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의 초침은 늘 일정하게 돕니다. 그렇다고 시간이 늘 균등한 것은 아닙니다. 사람의 키가 사춘기에 부쩍 자라듯, 사람의 그릇도 훌쩍 커질 수 있는 특별한 때가 있습니다. 어떤 분야건 격변기가 그런 때라고 생각합니다. 가파른 흐름에 중심을 잃고 쓰러지는 이도 있겠지만, 잘 견뎌내면 짧은 시간 다양한 경험 속에 응축적으로 자랄 수도 있겠죠.
우리나라 온라인게임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개발자 1세대에 그런 분들을 꽤 찾아볼 수 있을 겁니다. 더나인의 박순우 부사장은 그런 초창기 개발자가 아닙니다. 3세대쯤이라고 할까요. 그런데 그의 이력을 살펴보면 흥미롭습니다.
IMF 직후 컨설팅과 벤처캐피털 업무, 한빛소프트 해외사업 지휘와 최연소 이사 승진, 그리고 중국 메이저 온라인게임 회사 부사장으로 발탁. 격변하고 급성장하는 곳에 늘 있었습니다. 그런데 국내 게이머들에는 그다지 많이 알려지지 않았죠. 인터뷰를 피하는 경향이 있거든요.
차이나조이 2008 첫날 그를 찾아갔습니다. 게임계 입문 계기부터 중국시장에 대한 궁금증 보따리를 안고서 말이죠. /상하이=디스이즈게임 시몬(임상훈 기자)
1장: 거친 세상, 내 사업을 해보고 싶었다.
IMF 이후의 우울한 복학. 92학번 경영학도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많지 않았다. 회계사 공부 1년 정도. 컨설팅 회사인 매킨지에 다니는 후배가 멋있어 보였다. 연봉도 많이 받고, 세련된 전문직에, 임원들 상대로 조언도 하고. 컨설턴트 공부를 시작했다. 몇 군데 떨어진 뒤 미국계 컨설팅회사 ADL 코리아에 입사했다.
“운이 좋았죠. 2명 뽑는데 3등을 했거든요. 그런데 1등이 안 와서 입사하게 되었습니다.”
IMF 이후 ‘닷컴 열풍’이 휘몰아치던 시기. 인수합병과 투자 업무가 쏟아졌다. 처음 3년은 일요일에도 쉬지 못했다. 입사하자마자 겹치기 업무. 업무에 금방 익숙해졌다. 그 3년 사이 닷컴 열풍을 타고 컨설팅 업계의 인력도 많이 빠져나갔다.
그리고 곧 거품이 빠졌다. 경기가 나빠져서 나간 사람들이 다시 들어오려고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버드를 나온 사람도 직장을 구하기 힘들어하던 시기. 거시경제가 화려한 경력을 뭉개버리던 때였다.
“거시경제의 영향 탓에 개인의 경력이 아무 소용도 없어지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컨설팅 회사에서 벤처캐피털로 옮겼다.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있던 시기. 기회도 많았고, 운도 좋아서 프로젝트도 많이 맡았다. 비즈니스 스쿨 다녀온 사람을 밑에 데리고 있기도 했고. 그런데 거시경제 앞에, 비즈니스 스쿨 다녀와도 직장을 못 구하는 사람들을 보며 답답해졌다. 경기가 안 좋으면 직장도 안전하지 못하니까.
“평생 할 수 있는 일, 창업을 생각하게 됐습니다.”
창업을 생각하니 세상이 달리 보였다. 그가 직접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사업 하는 분들이 존경스러워 보였다. 컨설팅, 투자 업무를 하면서 했던 말들이 다 건방진 소리였다는 생각도 들었다. 당장 사업을 시작하는 것은 힘들어 보였던 시기였다.
그리고 나서 어떤 분야가 유망할까 살펴보니, 바이오와 IT가 있었다. 인터넷도 쓰고, 관련 컨설팅도 했으니까, IT는 그나마 조금이라도 아는데, 바이오는 전혀 몰랐다. 그래서 IT 관련 경력을 쌓을 생각을 했다.
“그때 한빛소프트에서 연락이 왔죠. 당시 코스닥에 들어간 한빛은 IR(투자자 관계 기업설명활동) 관련 인력이 필요했으니까요. 한빛 관련 투자업무를 진행한 적은 있는데, 저는 잔챙이여서 김영만 회장님은 뵙지도 못했죠. 전략기획팀장이 IR 관련 사원으로 뽑은 거에요.”
