어떻게 팬심만으로 이런 성적이 나오나 궁금했는데, 얘기를 정리하니 IP 자체가 수집형 모바일 RPG와 정말 잘 맞네요. 여기에 추가 세계관도 잘 만들었고, 스토리나 클래스 상성, 한정판 등 이를 수익화할 구조도 잘 만들었고.
# 그랜드 오더, '페이트 미디어믹스' 콘텐츠 잇는 가교 될까?
테이: 대단한 건 이 구조가 게임 초반부터 확실히 잡혀 있다는 점이지. 초반부터 이렇게 단단하게 구조를 만들어 놨으니 일본에선 2년 넘게 흥행하고 있는 것이고.
물론 지금 구조로도 한계는 있어. 극단적인 예로, 기존의 모든 인기 캐릭터들이 모든 클래스로 나오면 이 게임은 어떻게 될까?
다미롱: 한국 버전에선 많이 먼 이야기겠지만, 일본 버전의 경우 기존 캐릭터를 소비하기보단 독자적인 캐릭터를 만들기 시작했어요. 그냥 '짠'하고 낸 것이 아니라, 긴 시간 동안 새로운 이야기에 긴밀하게 연결시켜서. 정말 중요한 캐릭터는 스토리가 최절정에 다다랐을 때 정체가 밝혀지며 본격적인 이야기가 진행되는 식으로요.
<페이트/그랜드 오더>가 초반에는 기존에 만들어 놓은 네러티브를 소비했다면, 중반 이후부터는 독자적인 네러티브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죠.
테이: 난 그 부분이 참 무섭더라고. 애니메이션 같은 다른 미디어론 새로운 것을 시도하기 힘들어. 돈도 많이 들고 실패했을 때의 여파도 크니까.
하지만 <페이트/그랜드 오더> 안에서 새로운 이야기나 캐릭터를 시도한다면 어떨까? 애초에 세계관 자체가 새로운 캐릭터나 이야기를 시도하기 쉬운 구조니까. 이렇게 새 이야기와 영웅을 계속 인기 테스트하고 성공하면 다른 미디어로 확장할 수 있지. 설사 실패해도 애니메이션과 같은 다른 미디어로 시도한 것 보단 리스크가 적고.
다미롱: 실제로 <페이트> 시리즈는 계속 그렇게 몸집을 불려 왔죠. 처음에 <페이트/엑스트라>에서 네로가 알트리어와 똑같은 얼굴로 나왔을 때 부정적인 의견도 많았죠. 하지만 이 캐릭터는 게임에서 자기 매력을 어필했고, 이후 다른 게임이나 미디어에도 등장하며 팬층을 늘려 왔고요.
<페이트/그랜드 오더>로 오며 바뀐 건, 기존에는 독자적인 작품으로 다소 리스크 있는 테스트를 했다면 이번엔 <페이트/그랜드 오더>라는 틀 안에서 리스크 적게 새로운 것을 테스트 할 수 있다는 점이죠.
테이: <페이트/그랜드 오더>는 작품과 작품 사이를 잇는 다리, 혹은 완충제가 될 수 있다는 의미지. 그 존재 자체가 수많은 캐릭터와 시나리오를 테스트할 수 있는 무대니까. 심지어 수익도 얻으면서. 물론 이들이 <페이트/그랜드 오더>를 만들며 처음부터 이런 모델을 염두에 뒀을진 모르겠지만.
결국 <페이트/그랜드 오더>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인게임 시스템이 아니라, IP와 게임의 결합, 그리고 이 뒤에 이어질 미디어믹스 전략이겠지. 게임에 집중해야 한다면 시스템이 아니라, IP와 모바일 RPG의 궁합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가, IP의 확장을 위해 어떤 장치를 만들었느냐고.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높이 사는 부분은 뒤쪽이야. 일본에서 애니메이션 산업의 위상과 규모는 한국의 영화와 비슷해. 그리고 그만큼 리스크도 크지. 하지만 <페이트/그랜드 오더>가 등장함으로서 이 리스크를 줄일 수 있는 시험대가 만들어졌단 말이지. 이건 게임의 흥행/실패를 별개로 취급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시스템이야.
