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어도 인적으로 우리가 알던 블리자드는 없는 것 같습니다. 마이크 모하임, 크리스 멧젠, 롭 팔도, 벤 브로드, 앨런 다비리, 더스틴 브로더... 블리자드의 얼굴들이 대부분 블리자드를 떠나 새 회사를 차렸습니다.
최근 이러한 '블'렉시트(블리자드+엑시트)가 가속화되고 있는데요. 알렌 브랙과 제프 카플란 같은 인물은 아직 남아있지만, 블리자드를 떠난 사람들의 이름을 보고 있으면 왠지 모를 격세지감이 느껴집니다. 이제 블리즈컨 무대에서 우리를 즐겁게 해줄 사람은 누구일까요?
유저 커뮤니티에서는 "중국 눈치를 보지 않기 위해 나갔다", "액티비전에 인수된 이후 블리자드를 떠났다" 등 다양한 해석이 오갑니다. 새 둥지를 차린 스타 개발자들은 대체로 새로운 환경에서 창의력을 발휘하기 위해 독립 회사를 차렸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표면적으로는 이전 회사에 대한 존중을 드러내고 있죠.
사건이 반복되면 현상이 됩니다. 이 '블렉시트' 현상을 보다 자세히 보기 위해 사례를 모아봤습니다.
'마사장'으로 친숙한 마이크 모하임은 지난 9월 말, 새로운 회사 드림헤이븐의 창립 소식을 전했습니다.
새 회사에는 대부분 블리자드에서 커리어를 쌓은 시니어 개발자들이 합류했는데요. 밴 톰슨, 제이슨 체이스는 물론 앨런 다비리와 더스틴 브로더가 뭉쳤습니다. 그렇습니다! 고급 레스토랑 <히오스>의 셰프 두 사람이 한 둥지에 다시 모인 것이죠.
'마사장'은 지난 2018년 "블리자드를 이끌 새로운 인물이 필요하다"며 회사를 떠났는데요. 비슷한 시점에 회사를 떠난 개발자들을 모아 독창적이고 새로운 게임을 만들기 위해 드림헤이븐을 설립했다고 합니다. 드림헤이븐은 퍼블리셔로 자리 잡고, 그 밑에 '문샷게임즈'가 '시크릿도어' 새 게임을 개발합니다.
그림도 잘 그리고, 더빙도 잘 하고, 세계관도 잘 짜는 블리자드의 팔색조 크리스 멧젠이 TRPG를 만들겠다고 선언했습니다. 10월 28일 나온 따끈따끈한 소식인데요.
워치프 게이밍은 원래 캘리포니아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보드게임 클럽이었습니다. 2016년 은퇴를 선언하고 가족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던 멧젠은 시간 날 때마다 워치프 게이밍을 드나들며 젊은 날 자신을 열광시켰던 TRPG에 다시 푹 빠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멧젠은 다시 게임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강하게 품었고, 오랜 친구 마이클 길마틴과 손을 잡고 보드게임 클럽을 TRPG 전문 제작사로 만든 것이지요. 블리자드에서 했던 것처럼, 크리스 멧젠은 창의적인 일을, 마이크 길마틴은 QA 업무를 맡습니다. 프로덕트 개발자로는 <하스스톤>의 디자이너였던 라이언 콜린스를 영입했습니다.
BB(벤 브로드)와 <하스스톤>의 초기 개발팀 '팀 파이브'는 2018년 8월, 새 회사 세컨드 디너를 공개했습니다.
작년 1월, 세컨드 디너는 캘리포니아 어바인에서 '마블' IP를 활용한 모바일게임을 제작한다고 밝혔습니다. 중국의 넷이즈로부터 3천만 달러 정도를 초기 개발 자금으로 받았다고 하네요.
10월 현재, 회사에는 총 23명이 일하고 있으며 코로나19의 여파로 재택근무 방식으로 협업 중입니다. 게임의 장르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멤버들 면면 때문에 장르는 트레이딩 카드 게임이 될 거란 추측이 지배적입니다.
세컨드 디너의 핵심 개발진이 카드게임 출신이라면, 프로스트 자이언츠의 멤버들은 <스타크래프트 2> 출신입니다.
지난 10월 20일 발표된 프로스트 자이언츠에는 팀 모튼 <스타 2> PD, 팀 캠벨 <워크래프트 3> 수석 캠페인 디자이너 등이 멤버로 있습니다. 현재 팀원 9명이 전부 블리자드에서 일한 경험이 있습니다.
프로스트 자이언츠는 진입 장벽이 낮은 AAA급 RTS 개발을 목표로 하는데요. 라이엇게임즈, 그리핀 게이밍 파트너스, 비트크래프트로부터 약 53억 원에 달하는 투자금을 유치했습니다. 미국 현지 시각으로 20일 발표된 곳이라 정보는 많지 않지만, RTS 팬이라면 조금의 기대를 걸어볼 만한 회사 같습니다.
본파이어 스튜디오는 앞서 정리한 곳들보다 훨씬 앞선 2016년 세워진 곳입니다. 블리자드 전 CCO 롭 팔도, <디아블로 3>의 조시 모스케이라, 전 시네마틱 부사장 닉 카펜터 세 사람이 세운 곳인데요. 역시 캘리포니아 어바인에 회사를 차렸습니다.
이곳도 프로스트 자이언츠와 마찬가지로 라이엇게임즈로부터 투자금을 받았는데요. 뉴욕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2,500만 달러의 투자를 받았다고 합니다. 인터뷰를 종합하면, 2016년부터 지금까지 PC 베이스의 멀티 게임을 개발 중입니다.
블리자드뿐 아니라 업계 베테랑 출신들 개발자들이 다수 뭉친 곳이라 기대가 큰 회사입니다. '폭풍의 후예들' 출신 일러스트레이터들이 여럿 합류했으며, 넥슨 아메리카 CEO였던 김민도 이름을 올렸습니다.
2016년으로부터 시간이 꽤 많이 흐른 만큼 본파이어 스튜디오의 신작 소식을 빨리 보고 싶네요.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게 있습니다. 바로 블리자드 출신 스타들이 블리자드에서 나간다고 다 잘 되는 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스타크래프트>, <디아블로 2>에 참가했으며 <WOW>의 총괄 프로듀서였던 마크 컨은 2005년 레드5스튜디오를 세웠지만, 2013년 자신이 세운 회사에서 해임됐습니다. 이후로도 블리자드 출신 베테랑들이 계속 신작을 개발했고, 2014년 스팀에 MMOFPS <파이어폴>을 론칭했지만 3년 만에 문을 닫았습니다.
레드5스튜디오 출범 2년 전, <스타크래프트>와 <디아블로 2>의 프로듀서 빌 로퍼는 2003년 플래그십 스튜디오를 띄웠습니다. 스튜디오는 2007년 <헬게이트 런던>을 출시했지만, 예상과 다른 성과를 거두었죠. 그리고 그 책임자 빌 로퍼는 (짤방이 되거나) 잊혀졌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커리어가 결과를 100% 보증하지 않는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는데요. 과거 한국 회사들이 <파이어폴>과 <헬게이트 런던>에 투자했던 것처럼, 지금은 블리자드의 대항마로 거론되는 라이엇게임즈가 본파이어 스튜디오와 프로스트 자이언츠에 투자했습니다.
라이엇게임즈의 투자는 흑역사가 될까요? 아니면 신의 한 수가 될까요?