2장: 한빛의 해외사업을 이끌다.
2003년 가을 PC게임 사업부에서 송진호 이사 밑에 갔다. 블리자드, 비벤디를 상대로 할 일이 많았는데, 영어가 어느 정도 돼서 해외 업무를 맡게 됐다. 송 이사가 회사를 떠난 뒤에는 PC게임 전반을 맡게 됐다. <카운터스트라이크> 땡처리, <워크래프트3> 반품 등을 처리했다. PC방도 열심히 돌아다녔다.
“지금도 대구, 경북 PC방은 빠삭해요. 3개월 정도 집에 못 들어갔으니까요.”
그 후 한빛소프트는 온라인게임에 진출했고 2004년 해외사업팀이 만들어졌는데, 그는 2007년 1월까지 해외사업 담당했다. <팡야> <위드> <그라나도 에스파다> <헬게이트: 런던> 등으로 약 8,000만 달러(약 813억 원)의 수출실적을 올렸다.
최연소 이사와 상무로 초고속 승진을 한 시기. 특히 <그라나도 에스파다>는 출시도 되기 전에 1,500만 달러(약 159억 원) 이상의 수출실적을 올렸다. 플래그쉽과 온라인게임 서비스 합작법인 ‘핑제로’를 설립한 것도 이 무렵. 덕분에 2006년 말 문화콘텐츠 수출유공자 대상 국무총리상을 타기도 했다.
“1년에 200일을 해외에 나가있었죠. 어떻게든 팔아야 우리 회사와 사업부가 먹고 산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많이 만나고, 성과도 나오니 승진과 함께 외부에서 러브콜도 많아졌다. 2005년 미국, 중국, 기타 아시아권 업체들로부터 이직권유를 받았다. 하지만 당시에는 직접 창업하지 않는 한 김영만 회장과 같이 갈 생각이었으므로 전혀 귀기울이지 않았다. 창업에 뜻을 가지고 있어서 오너 관점에서 생각하는 버릇이 들었다. 그러니 오너가 예뻐해 주는 것은 당연한 이치.
“김영만 회장님이 절 많이 예뻐해 주셨어요. 많이 배우기도 했고요.”
더나인의 주준 사장의 제안도 그 무렵에 있었다. <헬게이트: 런던> 관련 계약을 진행하고 있던 시기. 가격 협상 때문에 그런 제안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 거절했다. 그런데 계약 체결 후에도 몇 차례 제안이 왔다. 진의를 의심하지 않게 됐다. 내부적으로도 좌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김 회장과의 사이는 좋았지만, 회사 방향에 대한 이견이 꽤 있었다. 좁히기 힘들겠다고 생각하던 시기. (관계자에 따르면, 박 부사장은 <헬게이트: 런던>의 개발 관리와 미국 서비스를 위해 직접 미국에 가겠다고 했는데, 김 회장의 반대에 부딪쳤다고 한다. 이후 국내 서비스와 관련해서도 역량 있는 파트너에 맡기는 방향을 제안했는데, 이 역시 거절당했다고 한다.) 게다가 그 동안 주로 해왔던 일이 해외사업이다 보니 실제 게임의 개발과 운영 등을 직접 해보고 싶은 욕심도 났다.
“그래서 중국을 택했죠. 중국 시장은 계속 커질 텐데 너무 무지했으니까요.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중국 업체 중에 사장도 알고, 한국과 분쟁이 없었던 더나인에 가기로 했어요. 더욱이 <헬기이트: 런던>을 로컬라이제이션하고 운영해볼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3장: 중국에서 새로운 도전을 하다.
중국에 오면서 주 사장에게 BD(Business Development, 신규사업 개발)는 안 하고, 오퍼레이션(로컬라이제이션, 마케팅, 운영 등)을 하겠다고 했다. 호랑이 굴에 가서 호랑이를 배우려면 직접 현지의 사업을 해봐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헬게이트: 런던> 중국 사업 담당 업무를 맡게 됐다. 그런데 BD 담당이 그의 입사 후 곧 퇴사해버렸다. 어쩔 수 없이 다시 BD를 맡아야 하는 상황.
“주 사장님도 부탁하고, <헬게이트: 런던>도 당장 바쁘지 않아 담당하는 일의 비중 중 BD가 더 커지게 되어 버렸죠.”
그러나 올해 초부터 다시 오퍼레이션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고 있는 중이다. 그가 현재 추진 또는 진행 중인 프로젝트는 크게 세 가지다.