참, 그러고 보니 <페이트> 시리즈 안에 작품이 몇 개나 있지? 전부 같은 세계관인가?
다미롱: 스테이 나이트, 제로, 엑스트라, 엑스텔라, 아포크리파, 프로토 타입, 스트레인지 페이크 등등 굉장히 많아요. 스테이 나이트만 해도 게임, TV 애니메이션, 극장판, 만화책 등 다양한 장르와 플랫폼으로 콘텐츠가 만들어졌고요. 배경도 작품마다 조금씩, 때로는 굉장히 많이 다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이게 '시리즈'라는 틀로 묶이는 것은 애초에 초기 설정부터가 평행세계를 인정하고, 주요 캐릭터인 '영령'들이 어디서 소환돼도 크게 이상하지 않아 그렇겠죠.
테이: 초창기 일본 애니메이션 시장은 영화와 흡사했거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미디어믹스를 적극적으로 감안하며 세계를 만들기 시작했지. 그런 확장성을 전제로 하고 말이야. 그런 측면에서 <페이트> 시리즈는 시작은 비주얼 노벨일지라도, 시리즈의 흐름이나 구조는 현재 일본 애니메이션 시스템의 총화가 아닐까 하네.
수많은 <페이트> 시리즈 애니메이션들. 게임, 만화, 소설 등 다른 콘텐츠를 합하면 이 수는 더욱 많아진다.
# 비주얼 노벨형(?) RPG는 한국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다미롱: 그런데 지금 <페이트/그랜드 오더>의 모델이 얼마나 오래 흥행할 수, 그리고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테이: 주어진 콘텐츠도 적고, 앞으로 주어질 콘텐츠는 불안하지. 지금 <페이트/그랜드 오더>는 기존 작품들의 힘에 크게 기댄 작품이야. 그런데 언젠가 유저가 자기가 좋아하는 캐릭터들을 다 가지고 키우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이 단계에서 게임이 롱런을 하려면 자기가 애착 가진 캐릭터들로 다른 재미를 줄 수 있어야 해.
하지만 <페이트/그랜드 오더>는 전투 구조가 너무 단순해 내가 캐릭터를 고생해서 키워도 이걸 전략적으로 활용할 여지가 적지. 유저들이 이걸 깨닫게 되는 순간이 위기일거야.
다미롱: 전투가 단순하다는 것은 다른 측면에서 보면 강점이 아닐까요? <페이트/그랜드 오더>는 전투가 아니라 캐릭터, 스토리가 강점인 작품이죠. 이 말은 곧, 스토리만 준비되면 스토리의 무대인 스테이지는 (다른 게임에 비해 상대적으로) 만들기 쉽단 얘기잖아요. 콘텐츠 수급에 있어 다른 모바일 RPG에 비해 품이 적게 들죠.
2번째로 <페이트/그랜드 오더>는 전투가 단순해 캐릭터 하나하나의 능력보단 캐릭터의 클래스, 정확히 말하면 클래스 간의 상성이 더 중요한 방식이죠. 실제로 일본 버전에선 1~3성 캐릭터로도 지금까지 나온 모든 콘텐츠를 클리어할 수 있고요. 이 말은 곧,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의 성능이 나빠도, 혹은 메타에 뒤쳐져도 얼마든지 활약할 여지가 있다는 얘기죠.
테이: 그래도 캐릭터에 대한 애정은 언젠가 떨어지기 마련이야. 유저는 언제나 자신이 좋아하는 캐릭터의 가치가 유지되길, 변하는 환경에서도 여전하길 바라지. 하지만 게임은 그럴 수가 없거든. 물론 계속 개편할 순 있지만, 그럼 개발사 입장에서 수익이 아쉬워지지. 그래서 선택하는 것이 더 좋은 캐릭터, 혹은 기존 캐릭터의 다른 배리에이션이야.
그런데 이게 모바일 RPG에서 단기적인 수익이나 애정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진 몰라도, 장기적으론 애정이 분산되고 결국엔 유저들을 성능에 눈 돌리게 하거든. 물론 상성 덕에 나중에 좋아하는 캐릭터를 써먹을 순 있겠지. 하지만 유저들이 예전과 똑같은, 혹은 메타 변화 때문에 약하게 느껴지는 애정 캐릭터에 이전과 같은 감정을 계속 느낄 수 있을까?
또 열광적인 팬이라도 감정이 식는 순간이 오기 마련이야. 게임이 재미있으면 애정이 약해져도 재미 때문에 계속 할 수 있어. 하지만 <페이트/그랜드 오더>는 전투가 단조로워 이게 힘든 구조야. 캐릭터 게임이라도 '캐릭터'와 '게임' 두 축으로 리스크를 분산해야 하는데, 이 게임은 무게가 너무 캐릭터에 쏠려 있지.
다미롱: 예. 구조적인 한계가 뚜렷하죠. 그래서 제가 앞에서 '콘텐츠 빨리 추가하기 좋은 구조'라고 얘기했던 것이고요. 메인 시나리오, 막간 이야기, 이벤트 등등 온갖 읽을거리. 읽을거리를 게임의 메인 콘텐츠라고 말하는 것이 조금 웃기긴 합니다만, <페이트/그랜드 오더>는 모바일 RPG라기 보단 비주얼 노벨에 가까운 이상한(?) 게임이잖아요. (웃음)
홀리스: 확실히 독특한 게임이지. 게임이라면 보통 전략성이나 캐릭터 성능 등으로 어필하는데, <페이트/그랜드 오더>는 비주얼 노벨처럼 스토리로 어필하는 게임이니까. 어찌보면 비주얼 노벨이라는 장르가 확실히 자리 잡은 일본이니까 이런 게임이 나왔고 2년 간 버틴게 아닐까 싶어. 그런데 지금 중요한 건 이 게임이 한국에서도 흥행하고 살아남을 수 있느냐잖아. 한국은 비주얼 노벨 장르의 입지가 좁으니까.
다미롱: <페이트/그랜드 오더>는 이런 장르에 익숙한 <페이트>, 타입문 팬을 타깃으로 했으니 리스크가 적지 않을까요? 물론 지금처럼 폭발적인 흥행이 계속 이어지긴 힘들겠지만.
테이: 흥행은 다르겠지. 초반은 다른 수집형 RPG의 전철을 따라가겠지. 그런 면에선 다른 수집형 RPG에 비해 네러티브나 캐릭터성이 뚜렷한 <페이트/그랜드 오더>가 유리한 자리에 서있고.
문제는 이 다음이야. 처음에는 애정이 있고 니즈가 있으니 플레이 하고 돈도 쓰겠지. 하지만 사람은 돈을 많이 쓰면 내가 쓴 돈이 얼마나 효과를 보여줬는지를 신경쓰게 되거든.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내가 쓴 돈이 어떤 결과를 만들었는지는 언젠가 자연스럽게 인식되기 마련이야. 언젠가는 자연스럽게 계산을 하게 된다는 얘기지.
그런데 '별로 지르지 않아도 되겠는데'라는 생각이 들면 어떻게 될까? <페이트/그랜드 오더>는 구조 상 좋은 캐릭터가 없어도 즐길 수 있는 게임이잖아. 그럼 유저들은 좋은 캐릭터가 없어도 된다는 것을 깨달은 이후, 팬심만으로 지갑을 열려고 할까? 그것도 지속적으로.