(1) 한국 개발자와 중국 개발자의 혼성팀을 구성해 게임 만들기
(2) 순수 중국 개발자들로 구성된 개발팀으로 게임 만들기
(3) 중국에는 아직 없는 게임 포털 만들기
“중국으로 건너온 것에 놀라는 분들이 많았어요. 하지만 그건 쉬운 결정이었던 것 같아요. 오히려 개발에 몸 담는 게 더 위험하고 어려운 결정이었죠. 안 해본 것이고, 모르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시도해보고 싶었어요. 아직 확실히 진행이 결정되지 않았고 추진 중인데, 진행될 것 같습니다.”
그는 지난 6개월 동안 게임 포털 프로젝트를 함께 할 인재를 모으기 위해 중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녔다. 일반 포털 쪽 인재는 게임을 잘 모르고, 게임 쪽 인재는 포털에 대해 겉도는 경향이 많다. 게임과 포털을 모두 이해하고, 균형을 맞출 수 있는 사람을 찾아야 하는데 어렵다.
게다가 현재 중국은 인재 전쟁 중. 유치도 전쟁이고, 유지도 전쟁이다. 어느 정도 직위에 있는 사람은 한국보다 연봉이 세다. 작은 벤처에서 데려오기는 오히려 더 힘들다. IPO 기대감이 높으니까. 전략적으로 2~3위 업체를 찾아가서 직접 인재들을 만나고 있다. 비전이 맞는지, 궁합이 맞는지 알아보고, 설득하고.
“중국은 넓잖아요. 심천, 북경 등을 열심히 돌았죠. 다행히 최근 한 친구를 데려왔는데, 이후 줄줄이 엮여서 오더라고요.”
더나인은 현재 포털이 없다. 중박 타이틀을 만들기 어렵다. 동시접속자가 수십만 나오거나 아예 잘 안 나오거나. 개별 타이틀에 대한 맨땅에 헤딩식 마케팅 비용도 부담스럽다. 현재 중국에는 없는, 한국의 넥슨이나 엠게임 같은 포털은 성공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대단한 것을 할 생각은 아니다. 작게 겸손하게 시작해 확장할 각오. 중국은 <포커>나 <고스톱> 같은 킬러가 없다. 중국은 공식적으로 도박을 금지하고 있고, 괜히 정부와 관련된 위험을 택할 수는 없다.
그래서 기대를 걸고 있는 게임이 <오디션2>다. 웹과 게임이 연동 잘 되게 구성되도록 티쓰리와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는 중이다. 실속 있는 탄탄한 플랫폼이 될 수 있도록. 게임이 잘 되면 포털이 뜨고, 그러다가 결국 포털이 다른 게임 도와줄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한빛온의 시도가 좋았는데, 제가 있을 때는 몇 가지 이유로 꽃을 피우지 못했죠. 한국에서 쌓은 노하우와 중국 아이디어를 합쳐서 재미있는 게 나오지 않을까 싶어요. <오디션2>가 나오는 올 연말이나 내년 초쯤에는 말이죠.”
4장: 게임회사에서 하고 싶은 일.
그는 게이머로서는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한다. 대신 게임판은 많이 배웠다. 그가 보는 성공한 한국 게임회사는 크게 두 가지 부류다. 천재가 세운 회사이거나, 아주 오랫동안 죽을 고생을 한 뒤 빛을 보거나.
두 가지 경우 모두 ‘슈퍼맨’이라고 생각한다. 감히 일반적인 게임회사 직원들이 다가갈 수 없는. 대부분 게임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은 대기업이 안 맞거나, 게임이 좋다는 이유로 들어온다. 그런데 그가 어린(?) 시절 회사생활을 하면서 느꼈던 불안함은 지금도 여전히 존재한다.
“장기적인 비전이 없어요. 게임회사의 직원들이 40대 이후를 쉽게 그리기 어려울 것 같아요.”
그래서 게임이라는 ‘창조적인 사업’에서 직업적 보장을 찾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싶다. 개발자가 아니면 비전을 그리기 쉽지 않은 게임회사에 그런 비전을 느끼게 해주고 싶다. 그게 아마 그가 리더십 책을 열심히 읽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괜찮은 리더가 되기 위한 연습을 계속 하는 과정이기도 할 테고.
“슈퍼맨이 아닌 일반 직원들도 게임회사에서 신입사원 때부터 나이 들어서까지의 비전을 그릴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열심히 찾아보고 실천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