다미롱: 그 부분은 확실히 약점이죠. 게임을 보면 애초에 포기한 것 같기도 하고요. 더군다나 <페이트/그랜드 오더>는 2년 전 게임이잖아요. 이미 관심 있는 유저들은 앞으로 어떤 얘기가 나오고 어떤 캐릭터가 최강이 될 지 미리 알 수 있죠. 이건 국내 서비스, 정확히 국내 매출에 악영향을 줄 거에요.
결국 새로운 변수를 만들어야 한다는 얘긴데, 이건 앞으로 <페이트/ 그랜드 오더> 외에 어떤 <페이트> 관련 콘텐츠가 나올 것인가, 혹은 넷마블이 <페이트/그랜드 오더>의 이벤트 스케줄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에 달렸겠죠. 그런 의미에선 장기 흥행에 대한 평은 조금 더 추이를 둬야 하지 않을까요?
지난 11월 한국에 개봉한 <페이트/스테이 나이트 - 헤븐즈 필> 극장판 애니메이션 포스터
테이: 난 롱런에 대해선 보수적이야. 일본 모바일 게임의 공통점 중 하나가, 일본에서는 성공했더라도 이 흥행이 글로벌로 이어진 사례는 적다는 것이지. 대부분 일본 버전 그대로 세계 시장에 내니까. <페이트/그랜드 오더>도 게임을 바꾸지 않고 한국에 왔지.
<페이트>에 관심 있는 유저들은 이미 이 게임을 하고 있을 것이고, 그만큼 시리즈에 관심 많으니 게임의 미래(≒ 일본 버전)에 대해서도 잘 알겠지. 신규 유저? 한국은 일본처럼 애니메이션 등 다른 서브컬처 콘텐츠의 위상이 크지 않으니, 다른 페이트 시리즈로 <페이트/그랜드 오더>에 유입되긴 힘들 것이고. 그렇다고 IP에 대한 이해 없이 순수하게 게임이 재미있어 팬이 늘기도 힘든 게임이고.
결국 지금이 절정이라는 얘기지. 오히려 한정 뽑기 개념이 있는 만큼 더 안 좋다면 안 좋지. 좋은 캐릭터 한정 뽑기가 지나갔다면, 신규 유저가 이 게임을 하려고 해도 손해보는 기분을 받을 거잖아.
다미롱: 확실히 한정 이벤트 놓친 유저들이 게임을 시작하긴 꺼려지겠죠. 아무리 무료 배포 캐릭터 성능이 괜찮다 하더라도, 최강(?)이 될 기회를 놓친다고 하면 누구나 찝찝할 것이니까요. 합리적인 소비 패턴을 가진 유저들을 끌어들이기엔 게임이 너무 일본 스타일이긴 합니다.
그런데 게임의 롱런을 어디까지로 봐야 할까요? 모든 게임은 시간이 지날수록 유저가 줄고 순위가 내려가잖아요. 이게 빠르냐 늦냐만 다를 뿐. 결국 얼마나 좋은 성적을 거두느냐 뿐만 아니라, 얼마나 오래 성적을 유지하냐도 봐야 하지 않을까요?
전 이 게임이 훅 떨어질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아요. 한국엔 이렇게 캐릭터성 강한, 스토리에 초점 맞춘 게임이 드물거든요. 뽑기 모델도 의외로(?) 4~5성 캐릭터 나올 확률이 다른 게임에 비해 높고, 또 게임도 좋은 캐릭터에 목 매지 않아도 되는 구조죠. 전 게임의 이런 특징이 자기만의 확실한 위치를 만들 것이라고 생각해요.
테이: 확실히 요즘 루틴한 한국 모바일게임 시장에선 여러 의미에서 신선한 게임이지. 그리고 최근 <대항해의 길> 사례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런 대체제 없는 게임은 자리 잡기 마련이고. 어쩌면 예상 이상으로 초기 성적이 좋았던 것도 이 영향이 일부 있겠지. 오간 얘기를 정리하면, 게임의 독특한 특성 덕에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게임의 구조 때문에 앞으로도 지금과 같은 흥행을 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가 되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